Atelier de traduction : 조선말 큰사전

Texte original:

말은 사람들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조선 말은, 우리 겨레가 반 만 년 역사적 생활에서 문화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결과이다. 그 낱낱의 말은, 다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 준 거룩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 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 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말은 조선 사람에게 너무 가깝고 친한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조선 사람에게서 가장 멀어지고 설어지게 되었다. 우리들이 항상 힘써서 배우고 닦고 한 것은 다만 남의 말, 남의 글이요, 제 말과 제 글은 아주 무시하고 천대해 왔다. 날마다 뒤적거리는 것은 다만 한문의 자전과 운서뿐이요, 제 나라 말의 사전은 아예 필요조차 느끼지 아니하였다. 프랑스 사람이 와서는 프랑스 말로써 조선어 사전을 만들고, 미국, 영국 사람이 와서는 각각 영어로써 조선어 사전을 만들고, 일본 사람이 와서는 일본 말로써 조선어 사전을 만들었으나, 이것은 다 자기네의 필요를 위하여 만든 것이요, 우리의 소용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제 말의 사전을 가지지 못한 것은 문화 민족의 커다란 수치일 뿐 아니라, 민족 자체의 문 화 향상을 꾀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아, 이 수치를 씻고자, 우리 문화 향상의 밑천을 장만하고자, 우리가 우리 손으로, 조선 말 사전의 편찬 사업을 처음으로 계획한 것은 융희4 (서기 1910) 년부터의 일이었으니, 당시 조선 광문회에서 이 일을 착수하여, 수년 동안 재료 작성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정으로 인하여 아깝게도 열매를 맺지 못하였고, 십여 년 뒤에 계명 구락부에서 다시 시작하였으나, 이 또한 중도에 그치고 말았었다.

 
이 민족적 사업을 이루지 않고서는 아니 될 것을 깊이 각오한 우리 사회는, 이에 새로운 결의로써 기원 4261 (서기 1928)년 한글날에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창립하였다. 처음에는 조선어 학회와 조선어 사전 편찬회가 두 날개가 되어, 하나는 맞춤법, 표준말 들의 기초 공사를 맡고, 하나는 낱말을 모아 그 뜻을 밝히는 일을 힘써 오다가, 그 뒤에는 형편에 따라 조선어 학회가 사전 편찬회의 사업을 넘겨 맡게 되었으니, 이는 조선어 학회가 특별한 재력과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까무러져가는 사전 편찬회의 최후를 거저 앉아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과 뜨거운 정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포학한 왜정의 억압과 곤궁한 경제의 쪼들림 가운데서, 오직 구원한 민족적 정신을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하고, 원대한 문화적 의욕에 부추긴 바 되어, 한 자루의 모지라진 붓으로 천만가지 곤난과 싸워 온 지 열 다섯 해만에 만족하지 못한 원고를 인쇄에 붙이었더니, 애닯도다, 험한 길은 갈쑤록 태산이라, 기어이 우리 말과 글을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포학 무도한 왜정은, 그 해, 곧 기원 4275년의 시월에, 편찬회와 어학회에 관계된 사람 삼십여 명을 검거하매, 사전 원고도 사람과 함께 흥원과 함흥으로 굴러 다니며 감옥살이를 겪은 지 꼭 세 돐 이나 되었었다.


그 간에 동지 두 분은 원통히도 옥중의 고혼으로 사라지고, 마지막의 공판을 받은 사람은 열 두 사람이요, 끝까지 옥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섯 사람은 그 실날 같은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이 바드러워, 오늘 꺼질까, 내일 사라질까, 하던 차에 반갑다, 조국 해방을 외치는 자유의 종소리가 굳게 닫힌 옥문을 깨뜨리어, 까물거리던 쇠잔한 목숨과 함께, 흩어졌던 원고가 도로 살아남을 얻었으니, 이 어찌 한갖 조선어 학회 동지들만의 기쁨이랴?


 서울에 돌아오자, 곧 감옥에서 헤어졌던 동지들이 다시 모여, 한 편으로는 강습회를 차려 한글을 가르치며, 한 편으로는 꺾이었던 붓자루를 다시 가다듬어 잡고, 흐트러진 원고를 그러모아, 깁고 보태어 가면서 다듬질하기 두 해만에, 이제 겨우 그 첫 권을 박아, 오백 한 돌인 한글날을 잡아, 천하에 펴 내게 된 것이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다시 기움질을 받아야 할 곳이 많으매, 그 질적 완성은 먼 뒷날을 기다릴 밖에 없지마는, 우선 이만한 것으로, 하나는 써 조국 광복, 문화 부흥에 분주한 우리 사회의 기대에 대답하며, 또 하나는 써 문화 민족의 체면을 세우는 첫 걸음을 삼고자 한다.


돌아보건대, 스무 해 전에, 사전 편찬을 시작한 것은 조상의 끼친 문화재를 모아 보존하여, 저 일본의 포학한 동화 정책에 소멸됨을 면하게 하여, 써 자손 만대에 전하고자 하던 일에 악운이 갈쑤록 짓궂어, 그 소극적 기도조차 위태한 지경에 빠지기 몇 번이었던가? 이제 그 아홉 죽음에서, 한 삶을 얻고 보니, 때는 엄동 설한이 지나간 봄철이요, 침침 칠야가 밝아진 아침이라, 광명이 사방에 가득하고, 생명이 천지에 약동한다. 인제는 이 책이 다만 앞사람의 유산을 찾는 도움이 됨에 그치지 아니하고, 나아가서는 민족 문화를 창조하는 활동의 이로운 연장이 되며, 또 그 창조된 문화재를 거두어 들여, 앞으로 자꾸 충실해 가는 보배로운 곳집이 되기를 바라 말지 아니한다.

 
끝으로, 이 사업 진행의 자세한 경과는 따로 밝히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다만 이 사업을 찬조하며 후원하여 주신 여러 분에게 삼가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바이다.


 

Traduction(s)

Préface de Chosǒnmal K’ǔnsajǒn

Texte original

Traduction

말은 사람들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조선 말은, 우리 겨레가 반 만 년 역사적 생활에서 문화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결과이다. 그 낱낱의 말은, 다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 준 거룩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 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 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말은 조선 사람에게 너무 가깝고 친한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조선 사람에게서 가장 멀어지고 설어지게 되었다. 우리들이 항상 힘써서 배우고 닦고 한 것은 다만 남의 말, 남의 글이요, 제 말과 제 글은 아주 무시하고 천대해 왔다. 날마다 뒤적거리는 것은 다만 한문의 자전과 운서뿐이요, 제 나라 말의 사전은 아예 필요조차 느끼지 아니하였다. 프랑스 사람이 와서는 프랑스 말로써 조선어 사전을 만들고, 미국, 영국 사람이 와서는 각각 영어로써 조선어 사전을 만들고, 일본 사람이 와서는 일본 말로써 조선어 사전을 만들었으나, 이것은 다 자기네의 필요를 위하여 만든 것이요, 우리의 소용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제 말의 사전을 가지지 못한 것은 문화 민족의 커다란 수치일 뿐 아니라, 민족 자체의 문 화 향상을 꾀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아, 이 수치를 씻고자, 우리 문화 향상의 밑천을 장만하고자, 우리가 우리 손으로, 조선 말 사전의 편찬 사업을 처음으로 계획한 것은 융희4 (서기 1910) 년부터의 일이었으니, 당시 조선 광문회에서 이 일을 착수하여, 수년 동안 재료 작성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정으로 인하여 아깝게도 열매를 맺지 못하였고, 십여 년 뒤에 계명 구락부에서 다시 시작하였으나, 이 또한 중도에 그치고 말았었다.

 
이 민족적 사업을 이루지 않고서는 아니 될 것을 깊이 각오한 우리 사회는, 이에 새로운 결의로써 기원 4261 (서기 1928)년 한글날에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창립하였다. 처음에는 조선어 학회와 조선어 사전 편찬회가 두 날개가 되어, 하나는 맞춤법, 표준말 들의 기초 공사를 맡고, 하나는 낱말을 모아 그 뜻을 밝히는 일을 힘써 오다가, 그 뒤에는 형편에 따라 조선어 학회가 사전 편찬회의 사업을 넘겨 맡게 되었으니, 이는 조선어 학회가 특별한 재력과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까무러져가는 사전 편찬회의 최후를 거저 앉아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과 뜨거운 정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포학한 왜정의 억압과 곤궁한 경제의 쪼들림 가운데서, 오직 구원한 민족적 정신을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하고, 원대한 문화적 의욕에 부추긴 바 되어, 한 자루의 모지라진 붓으로 천만가지 곤난과 싸워 온 지 열 다섯 해만에 만족하지 못한 원고를 인쇄에 붙이었더니, 애닯도다, 험한 길은 갈쑤록 태산이라, 기어이 우리 말과 글을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포학 무도한 왜정은, 그 해, 곧 기원 4275년의 시월에, 편찬회와 어학회에 관계된 사람 삼십여 명을 검거하매, 사전 원고도 사람과 함께 흥원과 함흥으로 굴러 다니며 감옥살이를 겪은 지 꼭 세 돐 이나 되었었다.


그 간에 동지 두 분은 원통히도 옥중의 고혼으로 사라지고, 마지막의 공판을 받은 사람은 열 두 사람이요, 끝까지 옥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섯 사람은 그 실날 같은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이 바드러워, 오늘 꺼질까, 내일 사라질까, 하던 차에 반갑다, 조국 해방을 외치는 자유의 종소리가 굳게 닫힌 옥문을 깨뜨리어, 까물거리던 쇠잔한 목숨과 함께, 흩어졌던 원고가 도로 살아남을 얻었으니, 이 어찌 한갖 조선어 학회 동지들만의 기쁨이랴?


 서울에 돌아오자, 곧 감옥에서 헤어졌던 동지들이 다시 모여, 한 편으로는 강습회를 차려 한글을 가르치며, 한 편으로는 꺾이었던 붓자루를 다시 가다듬어 잡고, 흐트러진 원고를 그러모아, 깁고 보태어 가면서 다듬질하기 두 해만에, 이제 겨우 그 첫 권을 박아, 오백 한 돌인 한글날을 잡아, 천하에 펴 내게 된 것이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다시 기움질을 받아야 할 곳이 많으매, 그 질적 완성은 먼 뒷날을 기다릴 밖에 없지마는, 우선 이만한 것으로, 하나는 써 조국 광복, 문화 부흥에 분주한 우리 사회의 기대에 대답하며, 또 하나는 써 문화 민족의 체면을 세우는 첫 걸음을 삼고자 한다.


돌아보건대, 스무 해 전에, 사전 편찬을 시작한 것은 조상의 끼친 문화재를 모아 보존하여, 저 일본의 포학한 동화 정책에 소멸됨을 면하게 하여, 써 자손 만대에 전하고자 하던 일에 악운이 갈쑤록 짓궂어, 그 소극적 기도조차 위태한 지경에 빠지기 몇 번이었던가? 이제 그 아홉 죽음에서, 한 삶을 얻고 보니, 때는 엄동 설한이 지나간 봄철이요, 침침 칠야가 밝아진 아침이라, 광명이 사방에 가득하고, 생명이 천지에 약동한다. 인제는 이 책이 다만 앞사람의 유산을 찾는 도움이 됨에 그치지 아니하고, 나아가서는 민족 문화를 창조하는 활동의 이로운 연장이 되며, 또 그 창조된 문화재를 거두어 들여, 앞으로 자꾸 충실해 가는 보배로운 곳집이 되기를 바라 말지 아니한다.

 
끝으로, 이 사업 진행의 자세한 경과는 따로 밝히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다만 이 사업을 찬조하며 후원하여 주신 여러 분에게 삼가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바이다.

 La langue est la spécificité de l’homme, le fruit d’un peuple, et le symbole d’une culture.

La langue coréenne, est ce dans quoi durant cinq mille ans d’histoire, nos activités culturelles ont eu leur source ; elle en est l’outil et le fruit.

Chacun de ses mots est un trésor sacré légué par nos innombrables ancêtres qui les ont mis bout à bout, sans interruption, complétés et arrangés.

La langue coréenne est, pour ainsi dire, le catalogue exhaustif du capital spirituel et matériel de notre peuple, ceci étant, sans cette langue, nous ne pouvons survivre un jour, une seconde.

 

La langue coréenne étant trop proche, trop familière aux Coréens, en est paradoxalement venue à être la plus éloignée et à ne pas être bien connue d’eux.

Ce que nous nous sommes appliqués assidûment à apprendre et à améliorer n’étaient que les langues et les écritures d’autrui, et nous avons méprisé et maltraité notre langue, notre écriture.

Ce que nous consultions tous les jours était seulement dictionnaire sino-coréen et le recueil des caractères chinois, et nous n’éprouvions même pas la nécessité d’un dictionnaire de notre propre langue.

Les Français sont venus et ont fait un dictionnaire coréen en français, les Américains et les Anglais sont venus, et ont chacun rédigé un dictionnaire coréen en anglais, et les Japonais en ont écrit un en japonais, mais c’était pour leur propre besoin, et il n’était pas destiné aux Coréens.

Nous avons pris vivement conscience non seulement que l’absence d’un dictionnaire de sa propre langue est une grande honte pour un peuple de culture, mais aussi que, dans ces conditions, il est impossible d’entreprendre le développement de notre propre culture. C’est pour essuyer cette honte, et pour préparer la base de développement de notre culture, que nous avons conçu pour la première fois le projet d’éditer nous-mêmes un dictionnaire de la langue coréenne dès la 4e année Yunghi (1910). A cette époque, l’Association coréenne pour le rayonnement des lettres (Chosǒn Kwangmunhoe) a entamé cette tâche et a déployé durant de nombreuses années ses efforts dans la rédaction des éléments.

Du fait de certaines circonstances, ce travail n’a malheureusement pas pu porter ses fruits. Il a été repris environ dix ans après par l’Amicale pour la diffusion des lumières (Kyemyǒng Kurakpu), mais là encore, il a été interrompu.

 

Déterminés à accomplir coûte que coûte ce projet d’envergure nationale, nous avons créé, avec une résolution renouvelée, l’Association pour la publication du dictionnaire coréen le jour de la fête du Hangǔl de l’an 4261 (1928 de l’ère chrétienne).

Au début, l’Association pour l’étude de la langue coréenne et l’Association pour la publication du dictionnaire coréen, formaient deux branches du projet, la première, s’occupant de la base des règles d’orthographe et du coréen standard, et la seconde, prenant en charge le recueil des mots et la détermination de leur sens. Plus tard, l’Association pour l’étude de la langue coréenne a dû reprendre le travail de l’Association pour la publication du dictionnaire coréen, non pas parce qu’elle avait des capacités financières ou des projets particuliers, mais parce qu’elle ressentait une inquiétude et un attachement profond à ce projet, qui lui interdisait d’assister les bras croisés à la fin de l’Association pour la publication du dictionnaire coréen qui se délitait.

 

Cela faisait quinze ans que, sous l’oppression d’un violent régime japonais et dans une situation économique déplorable, avec le seul esprit coréen éternel au fond du cœur, encouragés par la motivation d’une culture immense, munis d’un pinceau usé, nous nous battions contre des myriades de difficultés, lorsque, finalement, nos manuscrits, même insatisfaisants, venaient d’être envoyés à l’imprimerie. Comble du déchirement, nous avons dû affronter des obstacles de plus en plus insurmontables sur notre route. Le régime japonais, sauvage et cruel, qui cherchait à éradiquer coûte que coûte notre langue et notre écriture, a arrêté en octobre de cette année de 4275, une trentaine de personnes liées à l’Association pour la publication du dictionnaire coréen et à l’Association pour l’étude de la langue. Et depuis exactement trois ans, les manuscrits ont été ballottés de Hǔngwǒn à Hamhǔng et les personnes arrêtées y ont connu la prison. 

Durant cette période, deux de nos camarades ont injustement rendu l’âme en prison, douze ont reçu leur sentence, et cinq qui n’ont pas pu échapper à la prison y survivaient à peine ; leur vie ne tenant qu’à un fil risquait de s’éteindre du jour au lendemain. Miracle ! C’est à ce moment là, que la cloche de la liberté sonnant la libération du pays détruisit les portes verrouillées de la prison, et que les manuscrits éparpillés ont pu ressusciter, ainsi que nos prisonniers épuisés et chancelants. Alors, comment cette joie pourrait-elle être celle des seuls camarades de l’Association pour l’étude de la langue ?

De retour à Séoul, les camarades ayant été séparés en prison se sont réunis, ils ont créé des cours et y ont enseigné le coréen, et avec le pinceau cassé en main, ils ont rassemblé les manuscrits éparpillés, les ont retouchés et les ont complétés. Aujourd’hui, deux ans après, nous en sommes à peine au premier volume, que nous publions pour le présenter au monde, à l’occasion du 501e anniversaire de l’invention du hangǔl.

Du point de vue de son contenu, beaucoup d’endroits nécessitent une retouche, et pour la qualité, nous ne pourrons l’espérer parfaite que dans un futur lointain, mais nous présentons le volume tel quel, d’une part pour répondre aux attentes de la société occupée à restaurer l’indépendance de notre pays et la renaissance de notre culture, et d’autre part, pour faire un premier pas vers la restauration de la dignité d’un peuple de culture.

Rétrospectivement, la publication de ce dictionnaire entreprise il y a vingt ans pour réunir et préserver les trésors culturels légués par nos ancêtres et pour les empêcher de disparaître dans la cruelle politique d’assimilation du Japon, avait eu pour but leur transmission à nos enfants, de génération en génération. Pourtant, la malchance, de plus en plus cruelle, entravait ce projet, et combien de fois une telle tentative si modeste soit-elle a-t-elle failli tomber dans une situation fatale ?

Après avoir souffert mille morts, la vie l’a emporté, et nous nous réveillons au printemps après les sévères frimas de l’hiver, au matin lumineux après une nuit noire, la lumière se répand de tous côtés, la vie s’élance dans le ciel et sur la terre.

Maintenant, notre souhait le plus sincère est que ce livre ne se limite pas à la contribution d’une quête de l’héritage des personnes qui nous ont précédés, mais qu’au-delà, il devienne un outil utile de la création de notre culture, pour finalement constituer le dépôt précieux qui s’enrichit de plus en plus des trésors culturels ainsi créés et récoltés.

Le détail du parcours de ce projet sera donné ailleurs, et il nous reste ici à adresser nos remerciements à tous ceux qui ont soutenu ce projet et qui y ont prêté leur concours.

Fête de l’invention du Hangǔl, en l’an 4280 (année 1947 de l’ère chrétienne)

Association pour l’étude de la langue coréenne

 

 

 
 

Autour du texte: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