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e original : 15. 1950년대 비구와 대처승의 갈등(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한국 불교의 대표적 종파인 조계종은 불과 10여 년 전인 1998년에 서울 한복판에서 종권분쟁의 극단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불교 본래 의 이미지를 실추시켜버렸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간 조계종의 이권분쟁이 수시로 야기되어온 원인과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1950년대의 이른바 비구比丘·대처帶妻 간의 불교 분규가 남긴 문제점과 후유증이 있다. 따라서 비구·대처승 간의 불교분쟁은 현재의 한국 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그러면 1950년대에 불교분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원인은 무엇일까 ? 그것은 무엇보다도 해방 이후 식민지 불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근대사회로의 전환기에 한국 불교가 주체적으로 봉건적인 틀을 벗어나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지 못했던 데 기인한다고 하겠다. 

불교분쟁의 시작

 

물론 해방 이후 일반적인 역사 흐름과 마찬가지로 불교계에서도 불교혁신세력에 의해 식민지 불교의 청산을 요구하고 민족종교로서 민족국가건설의 민족적 과제에 동참하기 위한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분단고착화 과정에서 불교혁신세력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새로운 근대적 불교의 방향성을 모색할 만한 주체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1950년대 초기 불교계는 식민지 불교 청산을 위한 내적 역량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다만 친일 불교계가 해방 이후 총무원總務院체제로 이어지던 상황에서 이에 대응했던 또 다른 세력으로 비구 수행승을 중심으로 한 선학원禪學院 계열이 존재하고 있었다. 

 

선학원은 일제강점기에 교종敎宗을 표방하는 대처승에 의해 한국 불교가 식민지 불교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한국 불교의 특징인 선종禪宗을 부흥시키려는 입장에서 설립된 것이었다. 따라서 비구승들은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거시적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진단하기보다는, 전통적인 선불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분규가 어떻게 발생하고 전개되었는지 간략하 게 살펴보기로 한다. 

식민불교의 청산과 정통성 문제

 

당시 불교계에서 대처승 측은 7천여 명의 승려들이 1,300여 사찰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비구 측은 300-500 명 정도에 불과했다. 절대적 기득권을 가진 대처 측과는 달리 더부살이 신세로 지내던 비구승들은 자신들이 수도할 도량을 일부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만암曼庵 종정은   1952년 전국승려대표자대회 및 고승회의를 개최하여 선승들이 수도할 수행도량으로 넘겨줄 사찰을 논의하 도록 했다. 그러나 1953년 5월 태고사에서 열린 주지회의에서 대처 측이 해당 사찰을 내놓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이 계획은 사실상 백지화되었다. 

 

비구 측은 선학원에서 회의를 갖고 승단 정화에 뜻을 모으려 했지만 구체적인 대응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 문제에 대한 담화가 발표되면서 불교분규는 폭발적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1차 담화 내용은 왜색 불교인 대처승을 사찰에서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담화가 발표된 이후 대처 측은 6월 10일 불국사에서 법규위원회를 개최하여 조계종 교헌을 개정하고 승단을 교화단과 수행단으로 구분했다. 또한 수행승단 에 대한 사찰배분 논의가 있었으나, 그 역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에 비구 측은 8월24일 선학원에서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교단정화를 위한 대책위원회 구성을 논의했다. 이어 9월  28일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종헌을 제정하고, 종정에 만암, 부종정에 동산東山, 도총섭에 청담靑潭, 종회 의장에 효봉曉峰을 세운 새로운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이로 인해 비구·대처의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양측은 여러 차례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모색하기도 했다. 가령 비구 측은 동산·청담이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었던 데 비해, 효봉·금오金烏는 온건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 대처승이 소유한 절을 한꺼번에 장악하지 않으면 후일 화근이 된다는 주장을 했지만, 후자는 비구승은 숫자도 적으며, 사판事判(사찰의 행정과 재무업무 담당)에 서툴기 때문에 서서히 정화를 추진하자는 입장이었다 대처 측도 나름대로 수행·교화 양 체제를 모색하는 등 부분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한편, 양측의 대립 과정에서 종조宗祖 논쟁이라는 정통성 관련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선종 특유의 정통론인 법통설法統說은 조선시대 이래 선종이 주류 교단이 됨으로써 명분상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이래 법통, 법맥 문제를 두고 불교계 내부에서 논란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법통설을 둘러싼 논의가 재개되어 도의道義종조설, 범일梵日종조설, 나옹懶翁종조설 등 다양한 주장이 있었지만, 중심적인 논쟁 은 태고법통설太古法統說과 지눌법통설知訥法統說을 둘러싼 것이었다. 

 

태고법통설은 일제강점기부터 김영수, 권상로權相老 등이 적극적으로 제기했으며, 당시 대처승 측에 의해 수용되었다. 지눌법통설은 본래 이능화가 주장했으며, 이재열·이종익李鍾益 등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런데 비구 측에서는  8,9월에  1,2차 비구승대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종헌을 제정하면서 보조국사 지눌을 종조로 할 것을 주장했다. 따라서 누구를 종조로 삼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는 어느 쪽에서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가를 둘러싼 치열한 명분 싸움이었다. 논쟁 와중에 비구·대처 양측으로부터 종정으로 추대된 만암은 '환부역조換父易祖'를 이유로 대처 측의 입장을 지지하게 되고, 비구 측은 이에 11월 3일 종회를 열어 종정에 동산, 부종정에 금오를 추대하여 체제를 개편하고 대처 측에 가담한 인사들을 제명했다. 

비구 대처승 분규와 권력개입

 

이 무렵 양측의 대화가 결렬되면서 분규가 폭발하도록 부채질한 것은 11월4 일 이승만의 제 2차 유시였다. 그 주된 요지는 전국의 승려가 일본식 정신과 습관을 버리고 대한 불교의 빛나는 전통을 살리라는 것으로서, 역시 대처승을 부정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비구 측이 총무원에 가서 사무인계를 받기 위해 11월 5일 조계사로 진입함으로써 양측의 분쟁이 촉발되었고, 마침내 17일에는 폭력사태로 발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11월 19일 이승만이 제 3차 담화를 발표함 으로써 비구 측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국면이 형성되었다. 12월 11일 비구측은 전국비구·비구니대회를 개최하여 정화를 주장했고, 이어 이승만은  12월 17일 다시 한 번 비구 측의 입장을 지지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문교부가 사태의 수습을 책임지라는 것으로서 제 4차 담화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문교부 와 내무부를 중심으로 정부당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정부개입 이후 양측은 한편으로 대립하면서 다른 한편 타협점을 모색해나갔다. 1955년 1월 26일 문교부에서 모임을 갖고 양측이 5명씩 선정하여 '불교정화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대책위는 일단 "사찰을 수호할 자격이 있는 자"에 대한 규정을 합의했으나, 이것이 주지직을 말하는지 승려 전체를 규정하는 것인지 구분이 모호했던 데다, 전국 사찰의 관리권을 비구승이 장악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대처 측은 이 타협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정부당국의 묵시적 지지로 인해 상황은 비구 측에 더 유리하게 돌아갔다. 대처 측이 조계사에서 단식농성 중이던 비구승을 폭행하는 사태가 일어남으로써 대처 측은 더욱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런 불교계의 분규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마침내 이 문제는 국회 차원으로 비화되었다. 6월 13일 국회 본회의에서 문종두文鍾斗 의원은 사실상 교화와 포교에 종사하는 대처승을 승려로 인정하지 않고 좌선승인 비구승만을 승려로 취급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하면서, 정부당국이 헌법에 규정된 종교의 자유를 무시하면서 주지까지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행정조치를 취한 것은 위법이라고 제기했다. 이어 범야권, 무소속 민의원  51명이 불교사태 문제를 긴급동의로 제청했다. 문교 및 내무부장관을 출석시킨 가운데,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음에 도 정부가 개입하는 근거가 무엇인지가 주된 쟁점이 되었다. 나아가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당국은 종교 문제에 간섭하지 말고, 분규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형사상의 문제와 재산상의 손실에 대해서만 법적으로 조치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국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6월  16일 "대처승은 물러나라"는 요지의 5차 담화를 발표했고, 이후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불교정화수습대책위 원회에서 분규를 정리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대책위의 회합은 여러 차례 논란을 거듭했는데, 비구 측은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종회 의원을 선출하자고 주장한 반면, 대처 측은 현 총무원체제를 인정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의견이 대립되었다. 

 

결국 투표를 통해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종회 의원을 선출하자는 쪽으로 결정이 났지만, 대처 측에서 다시 투표의 합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문교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구 측은 8월 2일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전국 사찰의 주지 선출, 종헌, 수정, 중앙간부 선출, 종단운영상의 인사관계 등 개 4항목을 결의했다. 이후 문교부는 양측의 타협을 조정했고, 결국 8월 11일 승려대회를 합법으로 인정하게 됨으로써 불교분규의 초기국면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비구 측이 사찰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대처승과 많은 갈등을 야기했으며, 승려대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대처 측의 소송이 제기되어 분규는 법적 분쟁으로 전환되었고, 1960년대 이후에도 해결되지 못한 채 계속되었다. 

 

이승만과 비구정화운동의 한계

 

이상 1950년대 비구·대처승 간의 불교분쟁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여기서 본 바와 같이 당시의 분쟁은 불교교단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언제라도 폭발할 가능성을 안고 있었지만, 분규가 촉발되고 전개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이승만의 유시와 정부당국의 개입이었다. 이렇듯 이승만이 여덟 차례의 유시를 통해 이른바 불교정화를 촉구한 의도와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무엇보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이승만이 처음으로 불교 문제에 대한 담화를 발표한 1954년 5월 21일은 제 3대 민의원 총선거가 실시된 다음 날이었다. 3대 총선에서 이승만은 정권의 무제한적 개입을 통해 이전까지 정국운영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국회를 장악하고 1인 1당독재를 구축하려 했다. 이어 2, 3차 담화는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안에 대한 찬반양론이 벌어지던 시기에 발표되었다. 마찬가지로 4차 담화 는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 이후 발표되었고, 1955년 단일 야당으로서 민주당이 출범할 즈음에는  5차 담화를 내놓았다. 

 

이처럼 불교분규에 대한 이승만의 담화는 1954년 이후 1955년까지 정치적 쟁점이 첨예화되거나 1인독재를 강화하기 위한 정권적 차원의 개입이 진행될 때마다 발표되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불교분규에 대한 담화 발표를 통해 어떤 정치적 효과를 기대했을까? 담화문에 시종일관 왜색 대처승을 몰아내라는 식의 선동적 구호를 사용한 데서 드러나듯이, 일반국민의 반일감정 을 이용하여 반일이데올로기를 선동·확산함으로써 반이승만세력을 배척하고 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80년 신군부세력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정화운동의 명목으로  10·27법난을 자행한 것처럼, 이승만은 불교분규를 정치적 국면전환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정치적 고비마다 무려 여덟 차례나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상황에 밝지 못하고 구체적인 방법론조차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비구 측의 정화운동은 결국 종교의 자율성을 포기한 채 외부권력에 의존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므로 1950년대 이후 종권을 둘러싼 각종 소송, 공권력개입 등의 전례는 불교계가 국가권력에 예속되는 문제점을 야기했다. 더구나 비구 측이 분쟁 와중에 세력확산을 위해 무자격 승려를 마구잡이로 양산함으로써 승려의 질적 저하가 초래되었으며, 대화와 타협보다 폭력적 상황을 되풀이함으로써 종권분쟁, 이권분쟁양상이 반복되는 문제점과 후유증 을 낳았다. 또한 해방 이후 해결되지 못한 적산재산 및 농지개혁 이후 사원의 재정적 문제라든가 각종 학교재단, 일반기업체에 대한 귀속권 처리 등도 매끄럽 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종래 불교분규에 대해서는 비구·대처 양측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정화운동이 나 법난의 차원으로 이해되었으나, 교단사적인 시각을 탈피하여 근현대 한국 불교사의 흐름 속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불교분규의 전개 과정이나 지난 세기 봉건적 잔재와 식민지 유산을 주체적으로 청산하지 못한 과제는 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자화상이 아닌가 한다.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