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e original : 한양가

한양가는 19세기 전반 서울의 문물제도와 풍속을 읊은 국문 가사로, 1840년 한산거사가 지은 것이다. 지은이 한산거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949년 한양가를 최초로 교주한 송신용은 한양가의 내용중 야정서에 대한 찬양이 훨씬 상세하고 두드러진다는 점을 토대로  조대풍요, 풍요경전, 풍요삼전에 든 인사 중의 한 사람이나 또는 그의 후예로 추측하고 있다.

한양가의 판본은 현재 다양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歲在甲辰李春(1840년 3월) 한양거사가 지은 한양가에 신증동요와 고종 10년(1874) 순종의 탄생을 경축하여 지은 갑술경가를 덧붙여 1880년 석동신간으로 간행된 활자본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고, 필사본도 여러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필사본으로는 아악부가집엔 한양풍물가로 실려 있으며, 가람 이병기 소장본인 거노불화가에는 한양태평가로 실려 있다. 규장각 소장본도 필사본으로 제목이 한양가로 되어 있다.

한양가는 각 판본에 따라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1880년 간행된 활자본의 콰장 묘사는 문과 장면만 나타나 있지만, 규장각 필사본에는 문과 외에 47행에 이르는 무과 장면이 추가되어 있다. 특히 추가된 부분중에 "신군위의 정병들은 ..... 조선국기를 높이 달고"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친군위의 군사훈련 때 국기가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한양가의 내용은 크게 13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한양의 지세와 도색으로서의 형국을 노래한 부분, (2) 한양의 궁전과 누각, 보탑을 묘사한 부분, (3) 궁궐의 내시와 무예별감, 내인들이 왕을 시위하는 모습, (4) 승정원과 의정부의 모습, (5) 육조 관아의 모습, (6) 조마거동과 여러 관서의 모습 (7) 선혜청과 여러 관서의 모습, (8) 한양 도성의 각 성문과 시장의 모습, (9) 각종 놀이와 그 놀이가 주로 행해졌던 명승지의 모습 (10) 각종 복식과 기생점고, 가무 모습, (11) 왕의 수원 능행 광격 (12) 문, 무과 시험 광격과 함께, 마지막으로 (13) 한양이 도읍으로서 천하 제일이며, 앞으로 영원할 것이라는 내용의 한양 예찬으로 노래를 끝맺고 있다.

이러한 여러 부분 중에서 가장 압권은 시장 풍경을 묘사한 부분이다. "팔로를 통하였고, 연경일본 다 아는구나 우리나라 소산들도 부끄럽지 안컨마는 타국물산 교합하니 백객전 장할시고"로 부터 시작되는 시전에 대한 묘사는 다른 어떤 자료보다도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한 서울 시장의 풍경을 전달하고 있다. 육의전 중에 제일 우두머리였던 선전에서 판매되는 비단만도 30여 종류가 나열고 있고, 이외에 어물전, 백목전, 지전, 청포전, 포전에서 판매되는 각종 어물과 생선, 무명, 종이, 중국산 모자, 삼베의 종류 등이 모두 나열되고 있다. 또한 종로의 시전만이 아니라 남대문 밖 대표적인 난전거리였던 칠패시장에서 판매되는 생선과 과일류, 그리고 길거리에 노점 형태로 저자를 벌였던 도자전에서 판매되는 수많은 부녀자들의 노리개 종류, 서울 시내 12곳에 설치되어 잡화를 판매했던 목전의 모습 등도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한양가에서 그려진 시장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서울에 대한 방물지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 한양가를 통해 우리는 서울이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왕궁과 주요 관서가 위치한 정치, 행정 중심지로서의 위엄과 품격을 갖췄을 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이 활기차게 삶을 꾸려 갔던 매우 번성한 상업되시였음을 실감할 수 있다.

흔히 서울 600년을 이해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1394년 조선 왕조의 서울로 정해진 이래 거의 변화없이 서울의 도시구조가 유지되었고, 이와 같은 중세적 도시 형태가 일제 침략에 의해 근대적인 도시로 변화되었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시기 우리 역사가 그와 같은 정체적인 모습을 갖지 않았듯이 서울이라는 도시도 600년 동안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서울은 정도 이래 조선사회의 변화 발전을 가장 잘 반영하는 도시였다. 한양가에서 표현된 서울의 풍속과 문물제도는 바로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룩해 낸 변화 발전의 정수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시장 풍경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들도 서울의 고유한 문화와 풍속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는 다른 기록류에서 결코 찾아보기 어렵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이 한양가를 "유성앙서에 못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신 및 문화적 혈통을 우리에게 명백히 보이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한양가는 19세기 서울의 생생한 모습을 글로 풀어 쓴 풍경화로서, 그 문학적 성취만이 아니라 민속사나 생활사, 상업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문헌이다.

한양가는 송갑용씨가 1880년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것을 저본으로 하여, 동상전에 종사했던 상인 조선시대 관직을 역임했던 사람, 목순 행상 그리고 실제 한양가에서 표현되는 서울 거리에 대한 실지 답사 등을 통해 그 내용을 자세히 교주하여 1949년 정음문고로 편찬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1974년에 박성의씨가 송신용의 교주본을 저본으로 하여 순한글고어체 문장을 현재 우리가 쓰는 글투로 바꿔 민중서관에서 출판하였다. 지금 규장각에서 병풍으로 제작하여 전시한 한양가는 바로 박성의씨가 교주한 것을 바탕으로 삼아 제작한 것이다. 이번 영인본은 위 규장각전시용 병풍과 규장각 소장 한양가 두 종류를 실었다.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