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e original : 1-1. 내재적 발전론과 한국사인식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내재적 발전론"이란 무엇인가. 내재적 발전론을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사회발전의 계기가 사회 내부에 있다는 주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다른 한편 사회 외부의 영향은 없는 것인가, 국가나 민족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다른 국가나 민족과의 무력대결이나 문화교류로부 터 사회발전의 계기를 얻을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낳기도 한다. 또 더 근본적으로 역사가 발전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다. 물론 이 글은 이런 의문들에 대한 철학적인 해답을 구하지는 않는다. 

 

1960년대 이래 내재적 발전론이 한국 역사를 해석하는 하나의 시각으로 정립된 과정을 이해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한국 역사연구방법에서, 한국 사학사 전개 과정에서, 그리고 세계사의 발전과 동아시아사회의 전개 과정에서 내재적 발전론이 차지하는 의미를 포착해보고자 한다.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역사인식은 맑스주의의 유물사관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회 내부의 생산력 발전을 계기로 생산관계의 변화가 초래되고, 그것이 사회계급의 분화로 나타나 새로운 사회계급이 계급투쟁을 통해 새로운 사회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한 사회가 다음 사회로 이행해간다고 보는 맑스의 역사발전원리는 사회 내부에서 발전의 계기를 찾는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내재적 발전론이다.

 

유물사관은 역사 전체의 합법칙적 발전원리를 체계화하지만 분석의 주대상은 근대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과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이고,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극복함으로써 사회주의사회로의 혁명적 이행을 전망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맑스주의의 유물사관이 보여주는 내재적 발전론이 역사발전의 합법칙적 전개, 근대사회로의 이행 법칙,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전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유물사관의 내재적 발전론은 유럽사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점을 또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는 아시아사회의 생산양식과 그 전개에 대해서는 유럽사회와 다르게 인식하고 있었다. 아시아는 유럽과 다른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지닌 독특한 사회로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생산력이 정체된 독특한 아시아적 공동체사회가 이어졌다고 보았다. 그는 아시아사회에 대해서는 내재 적 발전론이 아니라 오히려 정체론에 입각해서 이해했다. 유물사관의 내재적 발전론은 아시아사회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근대국가 수립 과정에서 제국주의로 발돋움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 은 수천 년의 정체된 체제를 유지하여 자주적 근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식민지의 길을 통해 근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아시아인 식이었다 한국에서는 그런 논리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후진 일본이 제국주의국 가로서 한국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한국의 후진성과 정체성이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후진성과 정체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역사인식이 바로 식민주의사관이다. 

 

식민주의사관은 허구에 기초한 허황된 논리도 포함하지만 저명한 역사학자에 의한 구체적 역사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하기도 하여 한마디로 요약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복잡하고 때로 상반되기도 하는 여러 주장들을 끌어모아 정의해본다면, 식민주의사관은 대체로 한국사를 타율성과 정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역사로 규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타율성이란 한국인이 한국 역사의 주인공, 역사발전의 주체로 등장하지 못하고, 역사의 전개도 인접한 외세의 영향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역사인식을 말한다. 일본과 한국의 조상이 동일하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지정학적으로 반도에 위치하여 대륙과 해양의 지배를 피하지 못한다는 반도적 성격론, 고대 한반도 남부에 일본의 식민통치기관이 있었다는 임나일본부설 任 那日本府說, 한국사를 만주 역사에 포함시켜서 보려는 만선사관滿鮮史觀 등, 한국사의 열등함을 강조하는 여러 내용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정체성이란 한국 역사가 주체적으로 발전을 추진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사회 내부적으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는 등 발전의 길을 찾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수천 년 동안 정체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역사인식을 말한다. 사회적 계급이 분화되지 못하고, 도시와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사유재산제 가 성립되지 못한 정체된 사회, 봉건제 이전의 씨족적 사회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고 한다 또 조선시대에 대해서도 년 동안 기술의 발전이나 자본의 축적이 전혀 없이 동일한 생활이 반복되는 정체된 사회였다고 한다.

 

식민주의사관의 타율론, 정체론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을 강조하고, 식민지를 통해 비로소 근대적 발전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고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닌다. 이런 식민주의사관은 내재적 발전론과 정반대되는 역사인식이다.

식민주의사관에서 주장하는 타율론이나 정체론은 한국사를 조금만 들여다봐 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역사학자들은 일본인 역사학자 와 논객들이 만들어낸 식민주의사관에 동의하지 않았다. 한국 민족은 수천 년 동안 독자적 문화를 창조해낸 우수한 민족이라 주장하고, 그 자취를 들추어내 대중에게 알리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한 우수한 민족으로 서 스스로의 역량을 동원하여 역사를 발전시켜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 주장은 독립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되기도 하고, 그 자체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신채호, 정인보 등 우리가 민족주의 역사학자로 부르는 인물들이 이런 주장에 앞장섰다. 이들의 주장은 주로 식민주의사관의 타율론을 비판하는 데 집중되었다. 다만 타율론을 비판하고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독립국 가를 추구하지만, 그것이 어떤 사회여야 하는지에 대한 전망은 불투명했다.

 

식민주의사관의 정체론 비판은 1930년대 맑스주의 역사학자 백남운에 의해 제기되었다. 맑스주의 유물사관이 기본적으로 내재적 발전론이면서 아시아사 회를 정체된 사회로 규정한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지만, 백남운은 유물사관의 내재적 발전론을 한국사에 적용함으로써 맑스의 아시아사회정체론을 비판했는 데 그것은 곧 식민주의사관의 정체론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조선 경제사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파악했다.

 

조선 경제사는 조선 민족의 사회적 존재를 규정하는 각 시대에 있어서 경제조직의 내면적 관련, 내재적 모순의 발전 및 거기서 일어나는 생산관계의 계기적 교대의 법칙성과 불가피성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는 것이다. (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 개조사, 1933, 10-11쪽)

 

여기에는 맑스주의 유물사관을 내용으로 하는 백남운의 내재적 발전론의 요점이 담겨 있다. 그런데 백남운은 고대 노예제사회와 중세 아시아적 봉건사회 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지만, 근대사회로의 이행이나 식민지사회와 그 이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구를 제시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의 발생가 능성, 식민지 이식자본주의의 발달을 언급하는 정도였으며, 맑스가 분석의 주대상으로 삼은 근대 이후의 사회변화 연구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상에서 식민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은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거나 경제발전의 내재적 법칙성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 사학이 타율론을 비판하여 민족문화의 역량과 우수성을 강조한 것을 내재적 발전론이라고 명백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맑스주의 사학이 정체론 을 비판한 것은 내재적 발전론의 개념에 근접하는 것이었다. 

남북이 분단된 뒤 내재적 발전론을 둘러싼 논의는 남,북한 학계와 일본 학계로 분화되어 전개되었다. 북한 학계는 초기에는 유물사관을 수용하여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연구와 논의를 진행했다. 백남운의 연구에 기반한 삼국시대 사회구성 논쟁이나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 연구가 그것이다. 

 

삼국시대 사회구성 논쟁은 백남운이 유물사관의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삼국시대를 그리스, 로마시대의 고대 노예제사회에 비정한 것에 대한 논쟁이다. 백남운의 견해는 맑스의 아시아사회 정체론에 기반한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의 입장에서 해석한 견해와 충돌을 빚었고, 기타 여러 가지 절충적 견해와 구체적 연구들이 진전됨에 따라 논쟁은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결과적으로 노예제사회 는 삼국시대 이전에 형성되지만 그리스, 로마시대의 노예제와는 다른 아시아적 성격이 가미된 것이고, 삼국시대 이후에는 봉건제사회가 형성된 것으로 절충, 정리되었다. 역사발전의 지역적 특수현상이 더 적극적으로 해석되면서도 내재 적 역사발전의 의미도 분명하게 부각되었다.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은 중국 자본주의 맹아론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일찍이 백남운이 자본주의 맹아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점도 중시되어 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맹아가 발생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발전했다는 주장은 1950-60년대 북한 학계의 중요한 학문적 성과로 평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재적 발전론의 시각에서 얻은 중요한 성과였다. 

 

봉건제사회 이후 사회주의사회가 바로 등장하는 것은 유물사관의 내재적 발전론의 원리에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사태이기 때문에, 북한 사회주의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자본주의사회의 설정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조선 후기사회에 자본주의 맹아가 발생했지만 일제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이식자본주의사회가 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백남운의 관점이 수용된 결과라고 여겨진다. 

 

개화파의 갑신정변이나 갑오개혁이 내재적 발전과 일견 모순될 수 있는외세의 힘에 의지하여, 즉 일본의 무력과 자금 개혁모델에 의지하여, 진행되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이를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르주아적 정치변혁으로 적극 평가한 것도 이와 관련된 해석이다.

 

1970년대 이후 주체사관 수립에 의해 유물사관의 역사평가기준이 사회구성 체론에서 계급투쟁론으로 더욱 기울어 내재적 발전의 동력을 계급투쟁에서 찾고, 특히 근현대사에서는 그 중점을 외세와의 투쟁에서 찾고 있음에도, 북한 학계의 역사상이 내재적 발전론의 방향에서 구축되어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북한은 사회주의사회 건설 과정에 있었기에 내재적 발전론 수용의 의미는 과거 역사와 현대사의 합법칙적 발전의 연결고리를 확인하는 데 있었다. 특히 근현대사에서는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에서 시작하여 근대 부르주아 민족운 동이 전개되는 단계를 거쳐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쟁취한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을 내재적 발전의 논리 위에서 인식하고 있다. 

남한 학계에서는 1960-70년대에 식민주의사관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내재적 발전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식민주의사관을 비판하는 입장은 주로 타율론을 비판하는 계열과 정체론을 비판하는 계열로 구분해서 볼 수 있는데, 전자는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의 관점을 계승하여 민족문화의 역량과 고유성, 우수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후자는 사회경제적 발전을 내적 계기를 중심으로 포착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양자의 성과를 종합하면 선사시대에서 구석기, 신석기시대의 설정, 고대사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 고려사회 성격 논쟁, 당파성론 비판과 새로운 정치사의 발전방향 제시, 실학의 발생과 성장, 사회신분제의 변동과 붕괴, 자본주의 맹아의 발생 근대 부르주아 민족운동 의 전개, 시대구분론의 제기 등을 들 수 있다.f

 

그 가운데 타율론 비판은 주체역량에 의한 한국사의 내적 전개와 그 체계화, 정체론 비판은 한국사에서의 보편적 역사발전원리의 관철을 주요목표로 한 것이었다. 식민주의사관의 타율론, 정체론 비판을 주체성, 발전성의 측면에서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타율론 비판은 내적 역량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수행되었 기 때문에 내재적 발전론의 한 측면을 제시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 로는 정체론 비판의 결과가 내재적 발전론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조선 후기 사회신분제의 변동과 붕괴, 자본주의 맹아의 발생, 근대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전개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조선 후기사회를 대상으로 한 이런 내재적 발전론은 좁은 시각에서 본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재적 발전론 개념의 외연이 확대되면서 민족문화의 주체역량을 강조하는 연구까지 포괄하게 되어, 때로는 식민주의사 관의 대안으로서 내재적 발전론을 거론하게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넓은 시각에 서 본 내재적 발전론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연구경향이 당시 내재적 발전론으로 명명되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식민주의사관을 비판하는 방향이 내재적 발전의 방향이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본 학계의 연구방향과 관련하여 년대 이후 내재적 발전론으로 명명되었다. 

 

그런데 남한 학계에서는 내재적 발전론의 흐름에 다기한 분화양상이 나타났다. 기본적으로 식민주의사관 비판은 공통점이었지만, 당시 사회에 대한 인식, 남한사회의 발전방향에 대해서는 관점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화양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정체론을 비판하여 식민주의사관을 극복하고, 나아가 미래의 역사상까 지 전망하고자 하는 내재적 발전론의 기본방향에 대한 것이다. 정체론에 대한 비판은 1950년대 미국 원조 경제체제하에서 경제수준이 낮았던 시기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민족적 주체적 분위기 속에서 정체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개시되었다. 주로 조선 후기 사회경제의 변화와 변동 속에서 발전양상을 찾아가는 연구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근대를 향한, 근대를 준비하는 요소, 현상, 세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자본주의 맹아 론을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이나 북한에서도 연구와 토론을 진행한 결과 맑스의 아시아사회 정체론을 교정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한 바가 있었다. 남한은 중국, 북한과 학술교류를 단절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 로 그런 방향과 보조를 같이했다.

 

그러나  1960-70년대 엄혹한 냉전체제하에서 내재적 발전론은 조선 후기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기껏해야 세기 말까지 이를 뿐이었다. 이런 역사인식이 전망하는 미래상을 명확하게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근대화, 자본주의화의 전망에 그칠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 식민지 극복의 방향이나 새로운 국가건설의 방향까지 구체적인 연구가 미칠 수는 없었다. 이 점이 당시 내재적 발전론이 지닌 한계였고, 여기서 내재적 발전론이 근대주의로 경도될 위험성을 발견하게 된다.

 

1970-80년대에 제기되는 분단시대 사학론이나 민중사학론은 그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변혁의 당위성에 기반한 역사인식이었다. 그것은 내재적 발전론 이 지향하는 미래의 역사상이 구체성을 갖기 어려운 현실적 조건 아래서 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했다. 따라서 사학사의 흐름에서 볼 때 1990년대 이후 이들 역사인식이 종합되어 내재적 발전의 미래상이 제시될 것으로 기대해볼 수도 있었지만, 그런 미래상이 정립되기도 전에 년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해 사회주의적 전망을 포함한 변혁적 전망에 대한 논의는 침체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내재적 발전론이 근대주의적 경향을 보이게 된 문제이다. 냉전체제 아래서 미국은 신생국의 사회주의화를 막기 위하여 근대화론을 내세웠다. 이를 이론적 기반으로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 개년계획이 추진되었고, 여기 부응하는 역사인식이 내재적 발전론을 근대주의적으로 인식하게 했다. 근대화는 원래 서구 중세사회가 해체되고 근대사회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사회적 변혁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자주적, 내재적 과정이었다. 그런데 그 근대화가 후진국에 와서는 경제발전단계론이 되고, 식민지에서는 파시즘 = 근대화론이 되고, 냉전체제하에서는 종속적 근대화론이 되고 말았다. 근대화론이 근대를 찬미하고 전통을 배제하는 입장에 서면서도 내재적 발전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서구의 내재적 근대화를 모형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식민지를 근대화의 길로 인식하고 종속적 상황에서 고도성장을 꾀하는 역사인식은 오히려 내재적 발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부 힘에 의한 발전을 근대화의 길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근대화론이 내재적 발전론보다 오히려 정체론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

 

근대화론의 경향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체제로 연결되어 있고, 최근 내재적 발전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가는 역사인식은 이런 상황에서 보면 일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근대화론이 내재적 발전을 긍정했던 것은 다만 근대화, 자본주의화를 역사발전의 귀결점으로 보는 관점에서였으며 그런 측면에서 조선 후기의 근대적 요소나 자본주의적 요소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뿐이다. 내재적 발전론의 측면에서라기보다 사회주의체제와의 체제경쟁에서 비롯된 역사관인 것이다.

 

근대화는 식민지와 자유주의, 신자유주의체제에 의해 달성되었고, 그 이후의 발전도 그런 흐름 위에 놓여 있다고 파악되고 있다. 오늘날의 근대화론, 즉 근대주의 역사인식은 전통과 근대를 구분지어 전통사회의 내재적 발전을 부정하고, 일제강점기 이후에야 근대화, 자본주의화와 그 발전이 가능했다고 봄으로써 내재적 발전론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식민지를 가졌던 선진국의 최근 학문적 경향은 기본적으로 이런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남한 학계의 내재적 발전론은 이와 같이 두 가지 흐름을 내포하고 있었다. 근대 이후의 변혁적 전망에 이르지 못하고 근대에서 멈추어버린 내재적 발전론 과 근대적 환상에 빠져 결국 전통과 단절됨으로써 내재적 발전론의 의미를 상실한 것, 이 두 가지이다.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평가도 이 두 가지 흐름을 구별하여 각각에 대해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그 논의가 혼동되고 있는 경향이 없지 않다. 

한편 일본 학계의 경우 제국주의시대에는 제국주의사관을 가진 계열과 맑스 주의 사학 계열로 구분할 수 있었는데, 제국주의사관은 일본 황국사관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이들의 시각에서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한국사상韓國史像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 맑스주의 사학 계열은 맑스의 이중적 역사관,  즉 보편적 내재적 발전론으로서의 유럽사관과 정체론을 특징으로 하는 아시아사관에 의해 구별될 수 있는데, 한국 역사에 대해서는 아시아적 정체론에 입론을 두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제국주의시대 일본 학계의 한국사인식은 좌우를 막론하고 정체론적 시각에 입각해 있었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뒤 일본 학계는 제국주의시대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모색했던 좌파 계열과 여전히 제국주의적 시각을 버리지 않고 계승했던 계열로 구별될 수 있다. 한국 역사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인식의 분화가 나타났다. 제국주의적 시각을 지닌 계열은 여전히 제국주의사관 혹은 식민주의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파악하고 있다. 

 

식민지체제의 후유증과 세계적 냉전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한민족이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 일본은 한국 역사의 타율론과 정체론의 특징을 더 분명하게 규정하고 정리했다 (四方博, "구래의 조선사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하여", "조선학보" 1, 2, 3, 1951-52). 반면 제국주의의 침략행위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모색하는 계열에서는 한국사 또는 조선사를 그 민족의 주체적 입장에서 내재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시각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이다.

 

기실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용어는 일본에서의 이런 연구경향을 1980년대에 들어와 개념규정한 것이었다. 물론 그 내용은 이미 논의해온 바와 같이, 일제강점 기부터 남북한 일본 학계에서 전개되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에서의 내재적 발전론 논의는 좌파 계열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미국의 아시아지배와 미국주도로 이루어진 일본, 한국과의 안보조약 체결을 통한 사회주의권 봉쇄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들의 내재적 발전론 은 역사학에서나 현실에서 사회주의적 전망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이론적 기원을 맑스주의 유물사관의 내재적 발전론에서 찾으며,  그것을 한국역사에 적용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사회주의사회로의 전환을 전망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한국 역사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아시아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일본 좌파의 역사인식이었다. 따라서 중공, 북한, 북베트남혁명 과정과 민족해방투쟁의 전진을 선망하면서 미, 일 안전보장체제 아래 놓인 일본 사회체제를 역사발전의 후진성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재적 발전론은 역사발전의 최종적 귀결을 사회주의로 상정 하고 그 합법칙적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었고, 조선 후기사회의 신분제 붕괴론이나 자본주의 맹아론, 개항기의 부르주아 혁명운동론, 식민지 민족해방운동론, 해방공간의 변혁운동과 한국전쟁은 그 일관된 논리 아래서 파악되었다. 사회주 의 건설을 추진하는 북한의 존재는 남한 사회변혁의 추동력이 되었으며, 일본 사회주의혁명의 선구로 비쳐졌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남한을 비롯하여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고도경제성장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경제적 성과였다. 더구나 이 네 지역이 공통적으로 일본의 식민통치를 경험했다는 점은 내재적 발전의 방향과 내용을 재검토하게 했다. 내재적 발전의 귀결이 사회주의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결국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이를 증명한 것처럼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식민지적 근대화의 길이 새삼 재론되고, 종속적 자본주 의화의 가능성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쇄도했다. 따라서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도 강화되었다. 한편으로는 내재적 발전론의 사회주의적 전망이 한계에 봉착했으므로 내재적 발전론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재적 발전론이 오히려 식민지적 종속적 자본주의화의 길을 긍정하는 근대주의적 논리로 기능하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렇게 상반된 비판이 제기된 것은 남한 학계에서 전개된 내재적 발전론의 두 가지 흐름을 일본 학계가 명확하게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한 학계의 내재적 발전론은 곡해되면서 그 파기를 종용받았다. 사회주의권이 무너졌으니 사회주의적 전망을 가진 내재적 발전론을 포기하라고 하고, 식민지적 종속적 자본주의화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가진 내재적 발전론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어쨌든 일본 좌파의 붕괴로 일본 학계는 한국 역사의 내재적 발전론을 폐기하는 방향을 취하게 되었고,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내재적 발전론은 역사발전을 긍정하고 발전의 계기를 내적 측면에서 추구함 으로써 일국사적一國史的 역사발전의 의미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제국주의침략에 의해 식민지가 된 나라의 역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한국 역사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이다.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관점에서 한국 역사의 전개 과정을 발전적으로 인식함으 로써 민족적 자부심을 키울 수 있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밝아질 수 있다.

 

내재적 발전론이 지니는 전망은 근대적 전망과 근대 이후에 대한 전망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이 과거 역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극복함으로써 민족해방을 전망하는 데 머물렀다. 해방 이후 북한은 자기 사회를 사회주의 건설 과정으로 파악함으로써 내재적 발전론 이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설정과 그 성격규명에 치중하게 되었고, 따라서 내재적 발전론의 과제는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의 발생, 발전을 확인하는 것, 근대 부르주아 혁명운동의 존재와 양상을 파악하는 것, 민족해방운동의 혁명적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과거 역사와 현대사의 합법칙적 발전의 연결고리를 확인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고 하겠다.

 

반면 남한 학계의 경우, 하나의 조류는 근대적 전망을 거쳐 근대 이후의 변혁적 전망을 포함했지만 냉전 및 독재체제하에서는 근대적 전망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적 종속적 근대화, 자본주의화의 길을 긍정함으로써 오히려 전통과의 단절을 초래하여 내재적 발전론의 의미를 상실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더구나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변혁적 전망에 대한 기대를 반감시켰고 다양한 방향으로의 사회발전을 모색하 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여전히 제국주의사관에 입각하여 한국 역사를 파악하는 시각의 한편에서 사회주의적 전망을 가지고 한국 역사를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발전과 사회주의권 붕괴에 영향을 받아 식민지적 종속적 근대화 자본주의화를 수용하는 경향이 우세해졌다. 

 

내재적 발전론은 역사발전의 내적 계기를 강조함으로써 외적 충격과 영향, 그리고 문화교류를 소홀하게 취급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과도한 자기환상에 빠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자기 한계는 변혁적 전망의 좌절이라는 조건 아래서 외적 영향을 강조하는 최근의 경향에 의해 여지없이 돌파되고 있다.

 

그러나 내재적 발전론이 왜곡된 식민주의사관을 비판한 점, 미래사회에 대한 변혁적 전망을 제시한 점, 역사발전에서 그 지역 주민의 주체성과 책임감을 강조한 점 등은 큰 성과로 이해된다. 내재적 발전론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그 긍정적인 면을 수용한다면 내재적 발전론은 여전히 연구방법상 중요한 의의를 지닐 것이다. 더구나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에서, 아직도 그 식민지가 남긴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