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de traduction : 10. 개화사상과 근대국가 건설론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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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봉건적 사회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제국주의 열강에 문호를 개방했다 서구열강을 비롯 청국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책동을 강화했다. 국권의 위기가 심화된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여러 계급의 개혁운동 이 전개되었다 초기에는 일본을 매개로 한 서구문명 수용 여부를 놓고 견해가 대립되었지만  1880년대 후반 이후 조선왕조국가를 근대국가로 개편하는 문제 즉 대내외적 국가주권의 확정 여부를 초점으로 논전이 전개되었다. 

1860-70년대 서구문명 수용 논쟁 : 척사론과 개국론

 

서구문명 수용을 둘러싼 대립은 1860년대 대원군 정권 시기 쇄국정책을 둘러싼 논의에서 시작되었다 척사론斥邪論은 정권 내에서만이 아니라 재야 노론老論 유생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기정진奇正鎭은 서양과의 교류뿐 아니라 양물洋物 자체를 철저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이항로李恒老는 주전설主戰說을 내세워 양적洋賊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논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서양이 중화中華나 소화小華 (조선)를 침범하는 것은 사邪가 정正을 이기고 신臣이 군君을 능멸하고 땅이 하늘에 항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화서집 권10   ‘존중화 하’) 그는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에 의거했기 때문에 여전히 중국 중심으로 계서적으로 편성되는 차별적 국제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논리는 김평묵金平默 에게 이어져 존화양이尊華攘夷 의 논리로 나아갔다. 척사론은 단지 주자 성리학 이라는 학적 도덕적 입장에서만 주장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서양과의 교류에 따른 경제침탈을 크게 우려했다. 이항로의 주장처럼 유한한 농산품과 서양 공산품의 교역이라는 불평등한 무역관계는 국내 생산기반의 몰락과 농민층의 분화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척사위정론斥邪爲政論은 대원군 정권 의 척화론斥和論과는 또 다른 보수적 내수외양책이었다. 

 

한편 문호개방을 적극 고려하면서 국가 자강책을 강구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박규수朴珪壽는 1870년대에 자주적 개국통상론을 주장했다.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 등은 당시 청의 양무사상가인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등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해방론海防論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양과의 수교를 주장했다. 이후  개항통상론은 1876년 당시 일본 운요호雲揚號 사건 처리를 둘러싸고 문호개방 논쟁이 일어났을 때 채택가능한 방안으로 부각되었다. 물론 이때도 개항 반대론이 제기되었다. 최익현崔益鉉은 일본은 원래 양적의 앞잡이이고 서양과 같다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민씨 척족정부는 전격적으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한 뒤 1880년 6월 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조선책략朝鮮策略과 이언易言을 받아들였다. 이어 정부는 청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근대화정책을 조사했고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은 일본의 근대화 실상을 담은 공식보고 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분위기가 크게 바뀌는 가운데 조선왕조국가의 개방책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다.   년  월 척사운동은 조선책략에 나타난 외교정책을 비판했다 척사론은 미국 청국 일본 등 주변 국가와의 교섭확대와 동맹을 주장하는 논리에 반대하면서 러시아 미국 일본이 모두 같은 오랑캐라는 입장을 재확인하 고 유입된 서양 상품과 서적을 소각하고 신설된 정부기관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 衙門을 혁파하라고 했다. 반면 개화를 주장하는 상소도 있었다. 곽기락郭基洛 윤선 학 같은 논자들은 삼강오륜이 천부의 변함없는 이치로서 도道이며 선박 농기계 와 같이 편민이국便民利國을 위한 것은 기器라고 규정했다. 이른바 도기분리道器分 離 와 서기수용西器受容 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문호개방 찬성론자들은 기본적 으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의 입장을 취했으므로 서양 정치제도의 수용으로까 지 나아가지는 못했고 서양 선진기술을 수용하는 데 머물렀다. 

1880년대 국제적 지위 논쟁 : 독립론과 속방론

 

1880년대 초 조선 정부는 청국의 후원 아래 외국세력을 끌어들여 세력균형 속에서 독립을 지키려 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서구 여러 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은 조선을 자국의 속방屬邦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종주권宗主權을 요구했다. 조선 은 구미열강과 형식적으로는 평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도 청의 정치적 간섭을 감수하고 경제이권을 침탈당하는 양절체제兩截體制를 강요받고 있었다. 당시 국제질서의 준거 틀로 소개된 것은 만국공법萬國公法이었다. 만국공법 은 단순히 조약과 통상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특히 조선왕조국가의 국제적 지위뿐만 아니라 내정에서의 권한도 종래와 다르게 규정됨을 의미했다 당시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는 이전의 개항통상론이나 서기수용론의 차원을 넘어 청으로부터의 독립과 서구적 근대개혁을 추진했다 그것이  1884년 갑신정변이었다. 

 

당시 현안은 조선왕조국가가 청의 속방인가 혹은 증공국贈貢國으로서 독립국 가인가 여부였다 원세개袁世凱는 1886년 조선대국론朝鮮大局論에서 조선을 부용지국附庸之國으로 간주했다. 이는 속방 속번屬藩 번복藩服 등의 용어와 상통하는데 조선이 비록 내정에서는 자주국이지만 외교관계에서는 중국의 보호를 받는 예속관계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1888  년 2월 데니德尼 는 청한론淸韓論에서 번속 속방 속국까지 조공국朝貢國으로 규정할 수 있으므로 조선국가의 주권은 전혀 손상당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유길준兪吉濬도 국권 이라는 글에서 국권의 두 가지 측면을 설명했다. 하나는 내용주권內用主權 으로 일체의 정치와 법령이 그 나라의 전장典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외용주권外用主權으로 각국 간에 독립과 평등의 예로서 외국과 교섭한다고 했다 (유길준전서 IV국권). 만국공법이 규정한 내공법內公法과 외공법外公法 을 재해석한 것이었다. 실제로 만국공법은 소국들의 국가적 지위를 자주지국과 반주지국 保護國  병번 屬邦 등으로 구분하고 반드시 서구열강의 국제적 공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만국공법 권1  제 5절   주권분내외) 유길준은 만국공법의 국제질서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약소국 조선의 위상을 더 정확히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조선이 독립국가도 속국도 아닌 이상 타국의 보호를 받는 수호국守護國 공물을 바치는 증공국의 주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유길준은 비록 증공국이라도 독립자주국 같이 외국과의 교섭이나 국내 자주권에 전혀 관여 받지 않는다는 점을 밝혔다. 이어 그의 문제의식은 내적으로 국가의 자주권을 어떻게 관철시킬 것인가 하는 것 곧 근대국가로서의 국체와 정체수립 문제로 옮겨갔다.

대한제국 국체 논쟁 :군민공치론과 황제권 강화론

 

유길준은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조선왕조의 국체인 군주권을 변경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서유견문 제5편 정부의 시초 )  하지만 현존의 국망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전제군주권에 의한 정치체제를 변통해야 하며 그 대안으로 서구의 정치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각국의 정부형태를 5가지로 나누어 전제군주제와 압제정 귀족정  군민공치 그리고 공화정으로 규정했다. 그중에서도 군민君民이 공치共治하는 것 특히 영국식 입헌정치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간주했다. 군민공치란 원래 서구의 입헌군주제를 번안한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길준은 서구 근대국가처럼 입법 행 정 사법 3권분립으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의민주주의적 의회제도의 도입이나 입헌정치의 중요성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급속 한 근대개혁을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는 개혁관료집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1894년 갑오개혁기에는 실제로 김홍집 유길준 등 개혁관료들이 현존 조선왕 조의 국가질서를 크게 변경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개혁관료들의 정치적 주도권 을 둘러싼 논쟁이 거듭되는 가운데 내각관제의 법제규정과 운영방식에서 나타났듯이 군주권과 민중의 여론이 배제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또한 갑오정 권은 일본이 개입해서 수립된 정권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근대적 개혁이 추진될 수록 일본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되었다. 결국   1895년 8월 왕후 민씨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갑오정권은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  1895년 말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통해 대조선제국으로 국체변경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1897년 5월 전직 관료와 유생 및 개신유학 계통의 지식인들은 새로이 칭제상소운동을 벌였다. 특히 정교鄭喬는 조선의 독자적인 정통론적 역사인식에 근거하여 단순한 칭제가 아닌 황제즉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황제 없이는 독립도 없다고 하면서 일반인의 인식을 고취시켰다. 하지만 독립협회 측의 윤치호尹致昊 등은 칭제는 이름뿐이라고 비판했다. 최익현 유인석柳麟錫 등 위정척사 계열 유생들은 군주전제를 옹호하면서도 중화사상과 주자학적 명분론에 의거해 칭제를 반대했다. 월 정부관인 중 농상공부협판 권재형權在衡 은 만국공법 조항을 들어 자주국은 스스로 존호를 세우고 만국과 함께 평행지권平行之權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서원일기 건양  2년  8월  29일) 이런 여론공세 속에서  10월에 대한제국이 정식출범했다. 대한제국은 대외적으로 국가주권 확보를 만방에 과시하고 러 일 양국 간 중립의지를 표명하는 한편 대내적으로 군주권의 제한론을 배격하면서 황제권 강화를 추구했다. 

 

이에 대해 독립협회도 전제황권의 공고화를 통해 개혁입법을 추진하는 한편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적 기능을 갖게 하고 의정부를 견제하는 기구로 만들고자 했다. 독립협회는 황제권 아래 의결권과 행정권을 분립시키되 민권을 정치적으로 반영하면서 궁극적으로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대한제 국은 이런 독립협회의 운동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만민공동회나 박영효 등의 권력장악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결국 1899년 8월 대한제국은 대한국국제 大韓國國制 를 반포했다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모두 군주에게 집중시켜 전제군 주권을 성문법적으로 확립한 것이다. 이제 황제는 근대개혁을 주도하는 주체로 규정되었으며 광무양전사업光武量田事業을 비롯한 일련의 대내외적 개혁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체에는 대한제국 국민으로서 신민들이 갖는 권리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이 없었다. 또한 대한제국은 공법에 의거해 독립국가로서의 외교관계를 천명했을 뿐 경제적 차원의 독립국가를 확보하기 위해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대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1905년 이후 보호국의 위상과 입헌군주제 논쟁

 

1904년 2월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켜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정치적 지배기반 구축에 착수했다. 일본은 표면적으로 동양평화와 한국의 독립 보전을 내세웠지만 한일의정서 를 체결하여 보호국의 틀을 만들려고 했다. 1905년 10월에는 고종의 비준을 받지 못했는데도 강제로 을사늑약 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함으로써 내정의 자주권도 강탈했다. 이제 대한제국은 독립국가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당시 조약의 불법성을 지적하는 논의는 상소운동이나 외교교섭 무력 의병항 쟁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문명개화론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통감 치하의 보호정치를 곧바로 식민지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의 보호 아래 개명진보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들도 근대개혁이라는 명분하에 입헌의 필요성과 정치체제 변혁을 거론하기는 했다. 당시 헌정연구회 나 대한협회는 국가유기체설에 기반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의 주장이 개인의 권리 시민과 부르주아의 이해에 기초한다기보다는 국가주권 혹은 군주권을 우선시한다는 점이었다 (유치형  헌법  1-4 편). 이런 논리는 위정척사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인석은 우주문답宇宙問答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침략을 비판하면서도 국가정치체제로서는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전제군주권의 강화를 주장했다 이들은 대한제국의 실권이 현실적으로 통감을 매개로 일본천황과 제국주의에 가 있는데도 고종이 나 순종을 대상으로 군주권을 강화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는 허구화된 대한제국의 허상을 좇는 것이었다. 결국 일제의 보호정치를 극복할 근대 국민국 가상을 제기하지 못한 상황에서 완전한 식민지라는 병합의 길이 점차 가시화되 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20세기 초까지 한국사회는 자주독립국가를 쟁취하지 못한 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해 있었다. 당시 국제질서와 국체 정체 인식의 근본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논자들은 만국공법의 제국주의 적 논리를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속국과 보호국 증공국의 차이를 준별하지 못했다. 또한 국체 논의에서도 입헌군주제와 공화제를 채택 가능한 제도로 간주하지 못하고 대부분 군주제만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최근의 연구에 서는 조선왕조적 입장에서 제기된 황제권 강화 논리를 민권을 보장하는 개혁논리로 취급하는 민국民國체제 이념이 주장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근대 국가주권을 확립하려는 국민국가 입헌 논의의 중요성은 주목받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민중들의 정치경제적 지위 보장 특히 정치참여가 필수불가결하다는 시각이 간과되었던 것이다. 이런 시각을 확립할 수 있을 때에야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함과 동시에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한국사회가 이제  입헌공화국 이라는 근대 국민국가 단계로 진전했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Traduction(s)

La pensée kaehwa et le discours sur la construction de l’État mode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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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uction

19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봉건적 사회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제국주의 열강에 문호를 개방했다 서구열강을 비롯 청국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책동을 강화했다. 국권의 위기가 심화된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여러 계급의 개혁운동 이 전개되었다 초기에는 일본을 매개로 한 서구문명 수용 여부를 놓고 견해가 대립되었지만  1880년대 후반 이후 조선왕조국가를 근대국가로 개편하는 문제 즉 대내외적 국가주권의 확정 여부를 초점으로 논전이 전개되었다. 

C’est sans avoir résolu les contradictions de sa société féodale que le Chosŏn ouvrit ses portes aux puissances impérialistes dans la seconde moitié du XIXe siècle[A1]. Les puissances européennes[A2], puis l’empire des Qing et le Japon y intensifièrent leurs manœuvres impérialistes. La crise étatique s’en trouva aggravée, et des mouvements de réformes furent engagés à plusieurs niveaux pour la surmonter. Les points de vue divergèrent au départ sur la question de savoir s’il fallait introduire la civilisation occidentale par l’intermédiaire du Japon. Mais après la seconde moitié des années 1880, les controverses se focalisèrent sur la réorganisation du royaume de Chosŏn en un État  moderne,  autrement  dit  sur l’affirmation de sa souveraineté intérieure  et extérieure.

Notes

  1. ^ Ndt : Nous avons fait le choix de ne pas traduire kaehwa dans cet article. Ce terme est souvent rendu par « ouverture » en français et « enlightenment » en anglais. Son sens profond indique en fait une « ouverture à la Civilisation ». Toutes les notes de bas de page sont de notre fait.
  2. ^ À l’instar de nombreux historiens spécialistes du XIXe siècle, l’auteur utilise le terme d’« Europe de l’Ouest » (Sŏgu), mais il désigne en fait l’Occident en général.
 

Texte original

Traduction

1860-70년대 서구문명 수용 논쟁 : 척사론과 개국론

 

 

 

서구문명 수용을 둘러싼 대립은 1860년대 대원군 정권 시기 쇄국정책을 둘러싼 논의에서 시작되었다 척사론斥邪論은 정권 내에서만이 아니라 재야 노론老論 유생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기정진奇正鎭은 서양과의 교류뿐 아니라 양물洋物 자체를 철저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이항로李恒老는 주전설主戰說을 내세워 양적洋賊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논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서양이 중화中華나 소화小華 (조선)를 침범하는 것은 사邪가 정正을 이기고 신臣이 군君을 능멸하고 땅이 하늘에 항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화서집 권10   ‘존중화 하’) 그는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에 의거했기 때문에 여전히 중국 중심으로 계서적으로 편성되는 차별적 국제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논리는 김평묵金平默 에게 이어져 존화양이尊華攘夷 의 논리로 나아갔다. 척사론은 단지 주자 성리학 이라는 학적 도덕적 입장에서만 주장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서양과의 교류에 따른 경제침탈을 크게 우려했다. 이항로의 주장처럼 유한한 농산품과 서양 공산품의 교역이라는 불평등한 무역관계는 국내 생산기반의 몰락과 농민층의 분화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척사위정론斥邪爲政論은 대원군 정권 의 척화론斥和論과는 또 다른 보수적 내수외양책이었다. 

Les polémiques sur l’introduction de la civilisation occidentale dans les années 1860-1870 : Les discours sur la réfutation de l’hérésie et de l’ouverture du pays

 

Les clivages autour de l’introduction de la civilisation occidentale s’amorcèrent dans les années 1860, pendant la régence du Taewŏn’gun, avec des débats sur la politique de fermeture du pays. Un discours sur la réfutation de l’hérésie (ch’ŏksaron 斥邪論) émergea non seulement dans les cercles du pouvoir, mais aussi parmi les lettrés confucéens du Noron 老論qui n’avaient pas de charge officielle. Ki Chŏngjin 奇正鎮 soutenait qu’il fallait systématiquement interdire les échanges avec l’Occident, ainsi que les produits occidentaux (yangmul 洋物) eux-mêmes. En se faisant l’avocat de la guerre, Yi Hangno 李恆老 critiquait sévèrement les partisans d’une entente avec les brigands occidentaux (yangjŏk 洋賊). Il affirmait que l’invasion de la Chine[A1] (Chunghwa 中華) et de la petite Chine[A2] (Sohwa小華, c’est-à-dire le Chosŏn) par l’Occident était une victoire de l’hérésie (sa 邪) sur l’orthodoxie (chŏng 正), un outrage d’un sujet (sin 臣) à son souverain (kun 君), et une révolte de la Terre contre le Ciel (Hwasŏ chip, kwŏn 10, « (Chon Chunghwa ha) »). Yi, qui s’appuyait sur la conception traditionnelle du monde divisé entre civilisés et barbares, tenait pour évident que les relations internationales étaient [de nature] inégalitaire et qu’elles s’organisaient en différents paliers autour de la Chine. Ce raisonnement trouva un écho chez Kim P’yǒngmuk 金平默qui le développa dans une « vénération de la civilisation chinoise et un rejet des barbares » (chon Hwa yang i 尊華攘夷). Les [tenants de ce] discours sur la réfutation de l’hérésie ne se plaçaient pas uniquement sous les angles épistémique et moral du néo-confucianisme de Zhu Xi. Ils s’inquiétaient grandement du pillage économique qui découlerait des échanges avec l’Occident. À l’instar de Yi Hangno, [ils pensaient] que des relations commerciales inégalitaires fondées sur l’échange de produits agricoles limités avec des produits manufacturés d’Occident résulteraient dans l’effondrement des fondements de la production intérieure et susciteraient des clivages au sein de la classe des paysans. Leur discours sur la réfutation de l’hérésie et la défense de l’orthodoxie (ch’ŏksa wijŏng ron 斥邪為政論) constituait, à côté du discours du Taewǒn’gun sur le rejet de l’entente avec les Occidentaux (ch’ŏkhwaron 斥和論), un autre projet conservateur visant à expulser les barbares étrangers avec une réforme morale interne[A3].

 

한편 문호개방을 적극 고려하면서 국가 자강책을 강구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박규수朴珪壽는 1870년대에 자주적 개국통상론을 주장했다.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 등은 당시 청의 양무사상가인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등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해방론海防論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양과의 수교를 주장했다. 이후  개항통상론은 1876년 당시 일본 운요호雲揚號 사건 처리를 둘러싸고 문호개방 논쟁이 일어났을 때 채택가능한 방안으로 부각되었다. 물론 이때도 개항 반대론이 제기되었다. 최익현崔益鉉은 일본은 원래 양적의 앞잡이이고 서양과 같다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민씨 척족정부는 전격적으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한 뒤 1880년 6월 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조선책략朝鮮策略과 이언易言을 받아들였다. 이어 정부는 청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근대화정책을 조사했고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은 일본의 근대화 실상을 담은 공식보고 서를 제출했다. 

 

D’autres proposaient en revanche des mesures visant à l’auto-renforcement du pays, tout en réfléchissant activement à l’ouverture des frontières. Pak Kyusu 朴珪壽mit en avant un discours sur l’ouverture autonome du pays[A4] dans les années 1870. O Kyǒngsǒk 吳慶錫et Yu Honggi 劉鴻基furent quant à eux influencés par des ouvrages comme le Traité illustré sur les pays d’outre-mer (Haiguo tuzhi 海國圖志) de Wei Yuan 魏源, qui était un penseur du [mouvement] yangwu (« activités à l’occidentale ») des Qing. Ils adhéraient au discours sur la protection des frontières (haebangnon 海防論) et préconisaient l’établissement de relations diplomatiques avec l’Occident. Ce discours s’imposa ensuite comme l’une des solutions possibles, dans le cadre des polémiques sur l’ouverture du pays, lorsqu’il fallut résoudre l’incident du navire japonais Unyō 雲楊號 en 1876. Des voix s’élevèrent bien entendu contre l’ouverture du pays à cette époque. Ch’oe Ikhyǒn 崔益鉉mit en avant un discours sur l’unité du Japon et de l’Occident (wae-yang ilch’e ron 倭洋一體論) en avançant que le Japon était un agent des barbares occidentaux. Mais après avoir rapidement conclu un traité diplomatique avec le Japon, les membres de la famille Min alors au pouvoir[A5] se montrèrent favorables [aux opuscules intitulés] Une stratégie pour la Corée (Chaoxian celüe 朝鮮策略) et Propos présomptueux (Yiyan 易言) que l’émissaire Kim Hongjip金弘集avaient rapportés au 6e mois de 1880 d’une seconde mission diplomatique envoyée au Japon8. Le gouvernement [coréen] mena ensuite des enquêtes sur le mouvement yangwu des Qing et la politique de modernisation du Japon à la suite de la restauration de Meiji. Une mission gouvernementale présenta de plus en 1881 un rapport officiel faisant état de la modernisation au Japon.

 

이렇게 분위기가 크게 바뀌는 가운데 조선왕조국가의 개방책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다.   년  월 척사운동은 조선책략에 나타난 외교정책을 비판했다 척사론은 미국 청국 일본 등 주변 국가와의 교섭확대와 동맹을 주장하는 논리에 반대하면서 러시아 미국 일본이 모두 같은 오랑캐라는 입장을 재확인하 고 유입된 서양 상품과 서적을 소각하고 신설된 정부기관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 衙門을 혁파하라고 했다. 반면 개화를 주장하는 상소도 있었다. 곽기락郭基洛 윤선 학 같은 논자들은 삼강오륜이 천부의 변함없는 이치로서 도道이며 선박 농기계 와 같이 편민이국便民利國을 위한 것은 기器라고 규정했다. 이른바 도기분리道器分 離 와 서기수용西器受容 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문호개방 찬성론자들은 기본적 으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의 입장을 취했으므로 서양 정치제도의 수용으로까 지 나아가지는 못했고 서양 선진기술을 수용하는 데 머물렀다. 

 

C’est dans cette atmosphère changeante que des controverses s’élevèrent autour de la politique d’ouverture menée par l’État royal du Chosŏn. Au 2e mois de 1881, le mouvement de réfutation de l’hérésie critiqua la politique diplomatique décrite dans Une stratégie pour la Corée. Les tenants de ce discours s’opposaient au développement des relations, ainsi qu’à une alliance avec des pays voisins comme les États-Unis, les Qing et le Japon. Ce faisant, ils se confortaient dans l’idée que la Russie, les États-Unis et le Japon étaient tous les mêmes barbares ; ils brûlaient par ailleurs les marchandises et les livres occidentaux, et exigeaient la dissolution du Bureau des affaires d’État (T’ongni kimu amun 統理機務衙門), une institution gouvernementale qui venaient d’être établie[A6]. Inversement, des mémoires au trône préconisaient aussi l’ouverture. Des lettrés engagés comme Kwak Kirak 郭基洛et Yun Sŏnhak stipulaient que les trois principes et les cinq relations fondamentales (du confucianisme, samgang oryun), en tant que raison immuable de toutes choses, constituaient la Voie (to 道), et que les navires et les engins agricoles étaient des instruments (ki 器) dont le peuple et l’État pouvaient tirer profit (p’yŏnmin iguk 便民利國). Ils soutenaient en d’autres termes ce qu’on appelle la « division entre voie et instrument » (To-ki pulli 道器分離) et l’« introduction des instruments occidentaux » (Sŏgi suyong 西器受容). Il est évident que les chantres de l’ouverture se bornèrent à introduire de nouvelles technologies occidentales en adoptant ce « discours sur la voie orientale et les instruments occidentaux » (Tongdo sŏgi ron 東道西器論), mais ils n’allèrent pas jusqu’à introduire les systèmes politiques occidentaux.

 

Notes

  1. ^ Le terme de « Chunghwa » utilisé ici en coréen ne fait pas seulement référence à la Chine, mais aussi à la civilisation chinoise/confucéenne.
  2. ^ Là encore, « petite Chine » est une traduction pratique mais inexacte du coréen « Sohwa » désignant la « petite civilisation chinoise ».
  3. ^ « Expulser les barbares étrangers avec une réforme morale interne » (naesu oeyang內修外攘) fut l’un des maîtres-mots des fonctionnaires conservateurs après l’« invasion » manquée de la Corée par la France en 1866.
  4. ^ Littéralement, « l’ouverture du pays et l’établissement de relations commerciales » (kaeguk t’ongsang). Par souci de simplicité, nous rendons ici cette expression par « ouverture du pays ».
  5. ^ La reine Min était l’épouse du roi Kojong, et les membres de sa famille tenaient les rênes du pouvoir autour de 1880.
  6. ^ Ce Bureau des affaires d’État était en effet chargé, entre autres choses, des nouvelles relations diplomatiques avec les puissances étrangères.
 

Texte original

Traduction

1880년대 국제적 지위 논쟁 : 독립론과 속방론

 

 

1880년대 초 조선 정부는 청국의 후원 아래 외국세력을 끌어들여 세력균형 속에서 독립을 지키려 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서구 여러 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은 조선을 자국의 속방屬邦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종주권宗主權을 요구했다. 조선 은 구미열강과 형식적으로는 평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도 청의 정치적 간섭을 감수하고 경제이권을 침탈당하는 양절체제兩截體制를 강요받고 있었다. 당시 국제질서의 준거 틀로 소개된 것은 만국공법萬國公法이었다. 만국공법 은 단순히 조약과 통상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특히 조선왕조국가의 국제적 지위뿐만 아니라 내정에서의 권한도 종래와 다르게 규정됨을 의미했다 당시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는 이전의 개항통상론이나 서기수용론의 차원을 넘어 청으로부터의 독립과 서구적 근대개혁을 추진했다 그것이  1884년 갑신정변이었다. 

Les débats sur la position internationale [de la Corée] dans les années 1880 : Les discours sur l’indépendance et la vassalité

 

Placé sous la protection des Qing, le gouvernement du Chosŏn chercha au début des années 1880 à préserver son indépendance en maintenant un équilibre entre chacune des forces étrangères attirées dans son giron. Il conclut à cette fin des traités d’amitié et de commerce avec plusieurs pays occidentaux, à commencer par les États-Unis, puis d’autres comme l’Angleterre, la France, l’Allemagne et la Russie. Après la mutinerie de 1882 (imo kullan), les Qing considérèrent le Chosŏn comme un État vassal (shubang / sokpang
屬邦) et revendiquèrent avec fermeté leur suzeraineté (zongzhuquan / chongjugwŏn 宗主權) sur ce pays. Le Chosŏn était de fait assujetti à un double système diplomatique (yangjŏl ch’eje 兩載體制) consistant, d’un côté, à établir formellement des relations égalitaires avec les puissances occidentales et à accepter, d’un autre côté, l’ingérence politique des Qing et l’usurpation de ses privilèges économiques par ce dernier.

 

 

당시 현안은 조선왕조국가가 청의 속방인가 혹은 증공국贈貢國으로서 독립국 가인가 여부였다 원세개袁世凱는 1886년 조선대국론朝鮮大局論에서 조선을 부용지국附庸之國으로 간주했다. 이는 속방 속번屬藩 번복藩服 등의 용어와 상통하는데 조선이 비록 내정에서는 자주국이지만 외교관계에서는 중국의 보호를 받는 예속관계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1888  년 2월 데니德尼 는 청한론淸韓論에서 번속 속방 속국까지 조공국朝貢國으로 규정할 수 있으므로 조선국가의 주권은 전혀 손상당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Ce sont les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Wanguo gongfa 萬國公法) qui servaient à cette époque de cadre de référence à l’ordre international[A1]. Cet ouvrage ne se limitait pas simplement à la question des traités et du commerce. Il impliquait aussi pour l’État royal du Chosŏn une toute nouvelle définition, non seulement de son statut sur la scène internationale, mais aussi de son autorité en matière de politique intérieure. C’est à cette époque que [les membres] du parti kaehwa comme Kim Okkyun 金玉均, Hong Yǒngsik 洪英植, Sǒ Kwangbǒm 徐光範et Pak Yǒnghyo 朴泳孝franchirent le stade de l’ouverture des ports et de l’introduction des instruments occidentaux pour promouvoir l’indépendance et les réformes devant ouvrir la voie à la modernité occidentale. Ce fut le coup d’État de 1884 (kapsin chǒngbyǒn).

 

La question pendante était alors de savoir si l’État royal du Chosŏn était un royaume vassal des Qing ou un pays indépendant lui versant un tribut. Dans son « Traité sur l’état général du Chosŏn » (Chaoxian daju lun 朝鮮大局論) composé en 1886, Yuan Shikai considérait ce pays comme un « royaume satellite » (fuyong zhi guo[A2] 附庸之國). Il y employait de manière interchangeable les termes shubang屬邦, shufan屬藩et fanfu 藩服[A3] . Et à ses yeux, le Chosŏn avait beau être un État souverain en termes de politique intérieure, il entretenait aussi un rapport de dépendance avec la Chine dont il bénéficiait de la protection diplomatique. Mais dans son China and Korea (Ch’ŏng-Han ron 清韓論) de février 1888, Owen Nickerson Denny 德尼 parvint à montrer que les termes fanshu (pŏnsok 藩屬), shubang (sokpang) et shuguo (sokkuk 屬國) désignaient tous un État tributaire (tributary state, chogongguk 朝貢國), et que ce dernier statut n’engendrait nullement pour l’État du Chosŏn une perte de ses droits souverains.

 

유길준兪吉濬도 국권 이라는 글에서 국권의 두 가지 측면을 설명했다. 하나는 내용주권內用主權 으로 일체의 정치와 법령이 그 나라의 전장典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외용주권外用主權으로 각국 간에 독립과 평등의 예로서 외국과 교섭한다고 했다 (유길준전서 IV국권). 만국공법이 규정한 내공법內公法과 외공법外公法 을 재해석한 것이었다. 실제로 만국공법은 소국들의 국가적 지위를 자주지국과 반주지국 保護國  병번 屬邦 등으로 구분하고 반드시 서구열강의 국제적 공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만국공법 권1  제 5절   주권분내외) 유길준은 만국공법의 국제질서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약소국 조선의 위상을 더 정확히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조선이 독립국가도 속국도 아닌 이상 타국의 보호를 받는 수호국守護國 공물을 바치는 증공국의 주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유길준은 비록 증공국이라도 독립자주국 같이 외국과의 교섭이나 국내 자주권에 전혀 관여 받지 않는다는 점을 밝혔다. 이어 그의 문제의식은 내적으로 국가의 자주권을 어떻게 관철시킬 것인가 하는 것 곧 근대국가로서의 국체와 정체수립 문제로 옮겨갔다.

 

Yu Kilchun expliqua également les deux facettes de cette souveraineté dans un texte intitulé « Souveraineté nationale » (Kukkwŏn國權). Pour lui, la « souveraineté intérieure » (naeyong chugwŏn 內用主權) désignait l’ensemble de la politique et des lois provenant des institutions (chŏnjang典章) d’un pays, alors que la « souveraineté extérieure » (oeyong chugwŏn外用主權) faisait référence aux relations avec l’étranger, illustrées par l’indépendance et l’égalité qui régnaient entre les différents États (Yu Kilchun chŏnsŏ, IV, « Kukkwŏn »). Il s’agissait d’une réinterprétation de l’« internal public law » (neigongfa 內公法) et de l’« external public law » (waigongfa 外公法) définies dans les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Ce dernier ouvrage distinguait, parmi les statuts étatiques des petits pays, celui des États indépendants (zizhu zhi guo 自主之國), celui des États semi-indépendants (banzhu zhi guo 半主之國 / Pohoguk 保護國) et celui des pays frontaliers tributaires (pyŏngbŏn邊藩/ sokpang 屬邦) ; et il déclarait qu’il leur était impératif d’obtenir la reconnaissance des différentes puissances occidentales (Wanguo gongfa, juan 1, di 5 jie, « zhuquan fen neiwai »). Yu Kilchun n’était pas opposé en soi à l’ordre du monde tel que défini dans les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mais il cherchait à mieux comprendre la situation dans laquelle se trouvait cet État faible du Chosŏn. Ce n’était pas tellement le statut du Chosŏn en tant qu’État indépendant ou vassal qui l’intéressait, mais plutôt la question des droits souverains de cet État protégé (suhoguk 收護國) par un autre pays à qui il versait un tribut. Yu Kilchun put établir qu’un pays tributaire, tout comme un État indépendant, ne devait accepter aucune forme d’ingérence dans ses relations internationales et son autonomie intérieure. Par la suite, son esprit critique se tourna vers la question de savoir comment obtenir l’indépendance nationale d’un point de vue intérieur, autrement dit comment établir le régime politique et l’identité d’un État moderne.

 

Notes

  1. ^ Ouvrage influent de Henry Wheaton publié en 1836, réédité à plusieurs reprises et traduit en chinois en 1864 aux frais du gouvernement impérial.
  2. ^ Mais fuyong zhi guo peut aussi être traduit par « royaume vassal ».
  3. ^ Tous ces termes désignent en effet un pays tributaire. Shufan et fanfu peuvent aussi être traduits par « dépendances extérieures ». Toutefois, ces deux derniers termes étaient traditionnellement appliqués pour les pays situés à l’ouest de l’empire chinois, et non à la Corée.
 

Texte original

Traduction

대한제국 국체 논쟁 :군민공치론과 황제권 강화론

 

 

 

유길준은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조선왕조의 국체인 군주권을 변경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서유견문 제5편 정부의 시초 )  하지만 현존의 국망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전제군주권에 의한 정치체제를 변통해야 하며 그 대안으로 서구의 정치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각국의 정부형태를 5가지로 나누어 전제군주제와 압제정 귀족정  군민공치 그리고 공화정으로 규정했다. 그중에서도 군민君民이 공치共治하는 것 특히 영국식 입헌정치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간주했다. 군민공치란 원래 서구의 입헌군주제를 번안한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길준은 서구 근대국가처럼 입법 행 정 사법 3권분립으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의민주주의적 의회제도의 도입이나 입헌정치의 중요성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급속 한 근대개혁을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는 개혁관료집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Les polémiques sur le régime de l’empire du Grand Han : Les discours sur la séparation des pouvoirs et le renforcement de l’autorité impériale

 

Yu Kilchun reconnaissait dans ses Choses vues et entendues lors d’un voyage en Occident (Sŏyu kyŏnmun 西遊見聞) qu’il était impossible de modifier le régime de la dynastie Chosŏn, à savoir un pouvoir monarchique[A1] (Sŏyu kyŏnmun, 5e partie, « Chŏngbu ŭi sich’o »). Cependant, il fallait selon lui adapter d’une manière ou d’une autre ce système politique fondé sur l’absolutisme, et introduire par ce biais les régimes politiques européens. Il distinguait cinq formes de gouvernement étatique, à savoir la monarchie absolue, le régime répressif, le régime aristocratique, la séparation des pouvoirs et le régime républicain. Parmi ceux-ci, Yu considérait « le fait de séparer les pouvoirs », et plus particulièrement la monarchie constitutionnelle britannique, comme la forme la plus idéale [de gouvernement]. La séparation des pouvoirs, même si elle découlait à l’origine des monarchies constitutionnelles d’Europe, revêtait pour lui une signification particulière. S’il aspirait à un équilibre entre les trois pouvoirs législatif, exécutif et judiciaire, comme dans les pays modernes d’Europe, Yu Kilchun voyait en revanche de manière défavorable l’introduction d’un système parlementaire avec une démocratie représentative, et critiquait l’importance des gouvernements constitutionnels. Aussi soulignait-il la nécessité d’un groupe de fonctionnaires réformateurs exerçant un pouvoir politique fort en vue de réformes rapides vers un État moderne.

 

1894년 갑오개혁기에는 실제로 김홍집 유길준 등 개혁관료들이 현존 조선왕 조의 국가질서를 크게 변경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개혁관료들의 정치적 주도권 을 둘러싼 논쟁이 거듭되는 가운데 내각관제의 법제규정과 운영방식에서 나타났듯이 군주권과 민중의 여론이 배제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또한 갑오정 권은 일본이 개입해서 수립된 정권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근대적 개혁이 추진될 수록 일본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되었다. 결국   1895년 8월 왕후 민씨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갑오정권은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  1895년 말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통해 대조선제국으로 국체변경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Lors des réformes de Kabo en 1894, des fonctionnaires réformateurs comme Kim Hongjip et Yu Kilchun tentèrent effectivement de grandes réformes de l’ordre étatique de la dynastie Chosŏn. Au milieu d’une série de polémiques sur le leadership politique des réformateurs, le pouvoir monarchique et l’opinion publique se trouvèrent écartés, ce dont témoignent les règlements et les méthodes de fonctionnement du Cabinet[A2]. Le régime de Kabo pâtissait en outre du fait qu’il avait été établi avec l’ingérence du Japon. La dépendance par rapport à ce dernier tendit à s’intensifier à mesure que les réformes étaient impulsées. Tant et si bien que la reine Min fut finalement assassinée en août 1895. Pour faire face à cette situation, le régime de Kabo tenta vers la fin de 1895 de donner au roi le titre d’empereur et de fixer une nouvelle période de règne (ch’ingje kŏnwŏn 稱帝建元) en vue de transformer le régime en un « empire du Grand Chosŏn » (Tae Chosŏn cheguk), mais ces tentatives s’avérèrent infructueuses.

 

이후 1897년 5월 전직 관료와 유생 및 개신유학 계통의 지식인들은 새로이 칭제상소운동을 벌였다. 특히 정교鄭喬는 조선의 독자적인 정통론적 역사인식에 근거하여 단순한 칭제가 아닌 황제즉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황제 없이는 독립도 없다고 하면서 일반인의 인식을 고취시켰다. 하지만 독립협회 측의 윤치호尹致昊 등은 칭제는 이름뿐이라고 비판했다. 최익현 유인석柳麟錫 등 위정척사 계열 유생들은 군주전제를 옹호하면서도 중화사상과 주자학적 명분론에 의거해 칭제를 반대했다. 월 정부관인 중 농상공부협판 권재형權在衡 은 만국공법 조항을 들어 자주국은 스스로 존호를 세우고 만국과 함께 평행지권平行之權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서원일기 건양  2년  8월  29일) 이런 여론공세 속에서  10월에 대한제국이 정식출범했다. 대한제국은 대외적으로 국가주권 확보를 만방에 과시하고 러 일 양국 간 중립의지를 표명하는 한편 대내적으로 군주권의 제한론을 배격하면서 황제권 강화를 추구했다. 

 

Par la suite, en mai 1897, les fonctionnaires autrefois en poste, les lettrés et les intellectuels néo-confucéens menèrent une nouvelle campagne de mémoires au trône pour demander au roi de prendre le titre d’empereur. L’un d’eux, Chŏng Kyo 鄭喬, s’appuya plus précisément sur sa perception historique de l’orthodoxie propre à la dynastie Chosŏn, et il affirma qu’il ne fallait pas seulement prendre le titre d’empereur, mais procéder à une intronisation. Les auteurs de ces mémoires inculquaient aux gens du peuple leur perception selon laquelle l’indépendance était impossible sans un empereur. Mais du côté du Club de l’indépendance, Yun Ch’iho 尹致昊et d’autres critiquaient le fait que ce titre d’empereur n’était rien d’autre qu’un nom. Les lettrés du mouvement wijŏng ch’ŏksa, comme Ch’oe Ikhyŏn et Yu Insŏk 柳麟錫, s’opposaient pour leur part au titre d’empereur en vertu de la pensée Chunghwa et de la cause zhuxiste, mais tout en soutenant la monarchie absolue. En août, le vice-ministre de l’agriculture, du commerce et de l’industrie, Kwŏn Chaehyŏng 權載衡, s’appuya sur un article des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pour souligner que les États indépendants établissaient leur propre appellation et pouvaient exercer des « droits égaux » (p’yŏnghaeng chi kwŏn 平行之權) à ceux des autres pays (Pisŏwŏn ilgi, Kŏnyang 2.8.29). C’est dans ce contexte d’une offensive de l’opinion publique que l’empire du Grand Han fut fondé en octobre. Ce dernier affichait devant toutes les nations qu’il préservait sa souveraineté étatique et son désir de neutralité au milieu de la Russie et du Japon. Et du côté intérieur, il s’évertuait à renforcer le pouvoir impérial en dénonçant tout discours sur les limites du pouvoir souverain.

 

이에 대해 독립협회도 전제황권의 공고화를 통해 개혁입법을 추진하는 한편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적 기능을 갖게 하고 의정부를 견제하는 기구로 만들고자 했다. 독립협회는 황제권 아래 의결권과 행정권을 분립시키되 민권을 정치적으로 반영하면서 궁극적으로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대한제 국은 이런 독립협회의 운동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만민공동회나 박영효 등의 권력장악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결국 1899년 8월 대한제국은 대한국국제 大韓國國制 를 반포했다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모두 군주에게 집중시켜 전제군 주권을 성문법적으로 확립한 것이다. 이제 황제는 근대개혁을 주도하는 주체로 규정되었으며 광무양전사업光武量田事業을 비롯한 일련의 대내외적 개혁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체에는 대한제국 국민으로서 신민들이 갖는 권리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이 없었다. 또한 대한제국은 공법에 의거해 독립국가로서의 외교관계를 천명했을 뿐 경제적 차원의 독립국가를 확보하기 위해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대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Par la suite, le Club de l’indépendance proposa de réformer le Conseil privé du souverain (Chungch’uwŏn) en lui donnant une fonction parlementaire, et il suggéra d’établir le Cabinet (Ŭijǒngbu[A3]) comme un organe de contrôle, tout en consolidant d’un autre côté l’autorité impériale grâce à une réforme législative. Le Club de l’indépendance proposa en dernier lieu de renforcer l’autorité impériale tout en donnant un reflet politique aux droits civiques, à condition de distinguer droit de vote et pouvoir exécutif. L’empire du Grand Han ne tolérait cependant pas ce genre de campagne du Club de l’indépendance et réprima de manière radicale les mouvements de l’Assemblée du peuple (Manmin kongdonghoe) ou de Pak Yŏnghyo qui cherchaient à s’emparer du pouvoir. L’empire du Grand Han promulgua finalement en août 1899 la Constitution du Grand Han (Tae Hanguk kukche 大韓國國制). Cette dernière établissait par écrit l’autorité absolue du souverain qui centralisait les trois pouvoirs législatif, judiciaire et exécutif. L’empereur, dont le statut d’agent principal des réformes était maintenant fixé, pouvait maintenant promouvoir une série de réformes intérieures et extérieures, à commencer par un recensement cadastral (Kwangmu yangjŏn saŏp 光武量田事業)[A4]. Il n’était cependant pas stipulé de manière explicite dans cette Constitution quels étaient les droits des sujets en tant que citoyens de l’empire du Grand Han. Par ailleurs, cet empire se contenta de définir, en vertu du droit international, ses relations diplomatiques en tant qu’État indépendant, mais il ne chercha pas à faire réviser les traités inégaux en vue de garantir l’indépendance du pays dans une dimension économique.
 

Notes

  1. ^ Le Sŏyu kyŏnmun fut publié en 1895, soit deux ans avant que le roi Kojong ne décide d’établir l’empire du Grand Han.
  2. ^ Les réformes de Kabo transformèrent le Grand Conseil d’État (Ŭijǒngbu議政府) en un Cabinet (Naegak 內閣) en 1895.
  3. ^ Le Grand Conseil d’État (Ŭijǒngbu) évoqué à la note précédente avait été remplacé en 1895 par le Cabinet (Naegak), puis avait repris son nom d’origine en 1896 avant de disparaître définitivement en 1907.
  4. ^ Littéralement, « entreprise de recensement cadastral de l’ère Kwangmu ». Ce recensement s’étala de 1898 à 1904.
 

Texte original

Traduction

1905년 이후 보호국의 위상과 입헌군주제 논쟁

 

 

1904년 2월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켜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정치적 지배기반 구축에 착수했다. 일본은 표면적으로 동양평화와 한국의 독립 보전을 내세웠지만 한일의정서 를 체결하여 보호국의 틀을 만들려고 했다. 1905년 10월에는 고종의 비준을 받지 못했는데도 강제로 을사늑약 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함으로써 내정의 자주권도 강탈했다. 이제 대한제국은 독립국가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Le statut du protectorat et les débats sur la monarchie constitutionnelle après 1905

 

Le Japon déclencha en février 1904 la guerre russo-japonaise et posa les bases de sa domination politique [en Corée] par une occupation militaire de l’empire du Grand Han. Si le Japon allégua en apparence qu’il voulait préserver la paix en Asie orientale et l’indépendance de la Corée, il établit en revanche le cadre pour faire de la Corée son protectorat en signant le « protocole coréano-japonais[A1]» (Han-Il ŭijǒngsǒ). Sans même avoir obtenu l’approbation de Kojong, il contraignit par la force la Corée à signer le « traité d’ŭlsa » (ŭlsa nŭgyak[A2]), et il déposséda le gouvernement coréen de ses privilèges diplomatiques et de sa souveraineté intérieure en établissant la résidence générale de Corée (cor. T’onggambu, jap. Tōkanfu). L’empire du Grand Han perdit alors son statut de pays indépendant sur la scène internationale.

 

당시 조약의 불법성을 지적하는 논의는 상소운동이나 외교교섭 무력 의병항 쟁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문명개화론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통감 치하의 보호정치를 곧바로 식민지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의 보호 아래 개명진보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들도 근대개혁이라는 명분하에 입헌의 필요성과 정치체제 변혁을 거론하기는 했다. 당시 헌정연구회 나 대한협회는 국가유기체설에 기반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의 주장이 개인의 권리 시민과 부르주아의 이해에 기초한다기보다는 국가주권 혹은 군주권을 우선시한다는 점이었다 (유치형  헌법  1-4 편). 이런 논리는 위정척사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인석은 우주문답宇宙問答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침략을 비판하면서도 국가정치체제로서는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전제군주권의 강화를 주장했다 이들은 대한제국의 실권이 현실적으로 통감을 매개로 일본천황과 제국주의에 가 있는데도 고종이 나 순종을 대상으로 군주권을 강화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는 허구화된 대한제국의 허상을 좇는 것이었다. 결국 일제의 보호정치를 극복할 근대 국민국 가상을 제기하지 못한 상황에서 완전한 식민지라는 병합의 길이 점차 가시화되 고 있었다. 

 

Les débats sur le caractère illégal du traité se développèrent à cette époque sous des formes diverses, à savoir des mémoires au trône, une ingérence au niveau diplomatique et même une résistance militaire avec les armées de la justice (ŭibyǒng). La plupart des intellectuels, à commencer par les partisans de l’ouverture à la civilisation[A3], n’interprétèrent pas immédiatement cette politique du protectorat sous l’autorité de la résidence générale comme synonyme de colonisation. Ils croyaient, semble-t-il, que des progrès étaient possibles sous la protection du Japon. Ils évoquaient également la nécessité d’un [régime] constitutionnel et la refonte du système politique sous couvert de réformes vers la modernité. La société pour l’étude d’un gouvernement constitutionnel[A4] (Hǒnjǒng yǒn’guhoe) et l’Association du Grand Han (Taehan hyǒphoe) voulaient alors mettre en place une monarchie constitutionnelle en se basant sur leur vision organique de l’État. Le problème résidait cependant dans leurs revendications qui accordaient une prééminence à la souveraineté de l’État au lieu de se fonder sur les droits individuels et une compréhension des citoyens et des bourgeois (Yu Ch’ihyǒng, Hǒnbǒp, partie 1-4). Ce raisonnement était identique à celui des partisans du wijǒng ch’ǒksa. Dans ses Questions et réponses sur l’univers (Uju mundap 宇宙問答), Yu Insǒk se faisait l’avocat d’un renforcement de la monarchie absolue et s’opposait aux formes de régimes constitutionnel ou républicain, tout en critiquant l’invasion de la Chine par les puissances impérialistes. [Les tenants de ces discours] soutenaient un renforcement de l’autorité du souverain, qu’il s’agisse de Kojong ou de Sunjong, et nonobstant le fait que le pouvoir se trouvait en réalité entre les mains de l’empereur japonais et des impérialistes nippons, par l’intermédiaire du résident général. Cela revenait à courir après l’illusion d’un empire fictif du Grand Han. L’annexion, autrement dit la colonisation pure et simple, se profila finalement de manière graduelle dans une situation où la Corée était incapable de se présenter sous les traits d’un État-nation moderne et de se défaire de la politique japonaise du protectorat.

 

19세기 중반 이후  20세기 초까지 한국사회는 자주독립국가를 쟁취하지 못한 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해 있었다. 당시 국제질서와 국체 정체 인식의 근본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논자들은 만국공법의 제국주의 적 논리를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속국과 보호국 증공국의 차이를 준별하지 못했다. 또한 국체 논의에서도 입헌군주제와 공화제를 채택 가능한 제도로 간주하지 못하고 대부분 군주제만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최근의 연구에 서는 조선왕조적 입장에서 제기된 황제권 강화 논리를 민권을 보장하는 개혁논리로 취급하는 민국民國체제 이념이 주장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근대 국가주권을 확립하려는 국민국가 입헌 논의의 중요성은 주목받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민중들의 정치경제적 지위 보장 특히 정치참여가 필수불가결하다는 시각이 간과되었던 것이다. 이런 시각을 확립할 수 있을 때에야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함과 동시에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한국사회가 이제  입헌공화국 이라는 근대 국민국가 단계로 진전했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Du milieu du XIXe au début du XXe siècle, la société coréenne tomba dans le giron de l’impérialisme japonais, dont elle devint une colonie, et sans parvenir à développer un État indépendant et autonome. Il est impossible de passer sous silence les problèmes fondamentaux que furent à cette époque l’ordre du monde et la perception d’une identité nationale. Les différents acteurs des polémiques n’étaient pas en mesure de saisir concrètement la logique impérialiste des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et ils n’étaient pas capables non plus de faire une distinction nette entre un pays vassal (sokkuk), un pays protégé (bohoguk) et un pays tributaire (chŭnggongguk). La plupart d’entre eux pensaient en outre que la monarchie était le seul régime politique valable, et ils ne considéraient nullement la monarchie constitutionnelle et la république (konghwaje) comme d’autres formes de systèmes possibles. Une étude récente a montré comment l’idée d’un système républicain (min’guk 民國) s’était également fait jour et avait envisagé le renforcement de l’autorité impériale du Chosŏn comme équivalent à une réforme garantissant les droits des citoyens. Mais là encore, la nécessité de débats constitutionnels sur un État-nation moderne désireux de consolider ses droits souverains fut loin de retenir toute l’attention des Coréens. Mais plus que tout, c’est bien un angle d’approche essentiel qui fut laissé de côté : celui de la garantie du statut politique et économique des gens du peuple, et plus précisément la participation aux affaires politiques, qui est une condition préalable à la construction de tout État moderne. On peut dire avec certitude que la société coréenne n’est finalement parvenue à l’étape de l’État-nation moderne qu’en instituant une « république constitutionnelle » (ip’ǒn konghwaguk) grâce au mouvement du 1er mars 1919, et après s’être recentrée sur cet angle d’approche, tout en critiquant le discours sur la modernité coloniale japonaise. 

 

Notes

  1. ^ Protocole signé le 23 février 1904.
  2. ^ ŭlsa nŭgyak, que nous n’avons pu traduire de manière exacte dans le texte, désigne littéralement le « traité signé sous la contrainte de l’année ŭlsa (1905) ». Cette expression est parfois utilisée en Corée à la place du plus neutre « ŭlsa choyak », c’est-à-dire le « traité l’année ŭlsa ».
  3. ^ « Ouverture à la civilisation » est la traduction de munmyǒng munhwa, un concept que l’on retrouve également au Japon (bunmei kaika) pour désigner le mouvement d’occidentalisation à l’ère Meiji.
  4. ^ Société établie en 1905 à Séoul et refondue l’année suivante dans la société de l’auto-renforcement (Taehan chaganghoe).
 

Autour du texte: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