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e original : 10. 개화사상과 근대국가 건설론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19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봉건적 사회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제국주의 열강에 문호를 개방했다 서구열강을 비롯 청국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책동을 강화했다. 국권의 위기가 심화된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여러 계급의 개혁운동 이 전개되었다 초기에는 일본을 매개로 한 서구문명 수용 여부를 놓고 견해가 대립되었지만  1880년대 후반 이후 조선왕조국가를 근대국가로 개편하는 문제 즉 대내외적 국가주권의 확정 여부를 초점으로 논전이 전개되었다. 

1860-70년대 서구문명 수용 논쟁 : 척사론과 개국론

 

서구문명 수용을 둘러싼 대립은 1860년대 대원군 정권 시기 쇄국정책을 둘러싼 논의에서 시작되었다 척사론斥邪論은 정권 내에서만이 아니라 재야 노론老論 유생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기정진奇正鎭은 서양과의 교류뿐 아니라 양물洋物 자체를 철저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이항로李恒老는 주전설主戰說을 내세워 양적洋賊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논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서양이 중화中華나 소화小華 (조선)를 침범하는 것은 사邪가 정正을 이기고 신臣이 군君을 능멸하고 땅이 하늘에 항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화서집 권10   ‘존중화 하’) 그는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에 의거했기 때문에 여전히 중국 중심으로 계서적으로 편성되는 차별적 국제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논리는 김평묵金平默 에게 이어져 존화양이尊華攘夷 의 논리로 나아갔다. 척사론은 단지 주자 성리학 이라는 학적 도덕적 입장에서만 주장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서양과의 교류에 따른 경제침탈을 크게 우려했다. 이항로의 주장처럼 유한한 농산품과 서양 공산품의 교역이라는 불평등한 무역관계는 국내 생산기반의 몰락과 농민층의 분화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척사위정론斥邪爲政論은 대원군 정권 의 척화론斥和論과는 또 다른 보수적 내수외양책이었다. 

 

한편 문호개방을 적극 고려하면서 국가 자강책을 강구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박규수朴珪壽는 1870년대에 자주적 개국통상론을 주장했다.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 등은 당시 청의 양무사상가인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등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해방론海防論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양과의 수교를 주장했다. 이후  개항통상론은 1876년 당시 일본 운요호雲揚號 사건 처리를 둘러싸고 문호개방 논쟁이 일어났을 때 채택가능한 방안으로 부각되었다. 물론 이때도 개항 반대론이 제기되었다. 최익현崔益鉉은 일본은 원래 양적의 앞잡이이고 서양과 같다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민씨 척족정부는 전격적으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한 뒤 1880년 6월 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조선책략朝鮮策略과 이언易言을 받아들였다. 이어 정부는 청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근대화정책을 조사했고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은 일본의 근대화 실상을 담은 공식보고 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분위기가 크게 바뀌는 가운데 조선왕조국가의 개방책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다.   년  월 척사운동은 조선책략에 나타난 외교정책을 비판했다 척사론은 미국 청국 일본 등 주변 국가와의 교섭확대와 동맹을 주장하는 논리에 반대하면서 러시아 미국 일본이 모두 같은 오랑캐라는 입장을 재확인하 고 유입된 서양 상품과 서적을 소각하고 신설된 정부기관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 衙門을 혁파하라고 했다. 반면 개화를 주장하는 상소도 있었다. 곽기락郭基洛 윤선 학 같은 논자들은 삼강오륜이 천부의 변함없는 이치로서 도道이며 선박 농기계 와 같이 편민이국便民利國을 위한 것은 기器라고 규정했다. 이른바 도기분리道器分 離 와 서기수용西器受容 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문호개방 찬성론자들은 기본적 으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의 입장을 취했으므로 서양 정치제도의 수용으로까 지 나아가지는 못했고 서양 선진기술을 수용하는 데 머물렀다. 

1880년대 국제적 지위 논쟁 : 독립론과 속방론

 

1880년대 초 조선 정부는 청국의 후원 아래 외국세력을 끌어들여 세력균형 속에서 독립을 지키려 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서구 여러 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은 조선을 자국의 속방屬邦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종주권宗主權을 요구했다. 조선 은 구미열강과 형식적으로는 평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도 청의 정치적 간섭을 감수하고 경제이권을 침탈당하는 양절체제兩截體制를 강요받고 있었다. 당시 국제질서의 준거 틀로 소개된 것은 만국공법萬國公法이었다. 만국공법 은 단순히 조약과 통상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특히 조선왕조국가의 국제적 지위뿐만 아니라 내정에서의 권한도 종래와 다르게 규정됨을 의미했다 당시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는 이전의 개항통상론이나 서기수용론의 차원을 넘어 청으로부터의 독립과 서구적 근대개혁을 추진했다 그것이  1884년 갑신정변이었다. 

 

당시 현안은 조선왕조국가가 청의 속방인가 혹은 증공국贈貢國으로서 독립국 가인가 여부였다 원세개袁世凱는 1886년 조선대국론朝鮮大局論에서 조선을 부용지국附庸之國으로 간주했다. 이는 속방 속번屬藩 번복藩服 등의 용어와 상통하는데 조선이 비록 내정에서는 자주국이지만 외교관계에서는 중국의 보호를 받는 예속관계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1888  년 2월 데니德尼 는 청한론淸韓論에서 번속 속방 속국까지 조공국朝貢國으로 규정할 수 있으므로 조선국가의 주권은 전혀 손상당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유길준兪吉濬도 국권 이라는 글에서 국권의 두 가지 측면을 설명했다. 하나는 내용주권內用主權 으로 일체의 정치와 법령이 그 나라의 전장典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외용주권外用主權으로 각국 간에 독립과 평등의 예로서 외국과 교섭한다고 했다 (유길준전서 IV국권). 만국공법이 규정한 내공법內公法과 외공법外公法 을 재해석한 것이었다. 실제로 만국공법은 소국들의 국가적 지위를 자주지국과 반주지국 保護國  병번 屬邦 등으로 구분하고 반드시 서구열강의 국제적 공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만국공법 권1  제 5절   주권분내외) 유길준은 만국공법의 국제질서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약소국 조선의 위상을 더 정확히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조선이 독립국가도 속국도 아닌 이상 타국의 보호를 받는 수호국守護國 공물을 바치는 증공국의 주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유길준은 비록 증공국이라도 독립자주국 같이 외국과의 교섭이나 국내 자주권에 전혀 관여 받지 않는다는 점을 밝혔다. 이어 그의 문제의식은 내적으로 국가의 자주권을 어떻게 관철시킬 것인가 하는 것 곧 근대국가로서의 국체와 정체수립 문제로 옮겨갔다.

대한제국 국체 논쟁 :군민공치론과 황제권 강화론

 

유길준은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조선왕조의 국체인 군주권을 변경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서유견문 제5편 정부의 시초 )  하지만 현존의 국망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전제군주권에 의한 정치체제를 변통해야 하며 그 대안으로 서구의 정치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각국의 정부형태를 5가지로 나누어 전제군주제와 압제정 귀족정  군민공치 그리고 공화정으로 규정했다. 그중에서도 군민君民이 공치共治하는 것 특히 영국식 입헌정치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간주했다. 군민공치란 원래 서구의 입헌군주제를 번안한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길준은 서구 근대국가처럼 입법 행 정 사법 3권분립으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의민주주의적 의회제도의 도입이나 입헌정치의 중요성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급속 한 근대개혁을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는 개혁관료집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1894년 갑오개혁기에는 실제로 김홍집 유길준 등 개혁관료들이 현존 조선왕 조의 국가질서를 크게 변경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개혁관료들의 정치적 주도권 을 둘러싼 논쟁이 거듭되는 가운데 내각관제의 법제규정과 운영방식에서 나타났듯이 군주권과 민중의 여론이 배제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또한 갑오정 권은 일본이 개입해서 수립된 정권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근대적 개혁이 추진될 수록 일본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되었다. 결국   1895년 8월 왕후 민씨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갑오정권은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  1895년 말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통해 대조선제국으로 국체변경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1897년 5월 전직 관료와 유생 및 개신유학 계통의 지식인들은 새로이 칭제상소운동을 벌였다. 특히 정교鄭喬는 조선의 독자적인 정통론적 역사인식에 근거하여 단순한 칭제가 아닌 황제즉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황제 없이는 독립도 없다고 하면서 일반인의 인식을 고취시켰다. 하지만 독립협회 측의 윤치호尹致昊 등은 칭제는 이름뿐이라고 비판했다. 최익현 유인석柳麟錫 등 위정척사 계열 유생들은 군주전제를 옹호하면서도 중화사상과 주자학적 명분론에 의거해 칭제를 반대했다. 월 정부관인 중 농상공부협판 권재형權在衡 은 만국공법 조항을 들어 자주국은 스스로 존호를 세우고 만국과 함께 평행지권平行之權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서원일기 건양  2년  8월  29일) 이런 여론공세 속에서  10월에 대한제국이 정식출범했다. 대한제국은 대외적으로 국가주권 확보를 만방에 과시하고 러 일 양국 간 중립의지를 표명하는 한편 대내적으로 군주권의 제한론을 배격하면서 황제권 강화를 추구했다. 

 

이에 대해 독립협회도 전제황권의 공고화를 통해 개혁입법을 추진하는 한편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적 기능을 갖게 하고 의정부를 견제하는 기구로 만들고자 했다. 독립협회는 황제권 아래 의결권과 행정권을 분립시키되 민권을 정치적으로 반영하면서 궁극적으로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대한제 국은 이런 독립협회의 운동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만민공동회나 박영효 등의 권력장악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결국 1899년 8월 대한제국은 대한국국제 大韓國國制 를 반포했다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모두 군주에게 집중시켜 전제군 주권을 성문법적으로 확립한 것이다. 이제 황제는 근대개혁을 주도하는 주체로 규정되었으며 광무양전사업光武量田事業을 비롯한 일련의 대내외적 개혁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체에는 대한제국 국민으로서 신민들이 갖는 권리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이 없었다. 또한 대한제국은 공법에 의거해 독립국가로서의 외교관계를 천명했을 뿐 경제적 차원의 독립국가를 확보하기 위해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대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1905년 이후 보호국의 위상과 입헌군주제 논쟁

 

1904년 2월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켜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정치적 지배기반 구축에 착수했다. 일본은 표면적으로 동양평화와 한국의 독립 보전을 내세웠지만 한일의정서 를 체결하여 보호국의 틀을 만들려고 했다. 1905년 10월에는 고종의 비준을 받지 못했는데도 강제로 을사늑약 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함으로써 내정의 자주권도 강탈했다. 이제 대한제국은 독립국가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당시 조약의 불법성을 지적하는 논의는 상소운동이나 외교교섭 무력 의병항 쟁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문명개화론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통감 치하의 보호정치를 곧바로 식민지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의 보호 아래 개명진보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들도 근대개혁이라는 명분하에 입헌의 필요성과 정치체제 변혁을 거론하기는 했다. 당시 헌정연구회 나 대한협회는 국가유기체설에 기반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의 주장이 개인의 권리 시민과 부르주아의 이해에 기초한다기보다는 국가주권 혹은 군주권을 우선시한다는 점이었다 (유치형  헌법  1-4 편). 이런 논리는 위정척사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인석은 우주문답宇宙問答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침략을 비판하면서도 국가정치체제로서는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전제군주권의 강화를 주장했다 이들은 대한제국의 실권이 현실적으로 통감을 매개로 일본천황과 제국주의에 가 있는데도 고종이 나 순종을 대상으로 군주권을 강화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는 허구화된 대한제국의 허상을 좇는 것이었다. 결국 일제의 보호정치를 극복할 근대 국민국 가상을 제기하지 못한 상황에서 완전한 식민지라는 병합의 길이 점차 가시화되 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20세기 초까지 한국사회는 자주독립국가를 쟁취하지 못한 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해 있었다. 당시 국제질서와 국체 정체 인식의 근본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논자들은 만국공법의 제국주의 적 논리를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속국과 보호국 증공국의 차이를 준별하지 못했다. 또한 국체 논의에서도 입헌군주제와 공화제를 채택 가능한 제도로 간주하지 못하고 대부분 군주제만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최근의 연구에 서는 조선왕조적 입장에서 제기된 황제권 강화 논리를 민권을 보장하는 개혁논리로 취급하는 민국民國체제 이념이 주장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근대 국가주권을 확립하려는 국민국가 입헌 논의의 중요성은 주목받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민중들의 정치경제적 지위 보장 특히 정치참여가 필수불가결하다는 시각이 간과되었던 것이다. 이런 시각을 확립할 수 있을 때에야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함과 동시에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한국사회가 이제  입헌공화국 이라는 근대 국민국가 단계로 진전했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