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de traduction : 17. 1970년대 청년문화론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Texte original:

1970년이 되자 대학가에서는 학생운동이 침체한 가운데 통기타 - 블루진 (청바 지) - 생맥주 (이하 '통 - 블 - 생' )로 대표되는 생활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편 1968년 세계 곳곳에서 분출한 학생운동의 열기와 함께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서의 대규모집회, 워싱턴 - 뉴욕에서의 반전시위에서 보인 미국 청년들의 힘은 국내 식자층의 관심을 끌었다. 학생운동의 파고가 국내와 국외에서 상반된 경향을 보이는 가운데, 우리 젊은이들의 이른바 '퇴폐적'인 생활양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청년문화, 청춘문화

 

1970년 "세대" 2월호에 실린 남재희의  "청춘문화론" 은 이 문제를 최초로 공식거론한 대표적인 글이다. 이 글에는 이후 전개된 청년문화론의 중요논점이 소박한 형태로 망라되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의 대학생운동이 부진한 이유를 학생운동이 민주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통념적 진리'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기반은 한국 학생운동이 폭넓은 사회적 지지를 받거나 운동이 범汎학생적 차원으로 전개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이 기반으로 인해 운동이 지나치게 획일화되고, 통념적 진리를 벗어나는 것을 비판하기만 하는 소극적 운동에 머무르게 된 것은 부정적인 면이라고 보았다. 선진 외국의 경우 통념적 진리가 사회적으로 거의 실현되었기 때문에 학생운동 은 오히려 통념적 진리를 부정하고 새로운 이념을 내세우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이 형성하는 문화가 바로 '청춘문화' 혹은 '청년문화'라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통념적 진리는 '근대적 가치'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이 민족 문제나 민주주의 문제가 아직 실현되지 못한 사회이며, 따라서 학생운동은 이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가치에 기반한 학생운동은 앞서 언급한 획일성과 소극성으로 인해 침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현상태에서 학생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청년문화인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를 선도하는 대학문화조차 취약하기 때문에 청년문화는 형성되 어 있지 않았다. 다만 씨앗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의 기타 붐이나 조영남趙英男 등의 인기, 재즈음악, 전혜린田惠麟 문학 등을 외국 청년문화의 특징과 유사한 것으로서 주목했다. 

 

대중문화는 청년문화인가

 

그러나 당시 청년문화 논의는 몇 편의 글이 산발적으로 발표되는 데 그쳤다. 1973년 말 청년문화 전반을 다룬 한완상韓完相의 « 현대사회와 청년문화 »(법문사, 1973)가 나왔을 때도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청년문화 논쟁에 불을 지핀 것은 "동아일보" 문화면(1974.3.29)의 ‘오늘날의 젊은 우상들’이라는 제목의 기획기사였다. 이 기사는 최인호崔仁浩, 양희은楊姬恩, 김민기金民基를 포함하여 인기 있는 젊은 작가, 팝송가수, 코미디언 등 6명을 '우상'으로 선정했다. 논전의 불씨를 던진 장본인인 김병익金炳翼 기자는 논쟁 사후에 이를 정리하는 글 « 청년문화와 매스컴 »(1974.11)에서 당시의 기획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유신선포 이후 무력감과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1974년 초, 대학가에서는 통 - 블 - 생과 고고춤이 젊은이들의 생태로 자리잡았는데 사회 일각에서는 이를 '퇴폐적'이라고 비난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나 반전시위에서 나타난 미국 젊은이들의 자기표현 양태를 관찰한 김병익은 우리 젊은이들의 이런 생태를 적극적으로 이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젊은이들의 생태를 바라보는 기존 의 시각을 넘어서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점에 유의했다. 첫째, 열심히 공부하고 모범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기성세대가 젊은이에게 요구하는 덕목으로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 둘째, 그런 덕목은 결국 일부 일류 대학생에게만 국한되고 2,3류 대학이나 재수생, 대학에 가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엘리트문화로 귀속된다는 점이었다.

 

통 - 블 - 생과 우상을 중심테마로 삼으면서 그가 중요시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세대의식이나 정서는 무의식적으로 수행되는 풍속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는 다분히 문화인류학적 접근법을 채택했다. 둘째, 가장 비난받고 있는 젊은이들의 생태를 이해하고 나아가 그 미덕을 밝혀낼 때만이 그들이 가진 정치 - 사회적 액티비즘 (역동성)도 승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학을 중심으로 한 젊은층의 새로운 양식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려 했다는 점에서 남재희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그보다 한 단계 진전된 면모를 보였다. 즉 청년문화를 대학생이 아닌 경우도 포함하는 대중적 차원에서 설정하고 있음이 더욱 명확해졌고, 젊은 세대의 생각과 정서를 풍속과 같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접근하려 했다는 점에서 문화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고도 할 수 있다. 또 이것을 대학생의 정치 - 사회적 행위와 결부시키려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말하자면 그동안 정치 사회적 역동성을 보여온 대학생들의 저항적 에너지가 바야흐로 통 - 블 - 생으로 상징되는 생활문화 방면으로 분출하고 있음을 적극 포착하고, 여기에서 한국의 학생운동, 나아가 청년문화 의 장래를 희망적으로 보려 했던 것이다.

 

이 기획은 김병익도 인정했듯이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논쟁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젊은이들의 행동양식을 '퇴폐적'으로 바라보던 기성세대의 선입관 에 주의를 환기시킨 점은 기획이 애초에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그는 대학생들과 대학신문이 자신의 기사에 격심하게 반발하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의 기획에 서는 대학생들과 그들의 일상이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이해해야 할 대상이자 새로운 시대의 희망적 주체로 전제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이 등을 돌린 셈이다. 대학신문들은 일제히 "딴따라문화가 우리 우상이란 말이냐"라는 논조로 공격 했고, 이후 논쟁의 주요한 대립구도는 "동아일보"를 포함한 일간지와 대학신문 사이에 형성되었다. 

 

그는 자신의 기사가 제한된 지면 때문에 설명이 불충분했고, 대학에는 정치적 - 문화적 획일주의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가 대학생을 비롯한 청년 독자층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확실히 "지금 대학생들이 저항해야 할 가장 큰 적은 문화적 획일주의" 라는 그의 통찰은 예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재희의 용어를 빌면, '통념적 진리'조차 달성되지 않은 사회에서 통 - 블 - 생의 강조는 대학생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갔을까. 기사는 문화라는 매개물을 통해서나마 과연 그들로 하여금 현실적 책무를 깨닫게 하고 추동시킬 수 있었을까. 자신들이 가진 강한 정치 - 사회적 의식 때문에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대학문화를 주도하던 엘리트들은 청년문화론의 합리적 핵심마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선량한 의도를 오독한 것과는 달랐다. 김병익은 이 점을 주목하고 역사 - 사회적으로 이해했어야 했다. 

 

대학가의 반발은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의 청년문화 특집 서문인 ‘지금은 진정한 목소리가 들려야 할 때다’(1974.6.3) 에서 잘 드러난다.  글은 청년문화론 에 대한 강한 비판과 민족주의적 논조로 일관되어 있었다.  청년문화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기는 하되 실체가 없는 도깨비에 비유되었다. 또한 제각기 정통을 자처하고 나선 '도깨비문화의 기수'들과,  이를 규명하기 위해 나선 '사회과학 탤런트'들로 인해 '청년문화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형성되었다고 비난했다. 이 글에 따르면, 결국  청년문화라는 용어는 사회풍토가 완전히 이질적인 외국의 도식을 이 땅에 억지로 적용한 것이며 '빠다에 버무린 깍두기'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통 - 블 - 생은 대학문화의 정통에서 벗어난 비주류에 불과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한완상의 ‘현대 청년문화의 제문제’(신동아, 1974,6) 는 청년문화 논의를 종합한 본격적인 논문이었다. 여기서 그는 청년문화론의 기초 개념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대학생들이 보였던 반응도 자신의 시각에서 분석했다. 그는 청년문화를 젊은 인텔리겐치아에 의해 주도되는 문화로 규정함 으로써 그 주체를 분명히 했고, 그 성격을 대항문화로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대학생의 도전대상이 정치사회구조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한국처럼 역사 단축 과정을 겪은 곳에서는 대항할 만큼 제대로 형성되어 있는 문화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학생들이 왜 문화론 자체에 대해 무지하거나 청년문화론에 그토록 거부감을 가졌는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정치사회구조에 대한 대항운동은 있되, 대항문화 혹은 청년문화는 없는 것일까. 한완상은 없다고 했다 중등교육의 타율적 성격과 아직도 사회에 팽배한 유학적 가치관 때문에 대학생을 비롯한 한국 청년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형성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것이 아동문화 및 성인문화와 구별되는 청년문화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대학가의 통 - 블 - 생은 서양 저항문화의 표피만 들어온 것이었다. 그 아래로 창조적 저항정신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를 그와 같이 자각적 차원에 국한해서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한완상이 문화를 저항과 도전으로 개념설정할 때부터 이런 문제는 내재되어 있었다. 한완상의 문화 개념은 지나치게 관찰자적 시각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청년대중도 자신들의 문화행 위가 갖는 저항적 혹은 순응적 의미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서로 매우 닮은 것은 아닐까. 청년문화론의 선두에 섰던 최인호가  ‘청년문화선언’(한국일보, 1974. 4. 24)에서 « 문화는 생활 그 자체이지 선택된 개념이 아니다. 그들을 욕하기 전에 한번 가서 밤을 새워보라 » 고 한 것은, 자신들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질타한 말은 아니었을까. 김병익이 « 연구자의 대부분이 정치학 - 사회학 계통이어서 문화라는 개념의 직관적 파악이 훨씬 가능한 인문학 문학 관계자와 거의 상반된 입장과 관점을 취하고 있었 »음 을 지적한 것도 한완상의 문화론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상의 논의를 살펴보았을 때, 1970년대 전반의 청년문화론 논쟁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청년문화론은 두 가지 새로운 사건, 즉 국내에서 통 - 블 - 생현상이 나타나고 외국에서 청년 학생들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상황이 서로 교차하면서 생성된 담론이었다. 청년문화론이 일단 제기되자 1974년부터 본격화된 논쟁은 통 - 블 - 생현상과 청년문화론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전자의 의미성 여부와 후자의 실체성 유무를 둘러싸고 논점이 각각 형성된 것이다. 남재희와 김병익이 양자를 각각 긍정하고 양자의 관계를 밀접한 것으로 바라보았다면, 대학신문의 논조는 통 - 블 - 생을 의미 있는 현상이 아니라고 보았고 문화의 범주에 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청년문화론 자체도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한완상은 청년문화론의 담론적 유용성에 착목하고 한국에서 그것의 형성방향을 모색했지만 통 - 블 - 생을 청년문화로 보는 데는 부정적이었다. 

 

 

다시 보는 청년문화론

 

청년문화론에 대한 열띤 논의는 1974년 여름을 지나면서 아무 결론도 방향제 시도 없이 이내 잦아들었다. 문학이나 사회과학 방면 전문가들의 학문적 논의로 그쳤을지도 모르는 청년문화론이 세간의 이목을 받고 사회적 논쟁으로 확산된 데는 매스컴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저널리즘의 상업적 관심이 논쟁의 출발은 아니었다. 문화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오히려 청년문화론 담론에는 두 가지 합리적 핵심이 내재되어 있었다. 하나는 인식론 차원의 문제제기였다. 즉 문화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은 의식적인 것인가 무의식적인 것인가 등을 둘러싼 질문이었다. 또 하나는 문화적 저항의 정치사회 적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정치사회적 저항과 문화적 저항은 어떻게 다른가, 그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보면, 애초 청년문화 론은 학생운동의 침체에 대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침체의 현실정치적 여건이 충분히 논의될 수 없는 상황에서 청년문화론에 대한 기사가 점차 젊은이들의 '퇴폐적' 생태 위주로 흐르게 되어 혼란이 가중된 면도 컸다. 

 

청년문화 논의가 생산적으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사라진지   30년을 훌쩍 넘겼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는 청년문화론 논쟁의 최대쟁점이 결국 문화에 대한 상이한 이해를 둘러싸고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또 하나 논의 당사자들이 줄곧 의식한 것은 비동시적 동시성, 즉 세계의 시간과 한국 시간 사이의 불일치였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1968년 서구 학생운동에서 드러난 새로운 가치와 한국 학생운동의 민족주의 이념 사이의 차이였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문화'와 '비동시적 동시성'이 여전 히 화두로 주목된다면, 그 시원으로서 1970년대 초의 청년문화론 논쟁은 다시금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Traduction(s)

La controverse sur la culture des jeunes des années 1970

Texte original

Traduction

1970년이 되자 대학가에서는 학생운동이 침체한 가운데 통기타 - 블루진 (청바 지) - 생맥주 (이하 '통 - 블 - 생' )로 대표되는 생활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편 1968년 세계 곳곳에서 분출한 학생운동의 열기와 함께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서의 대규모집회, 워싱턴 - 뉴욕에서의 반전시위에서 보인 미국 청년들의 힘은 국내 식자층의 관심을 끌었다. 학생운동의 파고가 국내와 국외에서 상반된 경향을 보이는 가운데, 우리 젊은이들의 이른바 '퇴폐적'인 생활양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A l’aube de l’année 1970, dans le milieu étudiant, sur fond d’étiolement des mouvements politiques, un nouveau mode de vie a commencé à apparaître, représenté par le Guitare-Bluejean-Bière (dans la suite du texte, GBB). Parallèlement, avec la ferveur des mouvements d’étudiants qui ont émergé dans de nombreux endroits du monde en 1968, le grand rassemblement du Festival de Woodstock de 1969, la virulence des jeunes américains dans les manifestations contre la guerre du Vietnam à Washington et à New York, ont attiré l’attention des intellectuels coréens. Alors que ces mouvements d’étudiants montraient des tendances opposées en Corée et à l’étranger, certains se demandaient sérieusement quoi penser de ce mode de vie vu comme « dégradant » des jeunes Coréens.

 

 
 

Texte original

Traduction

청년문화, 청춘문화

 

1970년 "세대" 2월호에 실린 남재희의  "청춘문화론" 은 이 문제를 최초로 공식거론한 대표적인 글이다. 이 글에는 이후 전개된 청년문화론의 중요논점이 소박한 형태로 망라되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의 대학생운동이 부진한 이유를 학생운동이 민주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통념적 진리'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기반은 한국 학생운동이 폭넓은 사회적 지지를 받거나 운동이 범汎학생적 차원으로 전개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이 기반으로 인해 운동이 지나치게 획일화되고, 통념적 진리를 벗어나는 것을 비판하기만 하는 소극적 운동에 머무르게 된 것은 부정적인 면이라고 보았다. 선진 외국의 경우 통념적 진리가 사회적으로 거의 실현되었기 때문에 학생운동 은 오히려 통념적 진리를 부정하고 새로운 이념을 내세우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이 형성하는 문화가 바로 '청춘문화' 혹은 '청년문화'라는 것이었다.

Culture des jeunes, culture de la jeunesse

 

Le texte « De la culture de la jeunesse » de Nam Chae-Hi, paru dans le numéro de février 1970 de la revue Génération est un texte notable qui aborde ce thème pour la première fois dans l’espace public. Dans ce texte, tous les éléments principaux des débats sur la culture des jeunes qui s’en sont suivis se trouvent réunis en raccourcis. L’auteur attribue la raison du peu de mouvements étudiants au fait que ceux-ci se fondaient sur des ‘valeurs générales’ comme la démocratie ou le nationalisme. Cette base a contribué à ce que les mouvements étudiants connaissent une grande adhésion sociale et à ce qu’ils se développent dans tout le milieu étudiant. Mais cette base trop large a aussi un aspect négatif, car elle a entraîné une uniformisation excessive de ces mouvements et les a maintenus à un niveau défensif, ne servant qu’à critiquer les déviances envers ces valeurs. Selon l’auteur, dans les cas des pays développés, la démocratie étant presque réalisée dans la société, les mouvements d’étudiants en venaient à la nier et proclamaient une nouvelle idéologie. La culture formée dans ce processus est justement la ‘culture de la jeunesse’ ou la ‘culture des jeunes’.

 

그가 말하는 통념적 진리는 '근대적 가치'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이 민족 문제나 민주주의 문제가 아직 실현되지 못한 사회이며, 따라서 학생운동은 이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가치에 기반한 학생운동은 앞서 언급한 획일성과 소극성으로 인해 침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Les valeurs générales que l’auteur désigne peuvent se résumer à la ‘modernité’. Il savait pertinemment que la Corée était une société où la question nationale et démocratique n’était pas encore résolue et que, par conséquent, les mouvements d’étudiants s’efforçaient de les réaliser. Mais paradoxalement, ces mouvements basés sur ces valeurs ne pouvaient que se tasser du fait de leur caractère uniformisateur et défensif mentionné plus haut.
현상태에서 학생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청년문화인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를 선도하는 대학문화조차 취약하기 때문에 청년문화는 형성되 어 있지 않았다. 다만 씨앗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의 기타 붐이나 조영남趙英男 등의 인기, 재즈음악, 전혜린田惠麟 문학 등을 외국 청년문화의 특징과 유사한 것으로서 주목했다.  Ce qu’il fallait, pour dynamiser les mouvements d’étudiants, était la « culture des jeunes ». Mais malheureusement, même la culture étudiante qui était censée la guider était très peu structurée, et la culture des jeunes était balbutiante : elle ne restait qu’à l’état de germe. Dans ce contexte, Nam Chae-Hi a trouvé des similitudes entre la culture des jeunes du monde occidental et les succès chez nos lycéens et étudiants, de la guitare, du chanteur Cho Yǒng-Nam, du jazz et de la littérature de Chôn Hye-Rin.
 
 

Texte original

Traduction

대중문화는 청년문화인가

 

그러나 당시 청년문화 논의는 몇 편의 글이 산발적으로 발표되는 데 그쳤다. 1973년 말 청년문화 전반을 다룬 한완상韓完相의 « 현대사회와 청년문화 »(법문사, 1973)가 나왔을 때도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청년문화 논쟁에 불을 지핀 것은 "동아일보" 문화면(1974.3.29)의 ‘오늘날의 젊은 우상들’이라는 제목의 기획기사였다. 이 기사는 최인호崔仁浩, 양희은楊姬恩, 김민기金民基를 포함하여 인기 있는 젊은 작가, 팝송가수, 코미디언 등 6명을 '우상'으로 선정했다. 논전의 불씨를 던진 장본인인 김병익金炳翼 기자는 논쟁 사후에 이를 정리하는 글 « 청년문화와 매스컴 »(1974.11)에서 당시의 기획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La culture populaire est-elle la culture des jeunes ?

 

La discussion sur la culture des jeunes a eu lieu seulement dans quelques articles publiés ici et là. Fin 1973, lorsque est publié l’article de Han Wan-Sang, « La société contemporaine et la culture des jeunes » traitant de l’ensemble de la culture de la jeunesse (ed. Pǒpmunsa, 1973), il n’a pas attiré une attention particulière. L’étincelle qui a enflammé le débat est l’article thématique intitulé « Les jeunes idoles d’aujourd’hui » paru dans les colonnes de la rubrique culture (29 mars 1974) du quotidien de droite Donga Ilbo. L’auteur a présenté comme ‘idoles’ six personnes, auteurs, chanteurs pop, et humoristes ayant du succès, dont Choe In-Ho, Yang Hi-Ûn, Kim Min-Gi. Le journaliste Kim Pyông-Ik, celui qui a mis le feu aux poudres, a écrit l’article « La culture des jeunes et les médias » qui synthétisait le débat quand tout s’est calmé. Il y a exposé comme suit son plan éditorial de l’époque.

 

유신선포 이후 무력감과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1974년 초, 대학가에서는 통 - 블 - 생과 고고춤이 젊은이들의 생태로 자리잡았는데 사회 일각에서는 이를 '퇴폐적'이라고 비난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나 반전시위에서 나타난 미국 젊은이들의 자기표현 양태를 관찰한 김병익은 우리 젊은이들의 이런 생태를 적극적으로 이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젊은이들의 생태를 바라보는 기존 의 시각을 넘어서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점에 유의했다. 첫째, 열심히 공부하고 모범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기성세대가 젊은이에게 요구하는 덕목으로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 둘째, 그런 덕목은 결국 일부 일류 대학생에게만 국한되고 2,3류 대학이나 재수생, 대학에 가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엘리트문화로 귀속된다는 점이었다.

 

Début 1974, dans l’ambiance générale d’impuissance et de défaitisme après la proclamation de la révision de la constitution, s’installaient le GBB et la danse gogo dans les milieux étudiants, mode de vie critiqué comme décadent par une partie de la société. Le journaliste Kim Pyông-Ik qui a observé le mode d’expression des jeunes américains dans le festival Woodstock ou dans les manifestations contre la guerre du Vietnam, a décidé de chercher à comprendre nos jeunes plus activement. Il a noté deux phénomènes pour aller plus loin que l’opinion générale : premièrement, bien étudier et avoir des comportements modèles est une exigence envers les jeunes de la part de la génération en poste et n’est pas quelque chose de nouveau ; deuxièmement, une telle vertu ne s’applique finalement qu’aux étudiants de la poignée des meilleures universités et pas à ceux fréquentant des universités de 2e ou 3e rang ou aux recalés du Bac, ni aux jeunes qui ont arrêté leurs études. Cela relève finalement de la culture d’élite.

 

통 - 블 - 생과 우상을 중심테마로 삼으면서 그가 중요시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세대의식이나 정서는 무의식적으로 수행되는 풍속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는 다분히 문화인류학적 접근법을 채택했다. 둘째, 가장 비난받고 있는 젊은이들의 생태를 이해하고 나아가 그 미덕을 밝혀낼 때만이 그들이 가진 정치 - 사회적 액티비즘 (역동성)도 승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Pour le journaliste, deux choses étaient importantes pour le GBB et les idoles qu’il a pris comme thème central. En premier lieu, l’approche anthropologico-culturelle selon laquelle la conscience générationnelle et le sentiment se révèle mieux dans les mœurs, pratiqués inconsciemment. En second lieu, ce n’est que quand on arrive à analyser le mode de vie des jeunes si critiqués et qu’on dévoile ses mérites qu’on peut reconnaître leur dynamisme politique et social.

 

그는 대학을 중심으로 한 젊은층의 새로운 양식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려 했다는 점에서 남재희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그보다 한 단계 진전된 면모를 보였다. 즉 청년문화를 대학생이 아닌 경우도 포함하는 대중적 차원에서 설정하고 있음이 더욱 명확해졌고, 젊은 세대의 생각과 정서를 풍속과 같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접근하려 했다는 점에서 문화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고도 할 수 있다. 또 이것을 대학생의 정치 - 사회적 행위와 결부시키려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말하자면 그동안 정치 사회적 역동성을 보여온 대학생들의 저항적 에너지가 바야흐로 통 - 블 - 생으로 상징되는 생활문화 방면으로 분출하고 있음을 적극 포착하고, 여기에서 한국의 학생운동, 나아가 청년문화 의 장래를 희망적으로 보려 했던 것이다.

 

Kim Pyông-Ik a eu la même perception du problème que Nam Chae-Hi dans le sens où il a tenté d’évaluer le nouveau mode de vie des jeunes du milieu universitaire. Mais il a approfondi davantage : il a considéré la culture des jeunes en tant que culture populaire, non limitée à celle des étudiants. Il a également tenté d’appréhender les idées et les sentiments de la jeune génération en termes d’un inconscient qui se manifeste dans les mœurs, ce qui présentait une nouvelle approche méthodologique de la culture. Il est aussi remarquable par sa tentative de relier ces phénomènes aux activités politiques et sociales des étudiants. En d’autres termes, il a saisi l’énergie de contestation étudiante qui s’exprimait jusqu’alors dans les mouvements politiques et sociaux et rejaillissait dorénavant dans la culture de la vie de tous les jours, symbolisée par le GBB. Il tentait de voir positivement l’avenir des mouvements d’étudiants, voire de la culture des jeunes dans son ensemble.

 

이 기획은 김병익도 인정했듯이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논쟁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젊은이들의 행동양식을 '퇴폐적'으로 바라보던 기성세대의 선입관 에 주의를 환기시킨 점은 기획이 애초에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그는 대학생들과 대학신문이 자신의 기사에 격심하게 반발하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의 기획에 서는 대학생들과 그들의 일상이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이해해야 할 대상이자 새로운 시대의 희망적 주체로 전제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이 등을 돌린 셈이다. 대학신문들은 일제히 "딴따라문화가 우리 우상이란 말이냐"라는 논조로 공격 했고, 이후 논쟁의 주요한 대립구도는 "동아일보"를 포함한 일간지와 대학신문 사이에 형성되었다. 

 

Comme il l’a reconnu, son projet n’a eu qu’un demi-succès. L’un des buts du projet était de mettre en garde contre les préjugés de ceux qui voyait le mode de vie des jeunes comme décadent. Mais il resta perplexe devant la réaction violente à son article de la part des étudiants. Dans son article, les étudiants et leur mode de vie étaient présentés avec intérêt et sympathie, en les considérant comme acteurs de la nouvelle génération. Et ce sont les mêmes qui lui ont tourné le dos. Les journaux étudiants l’ont critiqué unanimement : « la culture des saltimbanques est-elle notre idole ? ». Les axes d’opposition du débat ultérieur se sont creusés entre les quotidiens autour de Donga Ilbo avec les journaux étudiants.

 

그는 자신의 기사가 제한된 지면 때문에 설명이 불충분했고, 대학에는 정치적 - 문화적 획일주의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가 대학생을 비롯한 청년 독자층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확실히 "지금 대학생들이 저항해야 할 가장 큰 적은 문화적 획일주의" 라는 그의 통찰은 예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재희의 용어를 빌면, '통념적 진리'조차 달성되지 않은 사회에서 통 - 블 - 생의 강조는 대학생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갔을까. 기사는 문화라는 매개물을 통해서나마 과연 그들로 하여금 현실적 책무를 깨닫게 하고 추동시킬 수 있었을까. 자신들이 가진 강한 정치 - 사회적 의식 때문에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대학문화를 주도하던 엘리트들은 청년문화론의 합리적 핵심마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선량한 의도를 오독한 것과는 달랐다. 김병익은 이 점을 주목하고 역사 - 사회적으로 이해했어야 했다. 

 

Kim Pyôngik en a conclu que, faute de place, ses explications étaient insuffisantes et que le conformisme politique et culturel s’étant répandu à l’université, ses intentions n’étaient pas bien transmises au jeune lectorat, à commencer par les étudiants. En effet, quand il disait « l’ennemi le plus important des étudiants actuellement est l’uniformisation culturelle », il était clairvoyant. Cependant, en empruntant l’expression à Nam Chaehi, dans une société où même ‘les valeurs générales’ ne sont pas réalisées, comment les étudiants auraient-ils interprété la mise en avant du GBB ? L’article aurait-il pu leur faire prendre conscience de leur responsabilité par l’intermédiaire de la culture, et les faire bouger ? Les élites qui guidaient la culture estudiantine et les mouvements politiques grâce à leur forte conscience politique et sociale n’étaient pas prêtes à accepter l’analyse rationnelle de la théorie de la culture des jeunes. Il ne s’agissait pas de mal comprendre les intentions. Kim Pyôngik aurait dû le s’en apercevoir et le traiter sur le plan historique et social.

 

대학가의 반발은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의 청년문화 특집 서문인 ‘지금은 진정한 목소리가 들려야 할 때다’(1974.6.3) 에서 잘 드러난다.  글은 청년문화론 에 대한 강한 비판과 민족주의적 논조로 일관되어 있었다.  청년문화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기는 하되 실체가 없는 도깨비에 비유되었다. 또한 제각기 정통을 자처하고 나선 '도깨비문화의 기수'들과,  이를 규명하기 위해 나선 '사회과학 탤런트'들로 인해 '청년문화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형성되었다고 비난했다. 이 글에 따르면, 결국  청년문화라는 용어는 사회풍토가 완전히 이질적인 외국의 도식을 이 땅에 억지로 적용한 것이며 '빠다에 버무린 깍두기'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통 - 블 - 생은 대학문화의 정통에서 벗어난 비주류에 불과했다. 

 

Les réactions du milieu des étudiants sont bien visibles dans l’introduction du numéro spécial sur la culture des jeunes du journal des étudiants, « Il est temps qu’on entende une parole authentique » (1974.6.4). Les critiques de la controverse sur la culture des jeunes et le ton nationaliste parcouraient tout le texte. Le terme « culture des jeunes » était comparé à une chimère, un terme qu’on rencontre dans la société mais qui n’avait pas de réalité. L’article couvrait de sarcasmes les ‘porte-drapeaux de la culture fantôme’, et les ‘vedettes des sciences sociales’ qui enquêtent sur le phénomène, et disait qu’à cause d’eux, on vit dans une « époque des Royaumes combattants de la culture des jeunes ». Selon cet article, l’expression ‘culture des jeunes’ est un simple calque sur le territoire coréen d’un schéma étranger venant d’un environnement complètement différent : ce n’est que du « navet coréen à la sauce au beurre ». Pour ces étudiants, ce n’était qu’une culture marginale, loin de la tradition légitime de la culture étudiante.

 

비슷한 시기에 나온 한완상의 ‘현대 청년문화의 제문제’(신동아, 1974,6) 는 청년문화 논의를 종합한 본격적인 논문이었다. 여기서 그는 청년문화론의 기초 개념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대학생들이 보였던 반응도 자신의 시각에서 분석했다. 그는 청년문화를 젊은 인텔리겐치아에 의해 주도되는 문화로 규정함 으로써 그 주체를 분명히 했고, 그 성격을 대항문화로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대학생의 도전대상이 정치사회구조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한국처럼 역사 단축 과정을 겪은 곳에서는 대항할 만큼 제대로 형성되어 있는 문화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L’article de Han Wan-Sang, « Les problèmes de la culture des jeunes d’aujourd’hui » (Nouveau Tong’a, juin 1974), sorti à peu près à la même époque, était un article qui a traité sérieusement le débat sur la culture des jeunes en synthétisant tout le débat d’alors. Il y a analysé non seulement les notions constituant la base des discussions, mais aussi la réaction des étudiants de son propre point de vue. En définissant la culture des jeunes comme celle menée par la jeune intelligentsia, il en a identifié les acteurs et l’a caractérisée comme une culture de rébellion. Selon lui, en Corée, l’objet de contestation des étudiants ne peut se concentrer que sur la structure socio-politique. La raison en est qu’il n’existe pas de structure culturelle solide contre laquelle se battre dans un pays comme la Corée qui a connu un développement trop rapide dans un raccourci historique.

 

이것은 대학생들이 왜 문화론 자체에 대해 무지하거나 청년문화론에 그토록 거부감을 가졌는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정치사회구조에 대한 대항운동은 있되, 대항문화 혹은 청년문화는 없는 것일까. 한완상은 없다고 했다 중등교육의 타율적 성격과 아직도 사회에 팽배한 유학적 가치관 때문에 대학생을 비롯한 한국 청년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형성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것이 아동문화 및 성인문화와 구별되는 청년문화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대학가의 통 - 블 - 생은 서양 저항문화의 표피만 들어온 것이었다. 그 아래로 창조적 저항정신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Ceci a suggéré de nombreuses pistes qui pourraient expliquer pourquoi les étudiants coréens ignoraient la théorie de la culture elle-même et pourquoi ils étaient aussi négatifs vis-à-vis de la controverse sur la culture des jeunes. Alors, cela signifierait-il qu’en Corée, il existe un mouvement d’opposition à la structure socio-politique, mais qu’il n’existe pas de culture d’opposition ou de culture des jeunes ? Han Wan-Sang dit que cela n’existe pas. Il avance que, du fait du caractère hétéronome de l’éducation du secondaire et des valeurs confucéennes qui règnent dans la société coréenne, les jeunes Coréens, dont les étudiants, ont des difficultés dans la construction de leur identité et que cette situation a empêché la formation de la culture des jeunes, distincte de celle des enfants d’une part et de celle des adultes d’autre part. Pour lui, la GBB des campus est une importation de la seule forme superficielle de la culture d’opposition occidentale et n’est pas soutenue par un esprit de rébellion créatif.

 

그러나 문화를 그와 같이 자각적 차원에 국한해서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한완상이 문화를 저항과 도전으로 개념설정할 때부터 이런 문제는 내재되어 있었다. 한완상의 문화 개념은 지나치게 관찰자적 시각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청년대중도 자신들의 문화행 위가 갖는 저항적 혹은 순응적 의미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서로 매우 닮은 것은 아닐까. 청년문화론의 선두에 섰던 최인호가  ‘청년문화선언’(한국일보, 1974. 4. 24)에서 « 문화는 생활 그 자체이지 선택된 개념이 아니다. 그들을 욕하기 전에 한번 가서 밤을 새워보라 » 고 한 것은, 자신들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질타한 말은 아니었을까. 김병익이 « 연구자의 대부분이 정치학 - 사회학 계통이어서 문화라는 개념의 직관적 파악이 훨씬 가능한 인문학 문학 관계자와 거의 상반된 입장과 관점을 취하고 있었 »음 을 지적한 것도 한완상의 문화론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Cependant se pose la question de savoir s’il est bien approprié de considérer la culture d’un point de vue personnel, limité. Ce problème était présent dès le moment où Han Wan-Sang caractérisait la culture comme une rébellion et un défi. Sa conception de la culture ne serait-elle pas celle d’un observateur trop extérieur ? Non seulement les jeunes Coréens, mais aussi les jeunes américains ne vivaient-ils pas non plus sans avoir une conscience aiguë de la valeur de la contestation ou de la soumission que portent leurs propres activités culturelles ? Dans ce sens, ne se ressemblent-ils pas les uns aux autres ? Quand Choe In-Ho, figure de proue de la controverse sur la culture des jeunes, a affirmé dans la « déclaration de la culture des jeunes » (quotidien Han’guk Ilbo, 24 avril 1974) que « la culture n’est pas quelque chose de choisi mais qu’elle est la vie elle-même. (…) » et a exhorté « de passer une nuit blanche avec les jeunes avant de les insulter », ne serait-ce pas une critique de la compréhension superficielle des jeunes comme lui ? Quand Kim Byŏng-Ik a pointé que « la plupart des chercheurs coréens qui s’intéressaient à la question étaient spécialistes en sciences politiques ou en sociologie et qu’ils ont une position presque opposée de celle des spécialistes des lettres qui peuvent avoir une compréhension beaucoup plus immédiate de la notion de culture », ce n’était pas autre chose qu’une expression détournée d’insatisfaction à propos de l’analyse de Han Wan-Sang.

 

이상의 논의를 살펴보았을 때, 1970년대 전반의 청년문화론 논쟁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청년문화론은 두 가지 새로운 사건, 즉 국내에서 통 - 블 - 생현상이 나타나고 외국에서 청년 학생들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상황이 서로 교차하면서 생성된 담론이었다. 청년문화론이 일단 제기되자 1974년부터 본격화된 논쟁은 통 - 블 - 생현상과 청년문화론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전자의 의미성 여부와 후자의 실체성 유무를 둘러싸고 논점이 각각 형성된 것이다. 남재희와 김병익이 양자를 각각 긍정하고 양자의 관계를 밀접한 것으로 바라보았다면, 대학신문의 논조는 통 - 블 - 생을 의미 있는 현상이 아니라고 보았고 문화의 범주에 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청년문화론 자체도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한완상은 청년문화론의 담론적 유용성에 착목하고 한국에서 그것의 형성방향을 모색했지만 통 - 블 - 생을 청년문화로 보는 데는 부정적이었다. 

L’examen de la discussion fait, la controverse sur la culture des jeunes de la première moitié des années 1970 pourra être présentée de la façon suivante. La controverse a émergé dans le contexte de la rencontre de deux phénomènes : l’apparition du GBB en Corée et le surgissement de la voix des jeunes étudiants à l’étranger. Le débat une fois soulevé, il s’est développé activement depuis 1974 autour de la question du rapport entre le phénomène de GBB et la culture des jeunes, notamment la signification du GBB et l’existence de la culture des jeunes. Si Nam Jae-Hi et Kim Byŏng-Ik ont admis l’existence de ces deux phénomènes et leur relation étroite, les journaux universitaires ont nié l’importance du GBB, ne l’ont pas considéré comme un phénomène culturel, et n’ont pas admis non plus l’existence de la controverse sur la culture des jeunes elle-même. Quant à Han Wan-Sang, il a remarqué l’utilité du débat et a cherché à le canaliser, mais il était réservé à l’idée de considérer la GBB comme une culture de jeunes.

 
 

Texte original

Traduction

다시 보는 청년문화론

 

청년문화론에 대한 열띤 논의는 1974년 여름을 지나면서 아무 결론도 방향제 시도 없이 이내 잦아들었다. 문학이나 사회과학 방면 전문가들의 학문적 논의로 그쳤을지도 모르는 청년문화론이 세간의 이목을 받고 사회적 논쟁으로 확산된 데는 매스컴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저널리즘의 상업적 관심이 논쟁의 출발은 아니었다. 문화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오히려 청년문화론 담론에는 두 가지 합리적 핵심이 내재되어 있었다. 하나는 인식론 차원의 문제제기였다. 즉 문화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은 의식적인 것인가 무의식적인 것인가 등을 둘러싼 질문이었다. 또 하나는 문화적 저항의 정치사회 적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정치사회적 저항과 문화적 저항은 어떻게 다른가, 그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보면, 애초 청년문화 론은 학생운동의 침체에 대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침체의 현실정치적 여건이 충분히 논의될 수 없는 상황에서 청년문화론에 대한 기사가 점차 젊은이들의 '퇴폐적' 생태 위주로 흐르게 되어 혼란이 가중된 면도 컸다. 

 

 

La controverse sur la culture des jeunes revisitée

 

Après l’été 1974, la controverse très animée sur la culture des jeunes s’est calmée sans aboutir à une conclusion ni à une piste au débat. Cette controverse aurait pu rester une discussion académique entre des spécialistes en littérature et en sciences sociales. Mais du fait qu’elle a attiré l’attention du public et qu’elle a pris de l’ampleur en devenant un débat social, les médias ont joué un rôle important. L’intérêt commercial de la presse n’était pas forcément l’origine du débat. Du point de vue de la culture, le débat comportait deux arguments rationnels. L’un concernait une problématique plus générale. Il s’agissait de poser les questions telles que « Comment comprendre les phénomènes culturels ? » « Sont-ils des phénomènes conscients ou inconscients ? ». L’autre questionnait le sens politico-social de la contestation culturelle : « Quelles sont les différences entre la résistance politico-sociale et la contestation culturelle ? », « Quelles doivent être les relations entre ces deux types de résistance ? » Le débat sur la culture des jeunes a commencé avec la stagnation des mouvements d’étudiants, mais les conditions politiques de la stagnation ne pouvaient pas être discutées amplement. C’est dans ce contexte que les articles sur la culture des jeunes avancèrent progressivement l’idée du mode de vie « décadent » des jeunes, ce qui a embrouillé davantage le débat.

 

청년문화 논의가 생산적으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사라진지   30년을 훌쩍 넘겼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는 청년문화론 논쟁의 최대쟁점이 결국 문화에 대한 상이한 이해를 둘러싸고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또 하나 논의 당사자들이 줄곧 의식한 것은 비동시적 동시성, 즉 세계의 시간과 한국 시간 사이의 불일치였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1968년 서구 학생운동에서 드러난 새로운 가치와 한국 학생운동의 민족주의 이념 사이의 차이였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문화'와 '비동시적 동시성'이 여전 히 화두로 주목된다면, 그 시원으로서 1970년대 초의 청년문화론 논쟁은 다시금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Cela fait déjà plus de 30 ans que la controverse sur la culture des jeunes a disparu sans donner lieu à une conclusion fructueuse. Le XXIe siècle est vu comme un siècle de la culture. Nous avons pu voir que le point de discorde le plus important de la controverse se formait finalement autour de conceptions différentes de la culture. De plus, ce dont les protagonistes étaient conscients tout le long du débat était la simultanéité asynchrone, c’est-à-dire la non-correspondance entre l’heure du monde et l’heure de la Corée. En d’autres termes, c’était la différence entre la nouvelle valeur révélée dans le mouvement estudiantin en Occident en 1968 d’une part et l’idéologie du nationalisme du mouvement d’étudiants coréen d’autre part. Si la « culture » et la « simultanéité asynchrone » restent toujours un sujet de discussion actif pour nous qui vivons le XXIe siècle, la controverse sur la culture des jeunes du début des années 1970 devra être appréciée de nouveau en tant qu’origine de cette question.

 

 
 

Autour du texte:

허수

한림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 근대사를 전공했다. 대표논저로 "근대를 다시 읽는다" (공저),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공저) 등이 있다. 

 

HEO Su

Chercheur à l’université Hallym. Spécialiste de l’histoire prémoderne de la Corée. Parmi ses ouvrages, « Relire la période prémoderne » (co-auteur), « Comment avons-nous vécu ces 100 dernières années ? » (co-auteur).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