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e original : 17. 1970년대 청년문화론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1970년이 되자 대학가에서는 학생운동이 침체한 가운데 통기타 - 블루진 (청바 지) - 생맥주 (이하 '통 - 블 - 생' )로 대표되는 생활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편 1968년 세계 곳곳에서 분출한 학생운동의 열기와 함께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서의 대규모집회, 워싱턴 - 뉴욕에서의 반전시위에서 보인 미국 청년들의 힘은 국내 식자층의 관심을 끌었다. 학생운동의 파고가 국내와 국외에서 상반된 경향을 보이는 가운데, 우리 젊은이들의 이른바 '퇴폐적'인 생활양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청년문화, 청춘문화

 

1970년 "세대" 2월호에 실린 남재희의  "청춘문화론" 은 이 문제를 최초로 공식거론한 대표적인 글이다. 이 글에는 이후 전개된 청년문화론의 중요논점이 소박한 형태로 망라되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의 대학생운동이 부진한 이유를 학생운동이 민주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통념적 진리'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기반은 한국 학생운동이 폭넓은 사회적 지지를 받거나 운동이 범汎학생적 차원으로 전개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이 기반으로 인해 운동이 지나치게 획일화되고, 통념적 진리를 벗어나는 것을 비판하기만 하는 소극적 운동에 머무르게 된 것은 부정적인 면이라고 보았다. 선진 외국의 경우 통념적 진리가 사회적으로 거의 실현되었기 때문에 학생운동 은 오히려 통념적 진리를 부정하고 새로운 이념을 내세우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이 형성하는 문화가 바로 '청춘문화' 혹은 '청년문화'라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통념적 진리는 '근대적 가치'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이 민족 문제나 민주주의 문제가 아직 실현되지 못한 사회이며, 따라서 학생운동은 이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가치에 기반한 학생운동은 앞서 언급한 획일성과 소극성으로 인해 침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현상태에서 학생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청년문화인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를 선도하는 대학문화조차 취약하기 때문에 청년문화는 형성되 어 있지 않았다. 다만 씨앗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의 기타 붐이나 조영남趙英男 등의 인기, 재즈음악, 전혜린田惠麟 문학 등을 외국 청년문화의 특징과 유사한 것으로서 주목했다. 

 

대중문화는 청년문화인가

 

그러나 당시 청년문화 논의는 몇 편의 글이 산발적으로 발표되는 데 그쳤다. 1973년 말 청년문화 전반을 다룬 한완상韓完相의 « 현대사회와 청년문화 »(법문사, 1973)가 나왔을 때도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청년문화 논쟁에 불을 지핀 것은 "동아일보" 문화면(1974.3.29)의 ‘오늘날의 젊은 우상들’이라는 제목의 기획기사였다. 이 기사는 최인호崔仁浩, 양희은楊姬恩, 김민기金民基를 포함하여 인기 있는 젊은 작가, 팝송가수, 코미디언 등 6명을 '우상'으로 선정했다. 논전의 불씨를 던진 장본인인 김병익金炳翼 기자는 논쟁 사후에 이를 정리하는 글 « 청년문화와 매스컴 »(1974.11)에서 당시의 기획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유신선포 이후 무력감과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1974년 초, 대학가에서는 통 - 블 - 생과 고고춤이 젊은이들의 생태로 자리잡았는데 사회 일각에서는 이를 '퇴폐적'이라고 비난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나 반전시위에서 나타난 미국 젊은이들의 자기표현 양태를 관찰한 김병익은 우리 젊은이들의 이런 생태를 적극적으로 이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젊은이들의 생태를 바라보는 기존 의 시각을 넘어서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점에 유의했다. 첫째, 열심히 공부하고 모범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기성세대가 젊은이에게 요구하는 덕목으로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 둘째, 그런 덕목은 결국 일부 일류 대학생에게만 국한되고 2,3류 대학이나 재수생, 대학에 가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엘리트문화로 귀속된다는 점이었다.

 

통 - 블 - 생과 우상을 중심테마로 삼으면서 그가 중요시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세대의식이나 정서는 무의식적으로 수행되는 풍속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는 다분히 문화인류학적 접근법을 채택했다. 둘째, 가장 비난받고 있는 젊은이들의 생태를 이해하고 나아가 그 미덕을 밝혀낼 때만이 그들이 가진 정치 - 사회적 액티비즘 (역동성)도 승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학을 중심으로 한 젊은층의 새로운 양식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려 했다는 점에서 남재희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그보다 한 단계 진전된 면모를 보였다. 즉 청년문화를 대학생이 아닌 경우도 포함하는 대중적 차원에서 설정하고 있음이 더욱 명확해졌고, 젊은 세대의 생각과 정서를 풍속과 같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접근하려 했다는 점에서 문화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고도 할 수 있다. 또 이것을 대학생의 정치 - 사회적 행위와 결부시키려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말하자면 그동안 정치 사회적 역동성을 보여온 대학생들의 저항적 에너지가 바야흐로 통 - 블 - 생으로 상징되는 생활문화 방면으로 분출하고 있음을 적극 포착하고, 여기에서 한국의 학생운동, 나아가 청년문화 의 장래를 희망적으로 보려 했던 것이다.

 

이 기획은 김병익도 인정했듯이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논쟁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젊은이들의 행동양식을 '퇴폐적'으로 바라보던 기성세대의 선입관 에 주의를 환기시킨 점은 기획이 애초에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그는 대학생들과 대학신문이 자신의 기사에 격심하게 반발하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의 기획에 서는 대학생들과 그들의 일상이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이해해야 할 대상이자 새로운 시대의 희망적 주체로 전제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이 등을 돌린 셈이다. 대학신문들은 일제히 "딴따라문화가 우리 우상이란 말이냐"라는 논조로 공격 했고, 이후 논쟁의 주요한 대립구도는 "동아일보"를 포함한 일간지와 대학신문 사이에 형성되었다. 

 

그는 자신의 기사가 제한된 지면 때문에 설명이 불충분했고, 대학에는 정치적 - 문화적 획일주의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가 대학생을 비롯한 청년 독자층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확실히 "지금 대학생들이 저항해야 할 가장 큰 적은 문화적 획일주의" 라는 그의 통찰은 예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재희의 용어를 빌면, '통념적 진리'조차 달성되지 않은 사회에서 통 - 블 - 생의 강조는 대학생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갔을까. 기사는 문화라는 매개물을 통해서나마 과연 그들로 하여금 현실적 책무를 깨닫게 하고 추동시킬 수 있었을까. 자신들이 가진 강한 정치 - 사회적 의식 때문에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대학문화를 주도하던 엘리트들은 청년문화론의 합리적 핵심마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선량한 의도를 오독한 것과는 달랐다. 김병익은 이 점을 주목하고 역사 - 사회적으로 이해했어야 했다. 

 

대학가의 반발은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의 청년문화 특집 서문인 ‘지금은 진정한 목소리가 들려야 할 때다’(1974.6.3) 에서 잘 드러난다.  글은 청년문화론 에 대한 강한 비판과 민족주의적 논조로 일관되어 있었다.  청년문화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기는 하되 실체가 없는 도깨비에 비유되었다. 또한 제각기 정통을 자처하고 나선 '도깨비문화의 기수'들과,  이를 규명하기 위해 나선 '사회과학 탤런트'들로 인해 '청년문화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형성되었다고 비난했다. 이 글에 따르면, 결국  청년문화라는 용어는 사회풍토가 완전히 이질적인 외국의 도식을 이 땅에 억지로 적용한 것이며 '빠다에 버무린 깍두기'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통 - 블 - 생은 대학문화의 정통에서 벗어난 비주류에 불과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한완상의 ‘현대 청년문화의 제문제’(신동아, 1974,6) 는 청년문화 논의를 종합한 본격적인 논문이었다. 여기서 그는 청년문화론의 기초 개념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대학생들이 보였던 반응도 자신의 시각에서 분석했다. 그는 청년문화를 젊은 인텔리겐치아에 의해 주도되는 문화로 규정함 으로써 그 주체를 분명히 했고, 그 성격을 대항문화로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대학생의 도전대상이 정치사회구조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한국처럼 역사 단축 과정을 겪은 곳에서는 대항할 만큼 제대로 형성되어 있는 문화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학생들이 왜 문화론 자체에 대해 무지하거나 청년문화론에 그토록 거부감을 가졌는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정치사회구조에 대한 대항운동은 있되, 대항문화 혹은 청년문화는 없는 것일까. 한완상은 없다고 했다 중등교육의 타율적 성격과 아직도 사회에 팽배한 유학적 가치관 때문에 대학생을 비롯한 한국 청년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형성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것이 아동문화 및 성인문화와 구별되는 청년문화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대학가의 통 - 블 - 생은 서양 저항문화의 표피만 들어온 것이었다. 그 아래로 창조적 저항정신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를 그와 같이 자각적 차원에 국한해서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한완상이 문화를 저항과 도전으로 개념설정할 때부터 이런 문제는 내재되어 있었다. 한완상의 문화 개념은 지나치게 관찰자적 시각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청년대중도 자신들의 문화행 위가 갖는 저항적 혹은 순응적 의미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서로 매우 닮은 것은 아닐까. 청년문화론의 선두에 섰던 최인호가  ‘청년문화선언’(한국일보, 1974. 4. 24)에서 « 문화는 생활 그 자체이지 선택된 개념이 아니다. 그들을 욕하기 전에 한번 가서 밤을 새워보라 » 고 한 것은, 자신들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질타한 말은 아니었을까. 김병익이 « 연구자의 대부분이 정치학 - 사회학 계통이어서 문화라는 개념의 직관적 파악이 훨씬 가능한 인문학 문학 관계자와 거의 상반된 입장과 관점을 취하고 있었 »음 을 지적한 것도 한완상의 문화론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상의 논의를 살펴보았을 때, 1970년대 전반의 청년문화론 논쟁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청년문화론은 두 가지 새로운 사건, 즉 국내에서 통 - 블 - 생현상이 나타나고 외국에서 청년 학생들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상황이 서로 교차하면서 생성된 담론이었다. 청년문화론이 일단 제기되자 1974년부터 본격화된 논쟁은 통 - 블 - 생현상과 청년문화론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전자의 의미성 여부와 후자의 실체성 유무를 둘러싸고 논점이 각각 형성된 것이다. 남재희와 김병익이 양자를 각각 긍정하고 양자의 관계를 밀접한 것으로 바라보았다면, 대학신문의 논조는 통 - 블 - 생을 의미 있는 현상이 아니라고 보았고 문화의 범주에 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청년문화론 자체도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한완상은 청년문화론의 담론적 유용성에 착목하고 한국에서 그것의 형성방향을 모색했지만 통 - 블 - 생을 청년문화로 보는 데는 부정적이었다. 

 

 

다시 보는 청년문화론

 

청년문화론에 대한 열띤 논의는 1974년 여름을 지나면서 아무 결론도 방향제 시도 없이 이내 잦아들었다. 문학이나 사회과학 방면 전문가들의 학문적 논의로 그쳤을지도 모르는 청년문화론이 세간의 이목을 받고 사회적 논쟁으로 확산된 데는 매스컴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저널리즘의 상업적 관심이 논쟁의 출발은 아니었다. 문화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오히려 청년문화론 담론에는 두 가지 합리적 핵심이 내재되어 있었다. 하나는 인식론 차원의 문제제기였다. 즉 문화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은 의식적인 것인가 무의식적인 것인가 등을 둘러싼 질문이었다. 또 하나는 문화적 저항의 정치사회 적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정치사회적 저항과 문화적 저항은 어떻게 다른가, 그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보면, 애초 청년문화 론은 학생운동의 침체에 대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침체의 현실정치적 여건이 충분히 논의될 수 없는 상황에서 청년문화론에 대한 기사가 점차 젊은이들의 '퇴폐적' 생태 위주로 흐르게 되어 혼란이 가중된 면도 컸다. 

 

청년문화 논의가 생산적으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사라진지   30년을 훌쩍 넘겼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는 청년문화론 논쟁의 최대쟁점이 결국 문화에 대한 상이한 이해를 둘러싸고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또 하나 논의 당사자들이 줄곧 의식한 것은 비동시적 동시성, 즉 세계의 시간과 한국 시간 사이의 불일치였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1968년 서구 학생운동에서 드러난 새로운 가치와 한국 학생운동의 민족주의 이념 사이의 차이였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문화'와 '비동시적 동시성'이 여전 히 화두로 주목된다면, 그 시원으로서 1970년대 초의 청년문화론 논쟁은 다시금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