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e original : 16. 문학에서의 순수와 참여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1960년대 문학에서의 순수 참여 논쟁은 문학이 현실과 민중의 삶에 마땅히 응답할 책무가 있다는 문제제기를 둘러싸고 1960년대 내내 (1970 년대 초까지도) 지속되었던 대규모 논쟁이었다. 굳이 논쟁이 필요했을까 싶을 정도로 당연한 느낌마저 주는 명제에 대해 숱한 논객들이 그토록 격렬하게 찬반입장을 밝혔던 사실을 통해 우리는 남한 현대사와 현대문학사의 일그러진 초상을 엿볼 수 있다.

문학에서의 순수 참여 개념

 

우리 근현대문학은 부분적인 부침의 양상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 출발의 첫걸음부터 강렬한 현실지향성을 드러내왔다. 일제강점기에조차도 관철되었 던 이 흐름이 결정적 단절을 맞게 된 것은 6.25의 종결과 더불어 분단상황이 고착되면서였다. 남북의 문학이 인적 이념적으로 재편되고 매카시즘적 냉전의식이 사회를 파고들면서 문학판에서도 현실에 대한 적극적 발언이 금기시되고 금압되었다. 그 결과 문학은 오직 문학일 뿐 정치나 이념 사회적 상황과는 무연한 순수한 것으로서 특정한 사회역사현실을 초월해 시공간적으로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무언가를 지향해야 한다는 의식이 절대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남한현실의 사회적 모순은 이런 문학적 허위의식과 무관하게 점층되고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을 지나며 민중의 삶과 터전은 피폐 황폐해지고 있었으며 국가권력은 이승만 독재와 군사쿠데타를 거치며 억압기제를 난폭하게 강화하고 있었다. 반면 민주주의적 원리는 해방 이후 새로운 교육을 통해 원리적으로 수용되고 있었으며 4.19로써 추상적이나마 현실성을 획득하면서 사회현실 구동의 근본적 지평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여러 축이 뒤얽혀 오늘날 매우 이상해 보일 수도 있는 거세된 문학의 사회성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순수 참여 논쟁을 촉발시켰고 또 논쟁이 그렇게 길게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학에서의 순수란 발레리의 순수시론이나 지드의 순수소설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실질적인 성립가능성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문학적으로 정립된 용어인 것이 사실이다 대체로 그것은 비시(소설) 적 요소를 배제하고 언어만으로 소우주를 구성하려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고 압축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순수문학은 탈사회성이라는 점에서 공통적 지반을 갖고는 있지만 이것과는 다른 연원과 의미를 지닌다. 우리 순수문학론은 1930년대 후반 유진오兪鎭午와 김동리의 세대론에서 정초되어 해방 이후 문학가동맹 좌파 진영과의 논전을 통해 김동리 조지훈 등에 의해 구축된 것으로 거칠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순수문학이란 곧 인간성 옹호의 문학인데 인간성 옹호란 현실 속의 인간 문제를 떠나 원초적 자연적 인간성을 찾는 일이며 그것은 모든 현실의 주의와 사상을 떠났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구경적 생의 형식 이라는 명제로 표현되기도 하면서 남한 문단의 주류인 문협정통파의 이론적 지반이 되었다.

 

한편 문학이 현실에 참여하려는 전통은 기실 문학의 발생과 때를 같이할 만큼 오래된 발상이기는 했지만 참여문학이란 말은 문학적으로 정립된 용어가 아니며 따라서 문학사전류에 등재된 단어도 아니다. 문학적 참여의 양상이 실로 복잡다기하기에 그런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 순수 참여 논쟁에 이 용어가 쓰이게 된 것은 아마도 사르트르의 영향으로 이 시기에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처럼 순수 참여문학 각각의 표현 자체가 일반 문학이론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순수 참여 논쟁이 우리 현대문학사의 독특한 한 국면과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참여는 필연적 양식의 결정체

 

순수 참여 논쟁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단일한 논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논쟁의 내용과 성격이 흡사했던 1960년대 및 1970년대 초 의 몇 차례 논쟁 모두를 아우르는 지칭으로 구사되는 것이 보통이다.

 

첫 번째는 김우종金宇鍾의 "파산의 순수문학"(1963.8)에서 비롯되어 대략 1965년경까지 진행되었던 논전이다.  1960년도 들어 김양수 김우종 유종호柳宗鎬 정태용鄭泰榕 이철범李哲範 등이 참여 라는 단어를 등장시키거나 참여문학적 의식을 드러내는 평론들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김우종이 위 글에서 종래의 순수문학을 비판하면서 순수 참여 논쟁이 본격 점화되었다. 김우종의 소론은 문학이 고통에 찬 현실과 민중의 삶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제언으로 이어지는 "유적지의 인간과 그 문학"(1963.11)에서는 당시의 한국 소설을 구체적으로 거명하여 분석하면서 자신의 입론을 구체화했다. 그는 "저 땅 위에 도표를 세우라"(1964.5) "농촌과 문학"(1964.11) "순수의 자기기만"(1965.7)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김우종의 문제제기를 이어 김병걸("순수와의 결별" 1963.10)  김진만 ("보다 실속있는 비평을 위하여" 1963.11) 최일수崔一秀 (종착역의 기수, 1964, 1) 홍사중洪思重 (작가와 현실, 1964.4)  장일우 신동한申東漢 등이 참여문학론을 지지 지원하는 입장에 서거나 순수론자들을 비판하는 평문을 발표했다.

 

한편 김우종의 논지에 대한 반박은 서정주와 이형기李炯基에 의해 시도되었다. 남한 시단의 최고 장로인 서정주는 "사회참여와 순수 개념"(1963.10) 에서 참여문학론을 과거 사회주의문학과 넌지시 연결시키면서 어쩐지 안심치 않다는 노회한 표현으로 남한 문단 주류의 편치 않은 심사를 드러냈다. 이형기는 "문학의 기능에 관한 반성-순수 옹호의 노트"(1964.2)에서 부제가 보여주듯 순수문학론을 재차 확인하고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무력한 장난감'이라고 규정하면서 문학의 참여론을 근저에서 부정했다. 이들의 주장은 상술한 홍사중 과 김우종의 반론을 불러왔다.

 

이 논전은 어느 한쪽의 승리나 패배로 귀결되지 않고 흡사 평행선을 달리듯 자신들의 주장을 반복하는 식의 결말을 이루었지만 그 도정에서 문학의 인식적 사회적 효용적 성격을 강조하는 참여론자의 주장이 재차 시민권을 획득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논전에서 주목되는 것은 순수론자들이 문학의 현실에 대한 관심을 은밀히 사회주의문학의 논리로 연결시키려 한 반면 참여론자들은 기를 쓰고 자신들의 주장을 그와 구별짓고자 했다는 점이다. 냉전의식의 중압감 과 진보적 문학론의 이론적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순수 참여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불문학자 김붕구金 鵬九의 발표를 통해서였다. 1967년  10월  12일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 본부가 주최한 원탁토론에서   "작가와 사회"(세대 11월호에 게재)를  발표한 김붕구는 문학적 참여를 세 유형으로 나눈 다음 "미리 이론화되고 심사숙고된 앙가즈망 을 주장하는" 사르트르의 참여문학은 이렇다 할 작품을 산출하지도 못했으며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이데올로기로 귀착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고 비판했다. 그리고 우리 1960년대 참여문학을 이와 다름없는 것으로 평가했다. 토론에 함께 참석했던 임중빈任重彬과 선우휘鮮于煇는 각각 "반사회 참여의 모순"(1967.10)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1967.10)라는 글로 김붕구에 대한 명백한 반대와 찬동의 의견을 밝혔다. 뒤이어 이호철李浩哲 이철범 김현金玄 등이 김붕구의 글에 부분적으로 이의를 제기했고 임중빈과 임헌영任軒永이 김붕구와 선우휘에 대한 반론을 거듭했다. 김붕구와 선우휘의 소론은 종래 순수론자의 변형태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이들 중 누구도 참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과 3-4년 사이에 변전한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임중빈의 표현을 빌자면 "오늘날 참여는 필연적인 양식良識의 결정체" 라는 단언이 나오는 정황이 된 것이다.

세 개의 논전으로 마무리

 

참여론 문제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내적으로 긴밀한 관련을 갖는 그러나 겉보기에는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더구나 주요 등장인물도 서로 다른 세 개의 논쟁으로 거의 마무리되었다. 시간순서로 정리해보면 그 첫 번째는 이어령李御寧과 김수영金洙暎 사이에 전개됐던 이른바 불온시 논쟁이다"에비 가 지배하는 문화"(이어령, 1967.12)와 "지식인의 사회참여"(김수영 , 1968.1)로 시작하여 네댓 차례 설전을 주고받은 이 논쟁은 문화창조가 저미해진 이유가 문화인 자신에게 있는가 아니면 문화계 밖 정치권력의 탄압에 있는가로 시작되었다. 그것이 바로 문학과 정치의 관계 문학의 정치성 (불온성) 으로 이어지면서 순수 참여 논쟁의 맥락으로 이월되었고 그에 따라 참여문학에 대한 평가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이 논쟁은 구체적인 시 장르를 대상으로 했고 문학적 가치와 정치적 가치의 문제를 논의함으로써 적잖은 성과를 거둘 수도 있었지만 논쟁 도중 불온성의 의미가 바뀌고 문화적 현실에 대한 판단이 서로 엇나가면서 게다가 김수영의 갑작스런 죽음까지 겹쳐 의미 있는 결론을 얻지 못했다.

 

두 번째로는 지식인 논쟁을 꼽을 수 있다 일찍이 "작가와 사회" 논쟁에서 김붕구의 손을 들어주며 사르트르를 단죄했던 선우휘는 " 현실과 지식인"(1969.2)에서 다시금 사르트르를 비롯해 루카치, 체 게바라 등이 맑스주의자임을 명기하고 불온시 논쟁의 고 김수영을 비판했다 그리고 보수적 반공주의 관점에서 참여적 진보적 지식인을 의심스런 눈길로 쳐다보는 데 선우휘 글의 요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말을 빌자면 "지식인은 반체제적 이어야 한다는 보편적 진리 가 진보적 경향으로 기우는 나머지 혁명 까지 긍정하게 될 것을 나는 우려하고 경계하기 때문에" 스스로 악역을 맡고 나섰다는 것이었다. 선우휘의 주장은 거기 담긴 세대론적 담론과 과도하고 편향된 극우적 논리로 "젊은이는 무엇인가"( 박태순, 1969.3)와 "지식인과 지적 마조히즘"(원형갑, 1969.4)등의 반론을 자초하게 되는데 선우휘의 글에서 읽히는 것은 현실참여의 전선에 뛰어들고 있는 지식인 문학자들에 대해 낡은 세대가 느끼는 우려와 반감일 뿐이었다. 끝으로 "참여문학의 자기미망"(1971.5) 이래 몇 편의 글로 참여문학을 혹독하게 비난했던 김양수의 소론과 그를 반박한 최일수崔一秀 ("참여문학은 시녀인가", 1971.6)   김병걸金炳傑(사회성과 의식의 상상, 1971.8)의 논쟁을 들 수 있다. 이미 "문학이란 무엇인가(1969. 4-9)에서 문학의 자율성론을 견고하게 구축했던 김양수는 위 글들에서 참여문학이란 한낱 유행풍조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성이 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문학의 자기불신을 초래했고 사회과학에 대한 열패감과 정치에의 예속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그는 시녀 고자 내시 등의 단어를 쓰면서 참여문학을 격렬히 비난했다 이에 대해 반론 측은 그의 오해와 오독을 지적하고 문학의 사회성과 자율성을 다 같이 인정한 위에서 이를 어떻게 보편적 가치로 승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김양수의 소론을 일축했다.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의 순수 참여 논쟁은 이처럼 이제는 순수 참여 논쟁 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논의의 중핵에 완연히 참여론만 남아 그를 둘러싼 시비가 오가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반참여론자들 이 논쟁의 도발자로서 등장하고 있었다. 이는 이미 작가와 사회 논쟁에서 예고된 상황이기는 했지만 순수 참여 논쟁이 어디로 귀결되었는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순수 참여 논쟁의 한복판에서 남정현南廷賢의 분지 사건이(1965-1966) 일어났고 훗날 1970-1980년대의 진보적 문학을 이끌고 나가게 될 창작과비평(1966) 이 창간되었다는 것 그리고 순수 참여 논쟁의 마무리와 아울러 1970년부터 리얼리즘 논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또한 1960년대 순수 참여 논쟁의 성격 및 귀추와 더불어 같이  기억해두어야 할 사실이다.

문학의 현실연관성 획득

 

지금껏 보았듯 순수 참여 논쟁은 문학의 참여 여부를 원론적으로 검토한 것은 아니다. 이 논쟁은 요컨대 1960년대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 문학은 사회현실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나름의 근본적 자세를 표명했던 것으로 간추릴 수 있다. 이 논쟁은 문학에서 냉전의 벽을 타파하는 데까지 이르지도 못했고 이론상의 여러 취약점 예컨대 참여론자들이 이해한 현실이 현저히 추상적 성격을 띤 일반론적 차원의 것이고 문학과 현실의 관계도 아직 무매개적인 단순한 연결에 불과하며 문학과 정치의 관계가 상호대립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등 많은 약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순수 참여 논쟁은 한국전쟁과 냉전의식으로 거세되었던 문학의 현실대응력을 회복하면서 문학의 현실연관성이라는 명제를 재획득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큰 의의를 갖는다. 때문에 순수 참여 논쟁은 향후 30여 년간 장구하고도 강력한 자장을 흩뿌리는 리얼리즘론으로의 관문을 형성했다. 또한 문협정통파의 지배 적 헤게모니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진보적 문학을 부활시켜 우리 현대문학의 한 축으로 삼는 데도 중요한 몫을 수행했다. 아울러 문학사가들에게 영도의 좌표 충격적 휴지기라고 불렸던 1950년대 문학비평의 불모성을 극복하고 비평정신을 회복하여 이후 우리 현대문학사의 특징인 비평의 지도성의 단초를 놓았다는 점도 들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참여론자들의 주된 발표무대의 하나였던 한양지 등에 관한 탐색을 추후의 과제로  지적해두고 싶다.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