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de traduction : 1-4. 고려 초기의 정치체제와 호족연합정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Texte original:

고려는 후삼국의 분열과 통일전쟁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립했다. 9세기 말엽 신라의 국가체제는 큰 혼란에 빠졌고, 지방 각지에서 중앙정부의 지배로부 터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이들이 대두했다. 연구자들은 이들을 보통 "호족豪族"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통일 과정은 곧 호족들의 통합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는 호족을 회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조 왕건은 이른바 중폐비사重幣卑辭(많은 예물과 겸손한 말)와 정략결혼을 통해 호족들을 고려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고, 이것이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호족연합정권설豪族聯合政權說 (이하 "연정설"로 약칭)은 바로 호족들을 통해 고려국 가 성립의 의의를 찾는 연구시각이다. 연정설은 고려 초기 정치체제가 국왕 중심의 집권적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각지에서 대두한 호족들의 연합형태를 취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고려는 신라 말부터 대두한 지방호족들을 회유와 포섭을 통해 통합해나갔고, 이것이 통일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고려 초기 정치체제에서 국왕권은 호족에 대해 일방적 우위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학계 일각에는 연정설에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이하 "비판론"으로 약칭). 비판론은 새로운 사회세력으로서 호족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고려 건국의 의미나 고려 초기 정치체제를 호족연합정권으로 설명하는 것은 반대한다. 국가 내지 국왕 주도의 정치체제로 봐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고려 초기의 역사를 이해할 때 연정설이 호족에 무게를 둔다면, 비판론은 국왕 내지 국가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연정설 논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기로 평가되는 고려 초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과 관련된 논쟁이다. 각 입론들은 고려 초기의 정치 과정과 정치제도 등을 통해 논지를 보강하고 있는데, 주요 논쟁점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자 각 연구자들에 따른 개별적인 부문 해석의 편차는 생략하고, 두 논설의 대비를 위해 포괄적으로 정리해보겠다.

연정설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호족"이 누구인지 살펴봐야 한다. 호족은 보통 신라 말에 지방사회를 기반으로 대두하여 고려 성립에 기초가 된 지방세력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고려 초기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사용되었지만, 처음부터 그 개념이나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호족의 개념이나 성격, 나아가 해당 용어의 적합성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다.

 

호족의 구체적 성격을 고려 초기에 대두한 지방세력으로 제시한 것은 1960년 대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고려 초기의 호족을 혈연에 기반한 족단族團의 수장首長으로 보았다. 이 족단은 고대사회의 구성을 계승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따라서 호족을 기반으로 삼는 고려 초기사회는 고대사회라고 규정되었다.

 

반면 한국 학계에서는, 일부 이견이 있지만 고려 초기를 중세사회로 보는 견해가 일반론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고려 초기를 고대사회로 보는 일본 학계의 견해에 대한 다각적 비판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비판들은 족단 내지 혈연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반론이었기 때문에, 호족이라는 용어 자체는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호족은 고대적 성격을 반영한 존재가 아니라 신라의 고대적 골품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중세사회를 열었던 주체세력으로 부각되었다. 연정설은 바로 이 호족들과 고려의 국가체제 를 직접 연결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입론이었다.

 

하지만 이 견해는 주로 정치적 측면에서 접근한 것으로서, 그 사회경제적 기반에 대한 검토가 부족했다. 따라서 호족이 혈연공동체에 기반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한 비판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일본 학계에서 제시하는 호족론과 의 차별성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에  1980년대부터는 고려 성립을 지배세력의 형성과 그들에 의한 정치체제 의 수립이라는 시각에서 설명하려는 기존의 연구경향을 비판하고, 사회사적 시각에서 지방사회의 성장과 재편이라는 측면에 주목하여 고려 국가체제의 성립을 이해하려는 시각이 대두했다. 이런 방법론적 전환은 호족 용어의 적합성 여부에 대한 비판을 낳았다.

 

비판의 요지는 호족이란 용어가 중국사나 일본사에서 고대사회를 구성 - 유지하는 사회적 - 역사적 규정성을 갖고 있으므로 고려 초기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근래에는 신라 말 국가체제가 동요하면서 지방에서 자위공동체自衛共 同體가 형성되고, 내부에 존재하던 계서적階序的 질서에 기반해 고려의 국가체제 가 성립했다는 견해가 제기되면서, 지방사회의 상층계급을 나타내는 용어로 "호부층豪富層"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용어는 호족이 족단이라는 혈연집단을 상정하는 것과 달리 "호세부민豪勢富民",  곧 지방사회에서 사회적 -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집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사회사적 방법론의 적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호족이 고대적 성격의 족단과 결부된다는 입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호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통설화되어 대다수의 연구자들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에 새로운 용어를 도입한 제반 견해들이 대안으로서 미흡하다고 반박하면서 호족 개념을 좀 더 포괄적으로 규정하여 그 유용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견해도 있다 지방에서 혈연성에 기초하여 대두한 지방세력을 "토호土豪"로 규정하고, 이들의 연합을 통해 형성되는 지배집단을 호족 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호족들의 귀부歸附가 고려 통일에 결정적 기반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귀부"란 호족이 고려에 정치적으로 귀속했음을 말하는 것으로, 고려 왕실과 호족의 정치적 결합을 뜻한다. 이 귀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시각차이가 나타난다.

 

연정설에서는 호족의 귀부가 상호의 이익을 대등하게 반영하는 호혜적 관계 에 기반했다고 본다. 곧 호족은 귀부와 함께 적대적 또는 독립적 태도를 버리고 고려에 군사적 - 경제적으로 협조했고, 대신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받았다는 것이다. 고려 통일에 호족들의 협조가 결정적 공헌을 한 만큼, 고려 초기의 정치권력 구성에서 호족의 입지는 매우 강력했다고 해석되었다. 왕건이 호족들 과 결혼정책을 추진하여 많은 수의 부인을 둔 것이나, 귀부 호족에게 성씨를 내려주는 등의 조치는 호족들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호족의 자제를 수도에 머물게 함으로써 인질과 자문의 효과를 도모했던 기인제其人制 역시, 다른 한편 호족과 중앙권력의 연결을 통해 지방에서 호족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기능을 했다고 이해되었다.

 

반면 비판론에서는 호족의 귀부가 다르게 평가되었다. 귀부는 호혜적 관계에 기반한 연합이 아니라 군신君臣의 상하관계가 성립하는 조치라고 해석했다. 호족의 귀부는 강력한 권력에 귀속함으로써 기존의 지배력을 유지해야 했던 호족들의 불가피한 선택으로서, 호족이 인질을 보내 국왕의 통제 속에 편입되는 조치였다고 규정했다, 이렇게 볼 때, 호족의 귀부는 호혜적 관계에 기반한 정치적 연합으로 설명될 수 없다. 고려 초기 중앙과 지방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일정한 연합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지만, 왕조 출범 자체가 호족들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므로 연합정권으로 설명하기 곤란하 다는 견해 역시 같은 맥락이다.

특정 시기 정치권력의 구조와 운영방식은 무엇보다 권력상층을 구성하는 관부체계를 통해 표현된다. 때문에 중앙의 상층관부에 대한 분석은 특정 시기의 권력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관건으로 간주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권력의 존재양태는 모든 권력의 정점인 왕권王權과 이를 뒷받침하는 한편 일정하게 제약하기도 하는 신권臣權의 상관관계를 통해 설명된다. 이때 관부의 구성 혹은 정령의 전달체계 등이 왕권신권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가 주된 분석대상이 된다.

 

고려 초기 연정설 논쟁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부분은 중앙관제에 대한 것이었다. 3성 6부제를 도입한 정치체제로 정비되기 전의 주요 관부로는 광평 성廣評省, 내봉성內奉省, 내의성內議省, 순군부徇軍部, 병부兵部 등이 있었다. 이들 관부가 당시 권력구조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호족과 왕권 사이의 권력관계와 결부되어 검토되었다.

 

연정설은 초기 관부들이 왕권을 뒷받침하는 기구와 호족들의 권익을 대변하 는 기구로 이원화되어 있었다는 시각으로 접근했다. 광평성은 국가의 의사결정 을 담당하는 중심 관부로 파악되었는데, 연정설에서는 광평성이 호족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대변하는 창구였다고 해석하며, 연구자에 따라서는 신라 화백회의의 전통으로 소급하기도 한다. 한편 내봉성은 왕명의 출납 및 인사행정 등과 관련된 기구로 파악되었다.

 

관부체계에 반영된 호족과 왕권의 관계는 순군부와 병부의 관계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군사력은 연합정권 성립에 가장 기초적인 변수이다. 그런데 고려 초기에는 군사권과 관련하여 두 개의 관부가 존재하다가, 그중 순군부가 뒤에 폐지되었다. 또한 순군부 관리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나, 순군부 관리를 임용할 때 출신지가 고려된 사례 등이 보인다. 연정설은 이런 논거에 기반하여 순군부가 여러 호족의 군사력과 연결된 일종의 협의체적 군사지휘권의 통수부 였다고 이해했다. 반면 병부는 군사에 관한 왕명을 실행하는 기관으로 보았다.

 

나아가 군사권에 관련된 관부가 이원적으로 존재한 것은 호족의 군사권을 국왕이 권력구조 속에 흡수시키지 못한 결과라고 이해했다. 곧 고려가 호족들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통일전쟁을 수행한 만큼 이를 통할하는 관부가 필요했을 것인데, 그것이 바로 순군부였다는 해석이다. 나아가 순군부가 병부보다 서열상 상위에 있었다는 데 근거하여, 당시 호족들의 군사력이 고려 정부의 군사력보다 우위에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 초기의 관부를 호족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데 대해서는 반론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당시의 관부체계를 호족과 결부시켜 설명하기에는 자료적 뒷받침이 약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특히 호족들의 군사적 협의체로 설명된 순군부에 대해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곧 순군부 관리를 국왕이 임명하는 한 그 군사권이 국왕의 통제 바깥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순循'은 '순찰'의 의미이므로 순군부는 왕권을 보위하기 위해 순찰 감시의 기능을 담당한 기구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호족들이 거느렸던 병력도 호족들이 자의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병이 아니라 국가의 군사지휘체계에 편입되어 왕명에 따라 움직이는 왕병이었다고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 순군부와 병부는 그 군사력의 성격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왕병으로서 기능적 측면에 서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고려 초기의 지방제도는 군현제 형식을 취했지만, 성종 초까지 외관이 파견되 지 않았고 이후에도 일부 군현에만 외관이 설치되었다. 이런 사정은 외관 파견을 기본원리로 하는 군현제에 비추어볼 때 매우 예외적이고, 그 배경에는 호족의 존재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정설은 이와 관련하여, 호족이 독자적으로 일정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중앙정부는 이들을 매개로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간접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런 지배방식의 구체적 사례로 제시되는 것이 사심관제事審官制이다. 사심관제란 중앙의 공신이나 고관이 연고지의 운영에 일정한 책임을 지는 제도이다. 중앙권력에 의해 획일화된 중앙집권체제가 수립되지 못했다는 것은 호족연합정권의 가장 중요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비판론은 외관이 파견되지 않은 사정이 예외적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중앙집권화를 구현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해진 간접지배라는 설명에는 견해를 달리했다. 곧 귀부 이후 호족의 지방지배는 중앙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며, 호족은 그 지배력을 임시적으로 위임받은 것으로서 호족의 세력기반을 국왕 자신의 것으로 직접 흡수할 수 없었던 당시의 단계적 상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비판론에서는 호족의 지방지배를 당시 권력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요소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연정설에서 흔히 지적되는 호족의 독립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글의 서두에서 지적했지만, 연정설과 비판론은 고려 초기 역사상에 접근하는 방법의 차이를 보여준다. 연정설은 신라와 구분되는 고려 정치체제의 수립에 주목한다. 신라에서는 폐쇄적인 골품제를 통해 정치운영이 이루어지고 지방은 이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었지만, 고려에서는 지방호족들이 정치에 참여했고 이를 기반으로 지배층이 확대되는 모습이 있었다고 지적되었다. 이는 고려 초기를 고대에서 중세로 나아가는 전환점으로 보는 시각의 한 축이 되었다.

 

이런 시각은 고려사회의 전반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연정설은 고려가 문벌귀족사회였다고 보는 견해와 연결된다. 중앙에 진출한 호족은 문벌귀족으로 성장하여 고려사회 지배층으로 유지되었으며, 호족연합 정권은 이런 문벌귀족사회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견해는 신라의 골품귀족에서 호족을 거쳐 문벌귀족으로 이어지는 지배층이 그 외연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혈연에 기반했다는 공통성을 갖는다고 보아, 나말여초가 변동보다 지속의 측면을 띠게 되어 전환기로서의 의미가 흐려지는 문제가 있다.

 

한편 비판론의 논지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고려를 귀족사회로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관료제에 입각하여 운영된 사회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사회의 운영원리를 귀족제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견해는 그 성립기반인 호족연합정권 역시 부정하는 입장으로 연결된다.

 

다른 논점은 왕조국가의 정치체제를 이해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왕조국 가에서는 일반적으로 국왕을 정점으로 정치체제가 성립 - 운영된다. 비판론은 고려 초기의 정치체제를 규정하면서 호족으로 인해 나타나는 특수한 측면보다 국왕을 정점으로 형성되는 일반적 원리가 더 본질적이고 규정적이라고 보았다. 이런 입론은 순군부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해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처럼 연정설을 둘러싼 논쟁은 역사적 전환기로서 고려 초기에 주목함으로써 그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그 의미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성격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우선 논쟁의 핵심인 '호족' 의 범주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현재 호족이라는 용어는 적합성 여부와 별도로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것 아닌가 한다. 호족 개념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는 것도 그간 이 용어가 모호하게 사용되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고려 초기 지방세력 중에는 중앙에 올라와 정착한 부류도 있고 지방에 남아 토착세력으로 유지된 부류도 있었다. 기존에는 중앙에 진출한 부류도 재지적 기반을 중요한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호족으로 통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고려 초기의 국가체제운영에서 중앙에 진출한 부류와 지방에 남은 부류가 일정하게 구분되고 있었다면, 이 양자는 개념적으로 도 구분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당시 정치체제의 모습이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개인과 집단을 모두 호족이라고 부르는 것도 방법론적으로 재고될 부분이다.

 

다음으로 기존 논의들은 실증적 기반이 약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연정설 논쟁은 여러 정치 과정과 제도에 대한 실증적 연구에 기반해 제기된 것이라기보다, 우리나라의 역사 과정 속에 고려 초기를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때문에 연정설이든 비판론이든, 해당 입론을 뒷받침하 기 위해 실증적 연구가 수반되는 양상이었다. 그 결과 기존 연구들 중에는 어느 한편의 입론에 맞추어 사실을 해석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물론 이런 입론의 제기와 그에 수반한 연구의 진행이 고려 초기를 심도 있게 조망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연구가 더욱 진전되기 위해서는 특정 입론에서 벗어나 제도 자체의 운영원리와 실태를 밝혀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연정설과 비판론이 상호보완적인 방향으로 결합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느 시기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분열기를 수습하면서 성립한 왕조 초기의 정치 과정이나 제도에는 현실적으로 국가(왕권)와 호족 쌍방의 입장이 함께 투영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고려 국가 성립 과정에서 볼 때 호족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국가체제가 수립 운영되는 상황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국가의 논리를 배제할 수는 없다. 호족이 국가체 제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 한, 이들의 논리도 국가제도의 형식 속에서 구현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당 제도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에 반영된 호족의 논리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국가와 호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규정적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사실 연구자의 시각에 의해 규정되는 면이 강한 데다,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려 초기의 사정을 감안할 때 그 자체가 편향적 역사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이다.

Traduction(s)

Système politique et pouvoir fédératif des clans puissants hojok de la première période du Koryŏ

Texte original

Traduction

고려는 후삼국의 분열과 통일전쟁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립했다. 9세기 말엽 신라의 국가체제는 큰 혼란에 빠졌고, 지방 각지에서 중앙정부의 지배로부 터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이들이 대두했다. 연구자들은 이들을 보통 "호족豪族"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통일 과정은 곧 호족들의 통합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는 호족을 회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조 왕건은 이른바 중폐비사重幣卑辭(많은 예물과 겸손한 말)와 정략결혼을 통해 호족들을 고려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고, 이것이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Le pays du Koryŏ fut fondé au cours d’un processus où se produisirent successivement la scission des Trois Royaumes postérieurs puis la guerre d’unification. Le système étatique du Silla à la fin du IXe siècle avait sombré dans le chaos, si bien que partout dans les provinces, certains avaient fait leur apparition en constituant des forces isolées, soustraites de la domination du gouvernement central. Les spécialistes désignent généralement ceux-ci par le terme « clans puissants » hojok (豪族). Le processus d’unification du Koryŏ peut être considéré comme celui de l’union des clans puissants. Le Koryŏ déploya de nombreux efforts en vue de les amadouer. T’aejo Wang Kŏn, fondateur du Koryŏ, réussit à attirer les clans puissants dans son parti en recourant à une politique des « dons généreux et des messages humbles » (重幣卑辭, cor. chung p’ye pi sa) et à des alliances matrimoniales stratégiques. Une telle politique est jugée comme ayant eu un rôle décisif pour l’unification des Trois Royaumes postérieurs.

 

호족연합정권설豪族聯合政權說 (이하 "연정설"로 약칭)은 바로 호족들을 통해 고려국 가 성립의 의의를 찾는 연구시각이다. 연정설은 고려 초기 정치체제가 국왕 중심의 집권적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각지에서 대두한 호족들의 연합형태를 취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고려는 신라 말부터 대두한 지방호족들을 회유와 포섭을 통해 통합해나갔고, 이것이 통일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고려 초기 정치체제에서 국왕권은 호족에 대해 일방적 우위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La thèse du pouvoir de la fédération des clans puissants, le hojok yŏnhap chŏnggwŏn sŏl (豪族聯合政權說, abrégée dans la suite du texte en « thèse de la fédération ») est le point de vue des historiens qui veulent voir dans l’action des clans puissants le ressort de l’établissement de l’État du Koryŏ. Selon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le régime politique de la première période du Koryŏ ne présente pas les caractéristiques d’un pouvoir centré sur le roi, mais ceux d’une fédération de clans puissants ayant émergé en divers lieux du territoire. Le Koryŏ avait uni les clans puissants des provinces apparus à la fin du Silla grâce des mesures d’apaisement et d’intégration, formant la base de l’unification, si bien que, dans le système politique du début de la période, la royauté ne pouvait faire autrement que leur accorder une position éminente, et ce, unilatéralement.

 

한편 학계 일각에는 연정설에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이하 "비판론"으로 약칭). 비판론은 새로운 사회세력으로서 호족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고려 건국의 의미나 고려 초기 정치체제를 호족연합정권으로 설명하는 것은 반대한다. 국가 내지 국왕 주도의 정치체제로 봐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고려 초기의 역사를 이해할 때 연정설이 호족에 무게를 둔다면, 비판론은 국왕 내지 국가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ar ailleurs, une partie du milieu académique a adopté une attitude critique à l’égard de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dans la suite du texte, position désigné par le terme : « thèse critique »). Les tenants de la thèse critique ne nient pas le rôle historique des clans puissants en tant que nouvelle force sociale, mais ils s’opposent à l’explication selon laquelle les ressorts de la fondation du pays ainsi que le système politique de la première période se résumerait à un pouvoir fédératif de ces clans. Pour eux, le système politique se conçoit au sein de l’État et sous la conduite du souverain. En d’autres termes, pour comprendre l’histoire du début du Koryŏ,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met l’accent sur le rôle des clans puissants, tandis que la thèse critique le porte sur le souverain et l’État.

 

결국 연정설 논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기로 평가되는 고려 초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과 관련된 논쟁이다. 각 입론들은 고려 초기의 정치 과정과 정치제도 등을 통해 논지를 보강하고 있는데, 주요 논쟁점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자 각 연구자들에 따른 개별적인 부문 해석의 편차는 생략하고, 두 논설의 대비를 위해 포괄적으로 정리해보겠다.

Au bout du compte, le débat sur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renvoie à une perception plus générale de l’Histoire du premier Koryŏ, considérée comme un tournant dans l’Histoire de Corée. Les tenants des deux points de vue renforcent leur position à travers leur analyse respective de l’histoire politique et des institutions, analyse dont nous nous proposons d’examiner les points principaux. Sans entrer dans le détail des divergences d’interprétation particulières à chaque spécialiste, nous traiterons de manière globale l’opposition entre les deux théories.

 

 

Texte original

Traduction

호족의 개념과 성격

 

연정설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호족"이 누구인지 살펴봐야 한다. 호족은 보통 신라 말에 지방사회를 기반으로 대두하여 고려 성립에 기초가 된 지방세력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고려 초기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사용되었지만, 처음부터 그 개념이나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호족의 개념이나 성격, 나아가 해당 용어의 적합성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다.

La notion de « clans puissants » hojok

 

Pour comprendre la nature du débat dont il est ici question, il convient d’examiner d’abord qui étaient ces « clans puissants ». Le terme désigne ordinairement les forces provinciales à partir desquelles le pays du Koryŏ fut établi, après que celles-ci eurent émergé dans la société provinciale à la fin du Silla. Bien que l’expression fut utilisée tôt parmi les historiens spécialisés dans la période du début du Koryŏ, celle-ci en réalité, ne fut jamais clairement définie au départ. Une telle lacune suscita immanquablement un débat terminologique portant sur la définition et la légitimité de son emploi.

 

호족의 구체적 성격을 고려 초기에 대두한 지방세력으로 제시한 것은 1960년 대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고려 초기의 호족을 혈연에 기반한 족단族團의 수장首長으로 보았다. 이 족단은 고대사회의 구성을 계승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따라서 호족을 기반으로 삼는 고려 초기사회는 고대사회라고 규정되었다.

La question de la nature concrète des clans puissants du début du Koryŏ commença à être posée par les historiens japonais dans les années 1960. Pour ces derniers, les clans puissants étaient des chefs (首長, cor. sujang) de groupes (族團, cor. choktan) établis sur les liens du sang (血緣, cor. hyoryŏn). Ils comprenaient ces groupes comme étant le produit de la continuité de la structure de la société ancienne, définissant ainsi conséquemment la société du début du Koryŏ comme relevant de la société ancienne de la Corée.

 

반면 한국 학계에서는, 일부 이견이 있지만 고려 초기를 중세사회로 보는 견해가 일반론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고려 초기를 고대사회로 보는 일본 학계의 견해에 대한 다각적 비판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비판들은 족단 내지 혈연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반론이었기 때문에, 호족이라는 용어 자체는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호족은 고대적 성격을 반영한 존재가 아니라 신라의 고대적 골품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중세사회를 열었던 주체세력으로 부각되었다. 연정설은 바로 이 호족들과 고려의 국가체제 를 직접 연결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입론이었다.

Ceci était en contradiction avec le point de vue généralement partagé du monde académique sud-coréen qui considérait que la société du début du Koryŏ correspondait aux débuts de la société médiévale. Par conséquent, la position japonaise s’attira la critique des uns et des autres, à différents niveaux. Le débat ne portant pas sur la terminologique en tant que telle, le terme continua d’être employé. Le résultat fut que la notion de « clans puissants » signifiait une nouvelle notion politique, en rupture avec le « système des rangs d’os » [du Silla] (骨品制, cor. kolp’umje), les désignant comme des forces autonomes inaugurant la société médiévale.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en reliant directement ces clans au système politique de l’État du Koryŏ, leur conférait un rôle historique évident.

 

하지만 이 견해는 주로 정치적 측면에서 접근한 것으로서, 그 사회경제적 기반에 대한 검토가 부족했다. 따라서 호족이 혈연공동체에 기반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한 비판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일본 학계에서 제시하는 호족론과 의 차별성도 드러나지 않았다.

Cependant, le point de vue partait d’une approche essentiellement politique, sans prendre suffisamment en compte les aspects socio-économiques. Par conséquent, elle peinait à démentir l’idée selon laquelle les clans puissants étaient fondés sur des communautés établies sur les liens du sang, ne pouvant dès lors se démarquer des thèses académiques japonaises.

 

이에  1980년대부터는 고려 성립을 지배세력의 형성과 그들에 의한 정치체제 의 수립이라는 시각에서 설명하려는 기존의 연구경향을 비판하고, 사회사적 시각에서 지방사회의 성장과 재편이라는 측면에 주목하여 고려 국가체제의 성립을 이해하려는 시각이 대두했다. 이런 방법론적 전환은 호족 용어의 적합성 여부에 대한 비판을 낳았다.

À partir des années 1980, les historiens critiquèrent les orientations prises antérieurement et cherchèrent à comprendre la mise en place du système politique de l’Etat du Koryŏ en portant leur attention sur la croissance et la recomposition de la société provinciale du point de vue de l’histoire sociale. Un tel tournant méthodologique (épistémologique) conduisit à critiquer la pertinence de l’usage du terme « clans puissants ».

 

비판의 요지는 호족이란 용어가 중국사나 일본사에서 고대사회를 구성 - 유지하는 사회적 - 역사적 규정성을 갖고 있으므로 고려 초기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근래에는 신라 말 국가체제가 동요하면서 지방에서 자위공동체自衛共 同體가 형성되고, 내부에 존재하던 계서적階序的 질서에 기반해 고려의 국가체제 가 성립했다는 견해가 제기되면서, 지방사회의 상층계급을 나타내는 용어로 "호부층豪富層"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용어는 호족이 족단이라는 혈연집단을 상정하는 것과 달리 "호세부민豪勢富民",  곧 지방사회에서 사회적 -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집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사회사적 방법론의 적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L’essentiel de la critique consistait à dire que le terme trouvait les éléments sociaux et historiques de sa définition dans le cadre d’une explication sur la structure et du maintien de la société ancienne dans les histoires de la Chine et du Japon, mais ne pouvait être appliqué au début du Koryŏ. Récemment, certains ont expliqué que l’État du Koryŏ avait été établi sur la base d’une hiérarchie interne aux communautés capables d’assurer leur propre protection (自 衛共同體, cor. chawi kongdongch’e) au sein de la société provinciale quand le système étatique de la fin du Silla se trouva dans la tourmente, si bien que l’on utilise également le terme « classe des élites (puissantes et) aisés » (豪富層, cor. hobuch’ŭng) pour désigner la classe sociale supérieure de la société provinciale. À la différence des thèses japonaises qui font  des  « clans  puissants »  des  groupes  unis  par  des  liens  biologiques,  le  terme : « populations aisées et puissantes » hose pumin (豪勢富民) désigne des groupes dont la position socio-économique est dominante, en application – et indissolublement liés – de la méthodologie de l’histoire sociale.

 

현재 학계에서는 호족이 고대적 성격의 족단과 결부된다는 입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호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통설화되어 대다수의 연구자들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에 새로운 용어를 도입한 제반 견해들이 대안으로서 미흡하다고 반박하면서 호족 개념을 좀 더 포괄적으로 규정하여 그 유용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견해도 있다 지방에서 혈연성에 기초하여 대두한 지방세력을 "토호土豪"로 규정하고, 이들의 연합을 통해 형성되는 지배집단을 호족 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Actuellement dans le milieu académique, la plupart des historiens continuent d’utiliser le terme hojok, même s’ils n’acceptent pas la thèse qui les rattache à la société ancienne de la Corée, dans la mesure où l’expression est déjà solidement implantée dans les usages. Une grande majorité d’opinions s’accorde pour réfuter l’introduction d’une nouvelle terminologie en l’absence de proposition suffisante, et préfère définir la notion de manière plus large, en en renforçant finalement  l’utilité.  Ainsi,  ils  définissent  les  forces  provinciales  émergeantes fondées sur les liens du sang par le terme t’oho (土豪, litt « élites locales »), et définissent par le terme hojok les groupes dominants constitués à travers leur fédération.

 

 

   

호족의 귀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호족들의 귀부歸附가 고려 통일에 결정적 기반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귀부"란 호족이 고려에 정치적으로 귀속했음을 말하는 것으로, 고려 왕실과 호족의 정치적 결합을 뜻한다. 이 귀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시각차이가 나타난다.

Quelle fut l’adhésion des clans puissants ?

 

Que l’adhésion (歸附, cor. kwibu) des clans puissants au parti de T’aejo Wang ait été la  base  décisive  sur  laquelle  se  fonda  l’unification  du  Koryŏ,  est  un  fait  bien  connu. « Adhésion » signifie ici le fait que les clans puissants aient été politiquement rattachés au Koryŏ, et qu’ils constituèrent une alliance politique avec la famille royale du Koryŏ. Selon les spécialistes, les points de vue divergent à propos de la signification concrète à donner ici au mot « adhésion ».

 

연정설에서는 호족의 귀부가 상호의 이익을 대등하게 반영하는 호혜적 관계 에 기반했다고 본다. 곧 호족은 귀부와 함께 적대적 또는 독립적 태도를 버리고 고려에 군사적 - 경제적으로 협조했고, 대신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받았다는 것이다. 고려 통일에 호족들의 협조가 결정적 공헌을 한 만큼, 고려 초기의 정치권력 구성에서 호족의 입지는 매우 강력했다고 해석되었다. 왕건이 호족들 과 결혼정책을 추진하여 많은 수의 부인을 둔 것이나, 귀부 호족에게 성씨를 내려주는 등의 조치는 호족들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호족의 자제를 수도에 머물게 함으로써 인질과 자문의 효과를 도모했던 기인제其人制 역시, 다른 한편 호족과 중앙권력의 연결을 통해 지방에서 호족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기능을 했다고 이해되었다.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postule que l’adhésion des clans puissants fut fondée sur la base de relations mutuellement bénéfiques entre les deux partis, reflétant le fait que les bénéfices en jeu étaient de même niveau. C’est-à dire que dans la mesure où les clans puissants adoptaient une attitude qui n’était ni hostile ni indépendante, et qu’ils coopéraient militairement et économiquement avec le Koryŏ, ils en recevaient le bénéfice correspondant. Ils en déduisent que la position des clans puissants au sein du pouvoir politique du début de la dynastie fut très forte : à la mesure du caractère décisif de leur contribution à l’unification (politique) du Koryŏ. Ainsi, le fait que Wang Kŏn mit en œuvre une politique d’union matrimoniale avec les clans puissants, et qu’il leur octroya un patronyme, est vu comme le résultat d’une situation dans laquelle il ne pouvait faire autrement que de reconnaître leur position sociale. D’un autre côté, la mise en vigueur du système des otages ki’inje (其人制) qui visait à obtenir des conseils des otages [en vue d’une meilleure gestion du territoire] en obligeant les fils des clans puissants à séjourner dans la capitale, se comprend comme ayant pour fonction de raffermir la domination des clans puissants dans les provinces du fait de leur lien avec le pouvoir central.

 

반면 비판론에서는 호족의 귀부가 다르게 평가되었다. 귀부는 호혜적 관계에 기반한 연합이 아니라 군신君臣의 상하관계가 성립하는 조치라고 해석했다. 호족의 귀부는 강력한 권력에 귀속함으로써 기존의 지배력을 유지해야 했던 호족들의 불가피한 선택으로서, 호족이 인질을 보내 국왕의 통제 속에 편입되는 조치였다고 규정했다, 이렇게 볼 때, 호족의 귀부는 호혜적 관계에 기반한 정치적 연합으로 설명될 수 없다. 고려 초기 중앙과 지방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일정한 연합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지만, 왕조 출범 자체가 호족들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므로 연합정권으로 설명하기 곤란하 다는 견해 역시 같은 맥락이다.

La « thèse critique », quant à elle, évalue différemment l’adhésion des clans puissants : ses tenants la comprennent, non pas comme une fédération fondée sur des relations mutuellement bénéfiques, mais comme une mesure en vue d’établir la relation hiérarchique entre souverain et sujets ( 君臣 , cor. kunsin). Ainsi définissent-ils l’adhésion des clans puissants comme un choix nécessaire pour maintenir les pouvoirs établis en les intégrant au sein d’un pouvoir [monarchique] fort, et l’envoi d’otages comme une mesure pour les placer sous le contrôle du souverain. Dans une telle optique, l’adhésion des hojok ne peut expliquer qu’une fédération possible ait été établie sur la base de relations de bénéfice mutuel. Dans le même d’idées, certains affirment qu’au début du Koryŏ, on pouvait certes reconnaître que les relations entre le centre et les provinces, du fait de leur étroitesse et de la nécessité de leur entretien, présente un certain caractère « fédéré », toutefois, dans la mesure où le lancement de la dynastie n’avait pas été le résultat en lui-même d’un accord des clans puissants, il était difficile de parler de pouvoir fédératif.

 

 

Texte origi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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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치제도

 

특정 시기 정치권력의 구조와 운영방식은 무엇보다 권력상층을 구성하는 관부체계를 통해 표현된다. 때문에 중앙의 상층관부에 대한 분석은 특정 시기의 권력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관건으로 간주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권력의 존재양태는 모든 권력의 정점인 왕권王權과 이를 뒷받침하는 한편 일정하게 제약하기도 하는 신권臣權의 상관관계를 통해 설명된다. 이때 관부의 구성 혹은 정령의 전달체계 등이 왕권신권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가 주된 분석대상이 된다.

Les institutions politiques de la capitale

 

Rien n’exprime mieux la structure et le mode de gestion du pouvoir politique d’une période particulière que l’organisation administrative (官府, cor. kwanbu) formant la classe sociale détentrice du pouvoir ( 權力 上層 , cor. kwŏllyŏk sangch’ŭng). C’est pourquoi, l’analyse de la haute administration centrale est considérée comme un élément clé pour comprendre la structure du pouvoir d’une période donnée. Généralement, la configuration du pouvoir politique s’explique à travers l’analyse des relations entre le pouvoir royal (王權, cor. wanggwŏn), point culminant du pouvoir, et celui des ministres (臣權, cor. sin’gwŏn), qui le soutiennent, tout en étant limités – jusqu’à un certain point – dans leurs prérogatives. Aussi, pour l’époque qui nous concerne, l’analyse s’est principalement portée sur la manière dont s’articulaient pouvoir royal et pouvoir des ministres (au sens large) au sein de la structure administrative ou bien dans le système de transmission des directives politiques (政令, cor. chŏngnyŏng).

 

고려 초기 연정설 논쟁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부분은 중앙관제에 대한 것이었다. 3성 6부제를 도입한 정치체제로 정비되기 전의 주요 관부로는 광평 성廣評省, 내봉성內奉省, 내의성內議省, 순군부徇軍部, 병부兵部 등이 있었다. 이들 관부가 당시 권력구조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호족과 왕권 사이의 권력관계와 결부되어 검토되었다.

Le sujet, qui a suscité les débats les plus vifs à propos de la « thèse de la fédération » du début du Koryŏ, a été le système administratif central (中央官制, cor. chungang kwanje). Avant la mise en place d’un système en « trois cours et six ministères » (三省六部, cor. samsŏng yukpu), les principales administrations étaient le Grand conseil d’État (廣評省, cor. kwangp’yŏng sŏng), le Conseil intime (內奉省, cor. naebong sŏng), le Conseil du Palais (內 議省, cor. naeŭi song), le département de direction des Armées (徇軍部, cor. sun’gunbu) et le ministère de l’Armée (兵部, cor. pyŏngbu). La question de la position occupée par ces administrations dans la structure du pouvoir de l’époque, fut examinée en lien avec celle des rapports de force politique entre clans puissants et pouvoir royal.

연정설은 초기 관부들이 왕권을 뒷받침하는 기구와 호족들의 권익을 대변하 는 기구로 이원화되어 있었다는 시각으로 접근했다. 광평성은 국가의 의사결정 을 담당하는 중심 관부로 파악되었는데, 연정설에서는 광평성이 호족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대변하는 창구였다고 해석하며, 연구자에 따라서는 신라 화백회의의 전통으로 소급하기도 한다. 한편 내봉성은 왕명의 출납 및 인사행정 등과 관련된 기구로 파악되었다.

L’approche des tenants de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consistait à dire que l’administration de la première période était de nature duelle : constituée d’organes de soutien du pouvoir royal d’un côté, et de bureaux représentant pouvoir et intérêts des clans puissants, de l’autre. Le Grand conseil d’État, compris comme étant l’institution centrale en charge de prendre les décisions de l’État, est considéré dans le cadre de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comme étant le lieu d’expression recueillant les avis des clans puissants ; et, en cela, certains spécialistes en font remonter la tradition à celle du « Conseil pour la concorde » (和白會議, cor. hwabaek hoeŭi) du Silla. D’autre part, le Conseil intime était compris comme le bureau lié à la délivrance des ordres royaux ainsi qu’à la gestion du personnel administratif (la carrière des hommes d’État).

 

관부체계에 반영된 호족과 왕권의 관계는 순군부와 병부의 관계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군사력은 연합정권 성립에 가장 기초적인 변수이다. 그런데 고려 초기에는 군사권과 관련하여 두 개의 관부가 존재하다가, 그중 순군부가 뒤에 폐지되었다. 또한 순군부 관리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나, 순군부 관리를 임용할 때 출신지가 고려된 사례 등이 보인다. 연정설은 이런 논거에 기반하여 순군부가 여러 호족의 군사력과 연결된 일종의 협의체적 군사지휘권의 통수부 였다고 이해했다. 반면 병부는 군사에 관한 왕명을 실행하는 기관으로 보았다.

Pour la compréhension des relations entre clans puissants et pouvoir royal telles que reflétées à travers l’organisation administrative, les rapports entre le département de direction des Armées et le ministère de l’Armée firent l’objet d’une attention particulière. En effet, la force militaire est la variable la plus fondamentale pour l’établissement du pouvoir fédératif. Cependant, on constate que sur les deux bureaux liés aux affaires militaires qui existaient au début du Koryŏ, le département de direction des Armées fut supprimé. De plus, on observe que la gestion du département suscita une révolte et que, d’autre part, il est question de prendre en compte l’origine des futurs nommés dans cette institution. Sur la base de ces faits,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explique que le département de direction des Armées devait être la plus haute instance de commandement reposant sur la coopération des forces militaires des divers clans puissants. À l’opposé, le ministère des Armées est vu comme l’organe d’exécution des ordres royaux relatifs aux affaires militaires.

 

나아가 군사권에 관련된 관부가 이원적으로 존재한 것은 호족의 군사권을 국왕이 권력구조 속에 흡수시키지 못한 결과라고 이해했다. 곧 고려가 호족들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통일전쟁을 수행한 만큼 이를 통할하는 관부가 필요했을 것인데, 그것이 바로 순군부였다는 해석이다. 나아가 순군부가 병부보다 서열상 상위에 있었다는 데 근거하여, 당시 호족들의 군사력이 고려 정부의 군사력보다 우위에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했다.

De là, les spécialistes ont compris l’existence d’une administration militaire bicéphale comme étant le produit de l’impossibilité pour le souverain d’intégrer le pouvoir militaire des clans puissants dans la structure du pouvoir dépendant directement de lui. Donc, ils en déduisent que le Koryŏ dut recourir à la force militaire des clans puissants pour mener à bien la guerre d’unification en faisant appel à une administration qui la dirige : la département de direction des Armées, précisément. Ce faisant et allant plus loin, ils ont supposé que le département de direction des Armées se trouvait dans une position hiérarchiquement supérieur au ministère, et que la force armée des clans puissants devait l’emporter sur celle du gouvernement du Koryŏ.

 

하지만 고려 초기의 관부를 호족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데 대해서는 반론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당시의 관부체계를 호족과 결부시켜 설명하기에는 자료적 뒷받침이 약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특히 호족들의 군사적 협의체로 설명된 순군부에 대해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곧 순군부 관리를 국왕이 임명하는 한 그 군사권이 국왕의 통제 바깥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순循'은 '순찰'의 의미이므로 순군부는 왕권을 보위하기 위해 순찰 감시의 기능을 담당한 기구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호족들이 거느렸던 병력도 호족들이 자의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병이 아니라 국가의 군사지휘체계에 편입되어 왕명에 따라 움직이는 왕병이었다고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 순군부와 병부는 그 군사력의 성격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왕병으로서 기능적 측면에 서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Toutefois, l’explication au sujet des relations contractées entre l’administration et les clans puissants de la première période du Koryŏ suscita de nombreuses réactions. Ce qui fut principalement désigné comme problématique résida dans le fait que l’explication de la collusion entre système administratif et clans puissants était insuffisamment étayée par les sources. Le fait de considérer le département de direction des Armées comme un système d’association militaire des clans puissants fut particulièrement critiqué. Ainsi, dans la mesure où le souverain nommait les fonctionnaires de ce département, il devenait difficile d’affirmer que le pouvoir militaire de cette administration se situait hors du contrôle royal et, le sens même du sun (循) de sun’gubu, signifiant « patrouille » sunch’al (巡察), impliquait que sa fonction était l’inspection et la surveillance en vue de la protection de l’autorité royale. De là, l’idée que les troupes commandées par les clans puissants ne constituaient pas une force armée d’ordre privé que les clans pouvaient utiliser comme bon leur semblait, mais bien des armées obéissant aux ordres du souverain et intégrées dans le système de commandement de l’État. Finalement, il s’agissait de dire qu’entre le département de direction des Armées et le ministère de l’Armée, la différence ne résidait pas dans la nature de la force militaire, mais dans la fonction en tant que composantes de la même armée roy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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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제도

 

고려 초기의 지방제도는 군현제 형식을 취했지만, 성종 초까지 외관이 파견되 지 않았고 이후에도 일부 군현에만 외관이 설치되었다. 이런 사정은 외관 파견을 기본원리로 하는 군현제에 비추어볼 때 매우 예외적이고, 그 배경에는 호족의 존재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L’administration provinciale

 

Les institutions provinciales de la première période du Koryŏ avaient bien pris la forme d’un système en deux catégories de districts (郡縣制), les kun (郡), de première classe, et les hyŏn (縣), de seconde classe ; cependant, jusqu’au début du règne de Sŏnjong (成宗, r. 981-997), l’État n’y envoyait aucun fonctionnaire de province (外官), et même par la suite, ce ne fut seulement que dans une partie d’entre eux qu’ils y furent nommés. Une telle situation est bien éloignée du principe même sur lequel se fonde le système des districts à savoir leur administration par l’envoi de fonctionnaires nommés par le centre ; et il est courant de la justifier en y voyant l’intervention des clans puissants.

 

연정설은 이와 관련하여, 호족이 독자적으로 일정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중앙정부는 이들을 매개로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간접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런 지배방식의 구체적 사례로 제시되는 것이 사심관제事審官制이다. 사심관제란 중앙의 공신이나 고관이 연고지의 운영에 일정한 책임을 지는 제도이다. 중앙권력에 의해 획일화된 중앙집권체제가 수립되지 못했다는 것은 호족연합정권의 가장 중요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À ce sujet, la théorie de la fédération expliquait que les clans puissants avaient le contrôle particulier de certaines zones, mais que le gouvernement central pouvait assurer indirectement   son   pouvoir   sur   les   provinces   par   leur   intermédiaire.   Un   tel   mode d’administration est illustré par l’exemple concret du système des fonctionnaires inspecteurs sasim kwanje (事審官制). Ce système confiait à des sujets méritants de la capitale ou à de hauts fonctionnaires une certaine responsabilité de la gestion de lieux avec lesquels ceux-ci étaient liés ( 緣故地 ). L’impossibilité pour le pouvoir central d’établir un système de gouvernement uniforme (sur le territoire) aurait été le signe le plus visible du  pouvoir fédératif des clans puissants.

 

한편 비판론은 외관이 파견되지 않은 사정이 예외적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중앙집권화를 구현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해진 간접지배라는 설명에는 견해를 달리했다. 곧 귀부 이후 호족의 지방지배는 중앙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며, 호족은 그 지배력을 임시적으로 위임받은 것으로서 호족의 세력기반을 국왕 자신의 것으로 직접 흡수할 수 없었던 당시의 단계적 상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비판론에서는 호족의 지방지배를 당시 권력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요소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연정설에서 흔히 지적되는 호족의 독립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D’un autre côté, la thèse critique, tout en reconnaissant le caractère d’exception de l’absence d’envoi de fonctionnaires de province, expliquait différemment la situation : dans l’impossibilité d’exercer partout son pouvoir, le centre ne pouvait que recourir à un mode indirect d’administration. Ainsi, après leur adhésion [au pouvoir dynastique], la domination exercée par les clans puissants dans les provinces n’aurait été que le résultat de la reconnaissance par l’État de leur légitimité ; et ce, de manière provisoire, si bien que leur pouvoir, en fin de compte, ne refléterait qu’une étape au cours de laquelle le gouvernement central se trouvait dans l’incapacité de l’absorber totalement. Les tenants de la thèse critique n’ont pas admis que la position hiérarchique des clans puissants en province puisse être définie comme un véritable pouvoir. Par conséquent, ils ne reconnaissent pas non plus l’indépendance des clans souvent soulignée par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Texte original

Traduction

논쟁의 의미와 전망

 

글의 서두에서 지적했지만, 연정설과 비판론은 고려 초기 역사상에 접근하는 방법의 차이를 보여준다. 연정설은 신라와 구분되는 고려 정치체제의 수립에 주목한다. 신라에서는 폐쇄적인 골품제를 통해 정치운영이 이루어지고 지방은 이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었지만, 고려에서는 지방호족들이 정치에 참여했고 이를 기반으로 지배층이 확대되는 모습이 있었다고 지적되었다. 이는 고려 초기를 고대에서 중세로 나아가는 전환점으로 보는 시각의 한 축이 되었다.

Signification et perspective du débat

 

Comme je l’ai indiqué au début de cet article,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et sa thèse critique révèlent une différence d’approche historique de la première période du Koryŏ.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centre son attention sur l’établissement du régime politique du Koryŏ en tant que celui-ci se distingue de celui du Silla. Alors qu’au Silla, les provinces se trouvaient totalement exclues d’un exercice politique organisé au sein du système fermé des « rangs d’os » kolp’umje ( 骨 品制 ), au Koryŏ, en revanche, les clans puissants des provinces participaient à la vie politique de sorte que la classe dirigeante est vue comme élargie par rapport à la période antérieure. En cela, l’approche consiste à voir dans une telle (la) transition opérée au début du Koryŏ, le tournant entre période ancienne et période médiévale.

 

이런 시각은 고려사회의 전반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연정설은 고려가 문벌귀족사회였다고 보는 견해와 연결된다. 중앙에 진출한 호족은 문벌귀족으로 성장하여 고려사회 지배층으로 유지되었으며, 호족연합 정권은 이런 문벌귀족사회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견해는 신라의 골품귀족에서 호족을 거쳐 문벌귀족으로 이어지는 지배층이 그 외연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혈연에 기반했다는 공통성을 갖는다고 보아, 나말여초가 변동보다 지속의 측면을 띠게 되어 전환기로서의 의미가 흐려지는 문제가 있다.

Un tel point de vue est lié à la façon se considérer la société du Koryŏ dans son ensemble. Promus [à l’origine] par la cour, les clans puissants se seraient développés en aristocratie structurée en ligues, qui se serait ensuite maintenue en classe dirigeante au sein de la société, de sorte que le régime politique des clans fédérés aurait été le socle donnant naissance à la société aristocratique des ligues. Toutefois, s’il en fut ainsi, cela voudrait dire que la transition entre « aristocratie des rangs d’os » et « aristocratie des ligues » en passant par l’étape des clans puissants – en dépit du fait qu’elle représente, à ses marges, un élargissement de la classe dirigeante – s’appuie fondamentalement sur le principe de la continuité des liens biologiques, supposant dès lors que la transition entre la fin du Silla et le début du Koryŏ fut, intrinsèquement, plus affaire de continuité que véritable tournant.

 

한편 비판론의 논지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고려를 귀족사회로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관료제에 입각하여 운영된 사회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사회의 운영원리를 귀족제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견해는 그 성립기반인 호족연합정권 역시 부정하는 입장으로 연결된다.

Par ailleurs, les sujets centraux du débat de la thèse critique peuvent être compris comme se déployant dans deux directions. La première consiste à dire que la société du Koryŏ ne peut être considérée comme aristocratique dans la mesure où celle-ci repose sur un mode de gestion s’appuyant plutôt sur un fonctionnariat. L’idée que les principes de fonctionnement de la société du Koryŏ ne repose pas sur un système aristocratique est liée à la position niant la conception d’un régime politique fondé sur une fédération de clans puissants.

 

다른 논점은 왕조국가의 정치체제를 이해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왕조국 가에서는 일반적으로 국왕을 정점으로 정치체제가 성립 - 운영된다. 비판론은 고려 초기의 정치체제를 규정하면서 호족으로 인해 나타나는 특수한 측면보다 국왕을 정점으로 형성되는 일반적 원리가 더 본질적이고 규정적이라고 보았다. 이런 입론은 순군부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해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L’autre sujet concerne la façon de comprendre le système politique de l’État dynastique (王朝 國家 ). Dans l’État dynastique le régime est généralement établi et géré en prenant le souverain pour sommet. Ainsi, dans la thèse critique, la conception du système politique de la première période du Koryŏ recourt au principe général du roi comme sommet, considéré comme plus fondamental que les aspects particuliers induits par les clans puissants. Une telle position apparaît nettement dans la façon de comprendre le rôle de différents types d’institutions à commencer par le département de direction des Armées.

 

이처럼 연정설을 둘러싼 논쟁은 역사적 전환기로서 고려 초기에 주목함으로써 그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그 의미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성격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De la sorte, les débats entourant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se révèlent particulièrement chargés de signification dans la mesure où ils ont constitué la base à partir de laquelle ont été menées des recherches approfondies portant sur le début du Koryŏ en tant que tournant historique majeur. Toutefois, en dépit de l’enjeu, il convient de noter quelques points problématiques liés à la nature de ces débats.

 

우선 논쟁의 핵심인 '호족' 의 범주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현재 호족이라는 용어는 적합성 여부와 별도로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것 아닌가 한다. 호족 개념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는 것도 그간 이 용어가 모호하게 사용되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Tout d’abord, il est nécessaire de définir clairement la catégorie dite des « clans puissants », au cœur de la controverse. Actuellement, le terme « clans puissants » est-il pertinent, et n’a-t-il pas été utilisé dans une acception par trop englobante ? L’origine du débat à propos de la notion de « clans puissants » est nécessairement lié à l’usage flou que celui-ci a acquis.

 

예를 들어 고려 초기 지방세력 중에는 중앙에 올라와 정착한 부류도 있고 지방에 남아 토착세력으로 유지된 부류도 있었다. 기존에는 중앙에 진출한 부류도 재지적 기반을 중요한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호족으로 통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고려 초기의 국가체제운영에서 중앙에 진출한 부류와 지방에 남은 부류가 일정하게 구분되고 있었다면, 이 양자는 개념적으로 도 구분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당시 정치체제의 모습이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개인과 집단을 모두 호족이라고 부르는 것도 방법론적으로 재고될 부분이다.

Ainsi, par exemple, parmi les forces provinciales de la première période du Koryŏ, une partie d’entre elles montèrent à la capitale et s’y établirent, tandis qu’une autre demeura dans les provinces comme pouvoir local. Auparavant, il était courant de nommer indifféremment « clans puissants » ceux d’entre eux qui s’étaient fixés dans le centre politique du pays dans la mesure où leur base locale jouait un rôle important. Cependant, si l’on considère que la gestion de l’État impliquait de facto une certaine distinction entre la catégorie des clans établis à la cour et celle des ceux restés dans les provinces, il devient nécessaire de la distinguer du point de vue conceptuel. Ce n’est que de cette manière qu’il sera possible de matérialiser leur présence respective et distincte dans le système politique. En outre, il faut reconsidérer, du point de vue méthodologique, le fait de nommer indifféremment « clans puissants » individus et groupes.

 

다음으로 기존 논의들은 실증적 기반이 약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연정설 논쟁은 여러 정치 과정과 제도에 대한 실증적 연구에 기반해 제기된 것이라기보다, 우리나라의 역사 과정 속에 고려 초기를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때문에 연정설이든 비판론이든, 해당 입론을 뒷받침하 기 위해 실증적 연구가 수반되는 양상이었다. 그 결과 기존 연구들 중에는 어느 한편의 입론에 맞추어 사실을 해석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물론 이런 입론의 제기와 그에 수반한 연구의 진행이 고려 초기를 심도 있게 조망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연구가 더욱 진전되기 위해서는 특정 입론에서 벗어나 제도 자체의 운영원리와 실태를 밝혀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Ensuite, les discussions qui eurent lieu jusqu’à présent ont été limitées car fondées sur des éléments peu consistants d’un point de vue objectif. Le débat sur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procède davantage d’une question portant sur la position à attribuer au début du Koryŏ au sein de l’Histoire de Corée plutôt que d’une analyse s’appuyant sur une étude objective des événements et des institutions politiques. C’est pourquoi, les études publiées apparaissaient [le plus souvent] comme le fruit d’une recherche destinée à appuyer les positions respectives de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ou de la thèse critique. Il en est résulté que parmi les études menées jusqu’à maintenant certaines montrent une tendance à interpréter les faits de manière à adopter les positions d’un camp [au détriment de l’autre]. Certes, on ne peut nier que les recherches, qui ont proposé et soutenu ces positions, ont contribué à approfondir les études historiques relatives au début du Koryŏ. Néanmoins, afin de faire avancer davantage la recherche à partir du point où nous en sommes actuellement, il est nécessaire de sortir d’un positionnement fixé a priori pour interpréter en eux-mêmes les principes de fonctionnement et les formes des institutions.

 

이를 위해서는 연정설과 비판론이 상호보완적인 방향으로 결합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느 시기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분열기를 수습하면서 성립한 왕조 초기의 정치 과정이나 제도에는 현실적으로 국가(왕권)와 호족 쌍방의 입장이 함께 투영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고려 국가 성립 과정에서 볼 때 호족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국가체제가 수립 운영되는 상황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국가의 논리를 배제할 수는 없다. 호족이 국가체 제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 한, 이들의 논리도 국가제도의 형식 속에서 구현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당 제도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에 반영된 호족의 논리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국가와 호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규정적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사실 연구자의 시각에 의해 규정되는 면이 강한 데다,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려 초기의 사정을 감안할 때 그 자체가 편향적 역사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이다.

Dans ce but, il conviendra de combiner les éléments de la thèse de la fédération et ceux de sa thèse critique dans un sens de complémentarité. Comme il en est à toute époque, et en particulier pour traiter les périodes de scission, les événements et institutions politiques du début de l’établissement d’une dynastie ne peuvent en pratique que refléter conjointement la situation des deux partis que sont l’État (le pouvoir royal) et les clans puissants (élites locales). En l’occurrence, considérée dans le processus de mise en place de l’État du Koryŏ, l’existence des clans puissants revêt une signification très importante. Toutefois, il n’empêche que la logique étatique qui prévaut d’ordinaire dans l’instauration et le fonctionnement d’un État ne peut être écartée de l’interprétation. Dans la mesure où les clans puissants n’existent pas en dehors du système étatique, l’explication à leur sujet ne peut que s’inscrire dans une forme institutionnelle. Pour comprendre ces formes, il faut au préalable avoir saisi la structure et le fonctionnement réels des institutions concernées puis prendre en compte ce qu’ils nous apprennent de ces clans puissants. La question de savoir lequel, de l’État ou du groupe des clans puissants, fut le plus normatif, dépend en fait largement de l’angle d’approche des chercheurs ; de plus, quand on considère l’état d’indigence absolue des sources de la première période du Koryŏ, il faut reconnaître que la situation n’a pu qu’inciter à la production d’une historiographie tendancieuse.

 

 
 

Autour du texte:

Système politique et pouvoir fédératif des clans puissants hojok de la première période du Koryŏ par Yun Kyŏngjin, actuellement enseignant chercheur dans le département des Sciences humaines de l’université nationale de Kyŏnsang, spécialiste de l’histoire de la période du Koryŏ.  Principale publication : « Questions liées aux institutions provinciales des périodes anciennes et médiévales de la Corée » (한국 고대 중세 지방제도의 제문제).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