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e original : 1-4. 고려 초기의 정치체제와 호족연합정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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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후삼국의 분열과 통일전쟁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립했다. 9세기 말엽 신라의 국가체제는 큰 혼란에 빠졌고, 지방 각지에서 중앙정부의 지배로부 터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이들이 대두했다. 연구자들은 이들을 보통 "호족豪族"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통일 과정은 곧 호족들의 통합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는 호족을 회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조 왕건은 이른바 중폐비사重幣卑辭(많은 예물과 겸손한 말)와 정략결혼을 통해 호족들을 고려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고, 이것이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호족연합정권설豪族聯合政權說 (이하 "연정설"로 약칭)은 바로 호족들을 통해 고려국 가 성립의 의의를 찾는 연구시각이다. 연정설은 고려 초기 정치체제가 국왕 중심의 집권적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각지에서 대두한 호족들의 연합형태를 취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고려는 신라 말부터 대두한 지방호족들을 회유와 포섭을 통해 통합해나갔고, 이것이 통일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고려 초기 정치체제에서 국왕권은 호족에 대해 일방적 우위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학계 일각에는 연정설에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이하 "비판론"으로 약칭). 비판론은 새로운 사회세력으로서 호족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고려 건국의 의미나 고려 초기 정치체제를 호족연합정권으로 설명하는 것은 반대한다. 국가 내지 국왕 주도의 정치체제로 봐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고려 초기의 역사를 이해할 때 연정설이 호족에 무게를 둔다면, 비판론은 국왕 내지 국가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연정설 논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기로 평가되는 고려 초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과 관련된 논쟁이다. 각 입론들은 고려 초기의 정치 과정과 정치제도 등을 통해 논지를 보강하고 있는데, 주요 논쟁점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자 각 연구자들에 따른 개별적인 부문 해석의 편차는 생략하고, 두 논설의 대비를 위해 포괄적으로 정리해보겠다.
연정설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호족"이 누구인지 살펴봐야 한다. 호족은 보통 신라 말에 지방사회를 기반으로 대두하여 고려 성립에 기초가 된 지방세력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고려 초기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사용되었지만, 처음부터 그 개념이나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호족의 개념이나 성격, 나아가 해당 용어의 적합성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다.
호족의 구체적 성격을 고려 초기에 대두한 지방세력으로 제시한 것은 1960년 대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고려 초기의 호족을 혈연에 기반한 족단族團의 수장首長으로 보았다. 이 족단은 고대사회의 구성을 계승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따라서 호족을 기반으로 삼는 고려 초기사회는 고대사회라고 규정되었다.
반면 한국 학계에서는, 일부 이견이 있지만 고려 초기를 중세사회로 보는 견해가 일반론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고려 초기를 고대사회로 보는 일본 학계의 견해에 대한 다각적 비판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비판들은 족단 내지 혈연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반론이었기 때문에, 호족이라는 용어 자체는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호족은 고대적 성격을 반영한 존재가 아니라 신라의 고대적 골품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중세사회를 열었던 주체세력으로 부각되었다. 연정설은 바로 이 호족들과 고려의 국가체제 를 직접 연결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입론이었다.
하지만 이 견해는 주로 정치적 측면에서 접근한 것으로서, 그 사회경제적 기반에 대한 검토가 부족했다. 따라서 호족이 혈연공동체에 기반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한 비판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일본 학계에서 제시하는 호족론과 의 차별성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에 1980년대부터는 고려 성립을 지배세력의 형성과 그들에 의한 정치체제 의 수립이라는 시각에서 설명하려는 기존의 연구경향을 비판하고, 사회사적 시각에서 지방사회의 성장과 재편이라는 측면에 주목하여 고려 국가체제의 성립을 이해하려는 시각이 대두했다. 이런 방법론적 전환은 호족 용어의 적합성 여부에 대한 비판을 낳았다.
비판의 요지는 호족이란 용어가 중국사나 일본사에서 고대사회를 구성 - 유지하는 사회적 - 역사적 규정성을 갖고 있으므로 고려 초기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근래에는 신라 말 국가체제가 동요하면서 지방에서 자위공동체自衛共 同體가 형성되고, 내부에 존재하던 계서적階序的 질서에 기반해 고려의 국가체제 가 성립했다는 견해가 제기되면서, 지방사회의 상층계급을 나타내는 용어로 "호부층豪富層"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용어는 호족이 족단이라는 혈연집단을 상정하는 것과 달리 "호세부민豪勢富民", 곧 지방사회에서 사회적 -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집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사회사적 방법론의 적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호족이 고대적 성격의 족단과 결부된다는 입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호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통설화되어 대다수의 연구자들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에 새로운 용어를 도입한 제반 견해들이 대안으로서 미흡하다고 반박하면서 호족 개념을 좀 더 포괄적으로 규정하여 그 유용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견해도 있다 지방에서 혈연성에 기초하여 대두한 지방세력을 "토호土豪"로 규정하고, 이들의 연합을 통해 형성되는 지배집단을 호족 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호족들의 귀부歸附가 고려 통일에 결정적 기반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귀부"란 호족이 고려에 정치적으로 귀속했음을 말하는 것으로, 고려 왕실과 호족의 정치적 결합을 뜻한다. 이 귀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시각차이가 나타난다.
연정설에서는 호족의 귀부가 상호의 이익을 대등하게 반영하는 호혜적 관계 에 기반했다고 본다. 곧 호족은 귀부와 함께 적대적 또는 독립적 태도를 버리고 고려에 군사적 - 경제적으로 협조했고, 대신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받았다는 것이다. 고려 통일에 호족들의 협조가 결정적 공헌을 한 만큼, 고려 초기의 정치권력 구성에서 호족의 입지는 매우 강력했다고 해석되었다. 왕건이 호족들 과 결혼정책을 추진하여 많은 수의 부인을 둔 것이나, 귀부 호족에게 성씨를 내려주는 등의 조치는 호족들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호족의 자제를 수도에 머물게 함으로써 인질과 자문의 효과를 도모했던 기인제其人制 역시, 다른 한편 호족과 중앙권력의 연결을 통해 지방에서 호족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기능을 했다고 이해되었다.
반면 비판론에서는 호족의 귀부가 다르게 평가되었다. 귀부는 호혜적 관계에 기반한 연합이 아니라 군신君臣의 상하관계가 성립하는 조치라고 해석했다. 호족의 귀부는 강력한 권력에 귀속함으로써 기존의 지배력을 유지해야 했던 호족들의 불가피한 선택으로서, 호족이 인질을 보내 국왕의 통제 속에 편입되는 조치였다고 규정했다, 이렇게 볼 때, 호족의 귀부는 호혜적 관계에 기반한 정치적 연합으로 설명될 수 없다. 고려 초기 중앙과 지방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일정한 연합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지만, 왕조 출범 자체가 호족들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므로 연합정권으로 설명하기 곤란하 다는 견해 역시 같은 맥락이다.
특정 시기 정치권력의 구조와 운영방식은 무엇보다 권력상층을 구성하는 관부체계를 통해 표현된다. 때문에 중앙의 상층관부에 대한 분석은 특정 시기의 권력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관건으로 간주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권력의 존재양태는 모든 권력의 정점인 왕권王權과 이를 뒷받침하는 한편 일정하게 제약하기도 하는 신권臣權의 상관관계를 통해 설명된다. 이때 관부의 구성 혹은 정령의 전달체계 등이 왕권신권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가 주된 분석대상이 된다.
고려 초기 연정설 논쟁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부분은 중앙관제에 대한 것이었다. 3성 6부제를 도입한 정치체제로 정비되기 전의 주요 관부로는 광평 성廣評省, 내봉성內奉省, 내의성內議省, 순군부徇軍部, 병부兵部 등이 있었다. 이들 관부가 당시 권력구조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호족과 왕권 사이의 권력관계와 결부되어 검토되었다.
연정설은 초기 관부들이 왕권을 뒷받침하는 기구와 호족들의 권익을 대변하 는 기구로 이원화되어 있었다는 시각으로 접근했다. 광평성은 국가의 의사결정 을 담당하는 중심 관부로 파악되었는데, 연정설에서는 광평성이 호족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대변하는 창구였다고 해석하며, 연구자에 따라서는 신라 화백회의의 전통으로 소급하기도 한다. 한편 내봉성은 왕명의 출납 및 인사행정 등과 관련된 기구로 파악되었다.
관부체계에 반영된 호족과 왕권의 관계는 순군부와 병부의 관계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군사력은 연합정권 성립에 가장 기초적인 변수이다. 그런데 고려 초기에는 군사권과 관련하여 두 개의 관부가 존재하다가, 그중 순군부가 뒤에 폐지되었다. 또한 순군부 관리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나, 순군부 관리를 임용할 때 출신지가 고려된 사례 등이 보인다. 연정설은 이런 논거에 기반하여 순군부가 여러 호족의 군사력과 연결된 일종의 협의체적 군사지휘권의 통수부 였다고 이해했다. 반면 병부는 군사에 관한 왕명을 실행하는 기관으로 보았다.
나아가 군사권에 관련된 관부가 이원적으로 존재한 것은 호족의 군사권을 국왕이 권력구조 속에 흡수시키지 못한 결과라고 이해했다. 곧 고려가 호족들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통일전쟁을 수행한 만큼 이를 통할하는 관부가 필요했을 것인데, 그것이 바로 순군부였다는 해석이다. 나아가 순군부가 병부보다 서열상 상위에 있었다는 데 근거하여, 당시 호족들의 군사력이 고려 정부의 군사력보다 우위에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 초기의 관부를 호족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데 대해서는 반론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당시의 관부체계를 호족과 결부시켜 설명하기에는 자료적 뒷받침이 약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특히 호족들의 군사적 협의체로 설명된 순군부에 대해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곧 순군부 관리를 국왕이 임명하는 한 그 군사권이 국왕의 통제 바깥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순循'은 '순찰'의 의미이므로 순군부는 왕권을 보위하기 위해 순찰 감시의 기능을 담당한 기구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호족들이 거느렸던 병력도 호족들이 자의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병이 아니라 국가의 군사지휘체계에 편입되어 왕명에 따라 움직이는 왕병이었다고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 순군부와 병부는 그 군사력의 성격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왕병으로서 기능적 측면에 서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고려 초기의 지방제도는 군현제 형식을 취했지만, 성종 초까지 외관이 파견되 지 않았고 이후에도 일부 군현에만 외관이 설치되었다. 이런 사정은 외관 파견을 기본원리로 하는 군현제에 비추어볼 때 매우 예외적이고, 그 배경에는 호족의 존재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정설은 이와 관련하여, 호족이 독자적으로 일정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중앙정부는 이들을 매개로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간접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런 지배방식의 구체적 사례로 제시되는 것이 사심관제事審官制이다. 사심관제란 중앙의 공신이나 고관이 연고지의 운영에 일정한 책임을 지는 제도이다. 중앙권력에 의해 획일화된 중앙집권체제가 수립되지 못했다는 것은 호족연합정권의 가장 중요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비판론은 외관이 파견되지 않은 사정이 예외적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중앙집권화를 구현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해진 간접지배라는 설명에는 견해를 달리했다. 곧 귀부 이후 호족의 지방지배는 중앙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며, 호족은 그 지배력을 임시적으로 위임받은 것으로서 호족의 세력기반을 국왕 자신의 것으로 직접 흡수할 수 없었던 당시의 단계적 상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비판론에서는 호족의 지방지배를 당시 권력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요소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연정설에서 흔히 지적되는 호족의 독립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글의 서두에서 지적했지만, 연정설과 비판론은 고려 초기 역사상에 접근하는 방법의 차이를 보여준다. 연정설은 신라와 구분되는 고려 정치체제의 수립에 주목한다. 신라에서는 폐쇄적인 골품제를 통해 정치운영이 이루어지고 지방은 이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었지만, 고려에서는 지방호족들이 정치에 참여했고 이를 기반으로 지배층이 확대되는 모습이 있었다고 지적되었다. 이는 고려 초기를 고대에서 중세로 나아가는 전환점으로 보는 시각의 한 축이 되었다.
이런 시각은 고려사회의 전반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연정설은 고려가 문벌귀족사회였다고 보는 견해와 연결된다. 중앙에 진출한 호족은 문벌귀족으로 성장하여 고려사회 지배층으로 유지되었으며, 호족연합 정권은 이런 문벌귀족사회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견해는 신라의 골품귀족에서 호족을 거쳐 문벌귀족으로 이어지는 지배층이 그 외연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혈연에 기반했다는 공통성을 갖는다고 보아, 나말여초가 변동보다 지속의 측면을 띠게 되어 전환기로서의 의미가 흐려지는 문제가 있다.
한편 비판론의 논지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고려를 귀족사회로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관료제에 입각하여 운영된 사회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사회의 운영원리를 귀족제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견해는 그 성립기반인 호족연합정권 역시 부정하는 입장으로 연결된다.
다른 논점은 왕조국가의 정치체제를 이해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왕조국 가에서는 일반적으로 국왕을 정점으로 정치체제가 성립 - 운영된다. 비판론은 고려 초기의 정치체제를 규정하면서 호족으로 인해 나타나는 특수한 측면보다 국왕을 정점으로 형성되는 일반적 원리가 더 본질적이고 규정적이라고 보았다. 이런 입론은 순군부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해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처럼 연정설을 둘러싼 논쟁은 역사적 전환기로서 고려 초기에 주목함으로써 그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그 의미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성격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우선 논쟁의 핵심인 '호족' 의 범주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현재 호족이라는 용어는 적합성 여부와 별도로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것 아닌가 한다. 호족 개념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는 것도 그간 이 용어가 모호하게 사용되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고려 초기 지방세력 중에는 중앙에 올라와 정착한 부류도 있고 지방에 남아 토착세력으로 유지된 부류도 있었다. 기존에는 중앙에 진출한 부류도 재지적 기반을 중요한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호족으로 통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고려 초기의 국가체제운영에서 중앙에 진출한 부류와 지방에 남은 부류가 일정하게 구분되고 있었다면, 이 양자는 개념적으로 도 구분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당시 정치체제의 모습이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개인과 집단을 모두 호족이라고 부르는 것도 방법론적으로 재고될 부분이다.
다음으로 기존 논의들은 실증적 기반이 약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연정설 논쟁은 여러 정치 과정과 제도에 대한 실증적 연구에 기반해 제기된 것이라기보다, 우리나라의 역사 과정 속에 고려 초기를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때문에 연정설이든 비판론이든, 해당 입론을 뒷받침하 기 위해 실증적 연구가 수반되는 양상이었다. 그 결과 기존 연구들 중에는 어느 한편의 입론에 맞추어 사실을 해석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물론 이런 입론의 제기와 그에 수반한 연구의 진행이 고려 초기를 심도 있게 조망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연구가 더욱 진전되기 위해서는 특정 입론에서 벗어나 제도 자체의 운영원리와 실태를 밝혀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연정설과 비판론이 상호보완적인 방향으로 결합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느 시기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분열기를 수습하면서 성립한 왕조 초기의 정치 과정이나 제도에는 현실적으로 국가(왕권)와 호족 쌍방의 입장이 함께 투영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고려 국가 성립 과정에서 볼 때 호족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국가체제가 수립 운영되는 상황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국가의 논리를 배제할 수는 없다. 호족이 국가체 제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 한, 이들의 논리도 국가제도의 형식 속에서 구현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당 제도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에 반영된 호족의 논리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국가와 호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규정적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사실 연구자의 시각에 의해 규정되는 면이 강한 데다,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려 초기의 사정을 감안할 때 그 자체가 편향적 역사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