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e original : 1-6. 실학, 환상인가 실체인가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Onglets principaux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 실학 »이라는 역사용어는 1930 년대 우리나라의 민족운동과 함께 만들어졌다. 1930 년대 민족운동 과정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운동의 한 돌파구로 조선학운동을 추진했고, 조선학운동의 핵심내용이 바로 실학이었다. 따라서 실학 연구와 논쟁 과정을 추적하면 곧 한국 근대 역사학의 궤도가 된다. 1930-40 년대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실학 연구가 이루어졌다면, 1950 년대 이후는 실학 연구가 민족운동을 계승하면서 식민사학의 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학문적 차원의 연구로 발전하고 개별화되는 시기였다. 21 세기의 실학 연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 최근 한국학의 원형을 실학에서 찾으려는 시도도 보이는데, 21 세기 국제화시대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민족운동 시기의 조선학운동과 마찬가지로 국제화시대 한국학 연구의 출발점을 실학에서 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제당국은 식민지하 1930 년대의 민족운동을 최좌익, 좌익, 우익, 최우익으로 분류했는데, 최좌익은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운동, 좌익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 우익은 타협적 민족주의 계열, 최우익은 친일파를 지칭했다. 이 시기의 문화운동은 주로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을 중심으로 타협적 민족주의자까지 망라된 민족운동의 한 형태였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민족협동전선으로 1927 년 3 월에 조직된 신간회는 일제당국에 의해 합법적으로 공인된 민족운동단체였다. 그러나 신간회는 일제의 방해공작, 사회주의 진영의 노선 전환, 공인된 활동으로서 민족운동의 한계 등을 자각하여 1931 년 5 월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당시 신간회의 해체를 반대하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의 운동방향을 문화운동으로 전환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신간회 창립 이후 민중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던 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향을 모색했다. 1930-35 년 사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서 전개한 농촌운동, 브나로드운동, 충무공 현창운동 등이 그것이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벌인 문화운동의 주요내용은 ‘조선 문화 부흥운동’ 또는 ‘조선학 운동’이었다. ‘동아일보’ 등 일간지와 ‘신조선’ 등 월간지를 통해 전개된 조선학 운동은 문화적으로나마 민족의 주체성을 유지하려는 부르주아 민족운동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사상, 조선의 문화 속에서 조선의 고유한 특색을 찾아내려 애썼고 세계문화 속에서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견지하려고 했다.
1930 년대에 발표된 실학 관계 논문이나 기사를 보면, 우리가 지금 ‘실학’이라고 부르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문 경향에 대한 이해체계는 이때 정립되었다고 생각된다. 사실상 일제당국에 의해 관찬사료들이 대부분 독점된 상황에서 조선 사람들이 바로 전 시대인 조선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료는 개인이 편찬한 역사서나 개인문집 등이었다. 최남선 崔 南善이 조선 광문회를 통해 우리 고전을 간행한 것도 이런 상황에서 나왔을 거으로 생각된다. 1930 년대 조선학운동에 참여한 주요필진에는 정인보 鄭寅普, 안재홍 安在鴻, 문일평 文一平 등 민족주의자쁜만 아니라 백남운, 최익한 崔益翰 같은 사회주의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일간지나 ‘신조선’ 등 월간지를 통해 다산 또는 실학, 조선학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위당 정인보는 한학자로서 중국 망명생활을 거쳐 (1910-13) 1923 년부터 연희전문학교 전임으로서 한문학과 조선 문학, 조선사를 가르쳤으면, 주로 ‘동아일보’에 기고하여 조선학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당시 사회운동의 표면에 나서서 활동한 적은 없지만,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입장을 해방 후까지 지속했다. 그에세거 특기할 만한 것은 실학 연구 이외에 충무공 유적 보호운동에 앞장선 것을 들 수 있다.
충무공 유적 보호운동은 충무공의 종손이 갱인적 채무로 인해 충무공의 위토를 은행에 저당 잡혔다가 부채를 갚을 길이 없게 되어 담보로 잡힌 위토와 부속유물들을 경매에 붙인 일을 계기로 일어났다. 경매공고가 나가자 민족주의자들은 충무공 후손들의 처사에 분개하며 대대적인 유적보존사업을 전개하여 곧바로 조선교육협회 내에 충무공유적보존회를 창립하고 성금 1 만원을 모아 유적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충무공 현창사업까지 벌였다. 이 운동은 ‘동아일보’ 주도로 전개되었으며, 관련된 주요 사설이나 논설은 대개 위당이 집필했다. 위당은 ‘성호사설 星湖僿說’ ‘여유당전서 與猶 堂全書’ 등을 교열, 간행하는 가운데 ‘실학’의 체계를 세웠으며, 조선학 연구의 불길을 당겼다.
민세 안재홍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서, 1927 년 신간회 창립 당시 ‘조선일보’ 주필로서 적극 참여했고, 신간회 해소 때는 해소를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깊이 관여했더 ‘신조선사’를 통해 위당 정인보와 함께 ‘여유당전서’를 교열, 간행하는 등, 조선학 운동 및 실학 연구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
호암 문일평은 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통해 조선학 연구에 참여힜다. 그는 특히 실학을 ‘실사구시학 實事求是學’이라고 규정하여 실학의 고증학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이처럼 민족주의 계열 사학자들은 ‘5 천년간 조선의 얼’ 또는 ‘조선심 朝鮮心’이라는 조선의 고유한 특징과 성격을 파악하려 애썼다. 이들은 1910 년대 초기에는 중국 상하이 에서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벽초 홍명회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해 민족운동 진로를 모색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백남운, 최익한 등이 실학 연구에 관심을 보였다. 백남운은 일본 도쿄상업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사회경제사’ (1933),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 (1937)을 저술하여 유물사관에 입각한 보편적 세계사의 발전법칙을 한국사에 적용했다. 그는 « 근세 조선사상에 있어서 유형원, 이익, 이수광, 정약용, 서유구, 박지원 등, 말하자면 ‘현실학파’라고나 칭해야 할 우수한 학자가 배출되어 우리 경제학적 영역에 대한 선물로서 끼친 업적은 결코 적지 않을 것 »이라고 하면서 실학파를 ‘현실학파’라고 불렀고, 우리나라 학술발전사에서 귀중한 유산이라고 했다. 그는 다산 서거 100 주년 기념 강연회에서 다산을 ‘경세학적 형안의 소유자’로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조선학이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는 조선특수사정론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역시 반대했다. 즉 일제 식민통치자들의 조선특수사정론과 통하는 일제 관학자들의 조선특수사관이나 최남선, 신채호 같은 류의 한국사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조선특수사관에 모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최익한 역시 사회주의 진영의 인사로서,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3 1 운동에 관련되어 3 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사건과 관련되어 6 년을 복역한 일월회의 중진이었으며, 행방 후에는 장안파 공산당에 참여했다. 그는 ‘동아일보’에 60 여회에 걸쳐 ‘여유당전서를 독함’이라고 하는
비교적 학구적인 장편의 논문을 게재했다.
한편, 같은 사회주의자 중에서도 백남운, 최익한과 달리 이청원은 이런 관념적인 조선학 운동 분위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단군, 화랑, 정다산 등의 연구를 전환적 과도기의 낭만적 사대주의로 비판하면서, 제도와 사상을 논할 때는 먼저 당시 생산관계의 제약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정다산론에 대해서 정다산의 장점, 특점만을 왜곡하여 논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당시 농민의 활동이 놓여 있는 모순에 찬 현실의 진실된 사회적 거울로서 19 세기의 정다산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상과 같은 1930-40 년대의 실학 연구는 당시 제약된 영역의 운동만 용인되는 식민지 상황 속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운동의 한 방편으로 선택한 조선 문화운동, 조선학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실학이라는 역사용어는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일본인들은 조선학운동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실학과 관련된 몇 편의 연구들도 주로 조선 문화에 대한 중국 문화 또는 서양문화의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해방 후의 실학 연구는 해방 전의 업적을 계승했다. 천관우는 ‘반계 유형원 연구 – 실학 발생에서 본 이조 사회의 일 단면’에서 실학의 비조인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성격을 분석하고 토지소유관계, 세, 역, 공제, 과거제도, 학제, 국방체제 개혁안 등을 검토한 뒤, 조선 후기 실학파의 계보와 반게의 위치를 논했다.
천관우는 실학의 발전 과정을 준비기 (16 세기 중엽 – 17 세기 중엽), 맹아기 (17 세기 중엽 – 18 세기 중엽), 전성기 (18 세기 중엽 – 19 세기 중엽)로 나누고, 실학의 성격을 자유성, 현실성, 과학성(이를 실정 實正, 실용 實用, 실증 實證 이라는 이른바 삼실론 三實論이라고 명명했다) 으로 규정했다. 그는 실학이란 « 고증학을 학문의 방법으로 하고 사회정책, 자연과학, 국학, 후고학, 농학을 학문의 대상으로 한 — 그 수단의 하나로서 북학과 그 결과의 하나로서 백과사전파를 거느린 — 학문이 일파 »라고 정의했다.
천관우는 자신의 학문 역정에서 반계 유형원과 실학으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을 회고하면서 « 최남선 선생은 나에게 학문적 개안의 길을 터준 분이고 정인보 선생은 후일 나의 실학 공부에 지침이 되어주신 분 »이라고 했다. 해방 직전 대학 예과 시절에는 도피중이던 안재홍으로부터 뒤에 그가 «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로 정리한 내용과 같은 우리나라의 철학 체계에 대해 개인지도를 받은 바 있고, 실학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얻어들었기 때문에 그런 주제로 한국사를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최익한은 해방 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 여유당전서를 독함 »이라는 글을 기초로 1955 년에 « 실학파와 정다산 »이라는 저술을 간행했다. 여기에서 그는 지봉 이수광,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등 실학파 주요인물의 생애와 사상을 검토하여 실학의 체계를 정리하고, 이어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계보, 사상 등을 정리했다 (하편).
홍이섭도 1959 년 «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 연구 »를 출판했는데, 이는 그가 해방 전부터 꾸준히 보여온 실학에 대한 관심의 결과였다 그는 배재고등보 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다녔는데, 배재고보 시적에는 이윤재, 문일평 등에게서 조선사를 비웠으면, 언희전문 시적에는 위당 정인보, 외솔 최현배 등에게서 국학을 배웠다. 그는 해방 전(1944)에 « 조선과학사 »를 일본어로 간행했는데, 거기서 조선 후기의 실학을 ‘실증학파’라고 부르고 실증학파 내에 다시 역사학파, 지라학파, 언어학파, 사회정책적 경제학파, 북학파가 있다고 했다. 이는 당시의 실학 연구 수준을 반영한 것이었다. 실학을 실증학파라고 부르고 이를 과학사에서 언급한 것은 호암 문일평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해방 후 그는 « 다산 선생의 학문과 사상 », « 다산학의 현실성 » 등 다산에 관한 글들을 썼는데, 이런 관심의 결과가 «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 연구 »로 정리되었다. 책 말미에 1930 년대 다산 관계 연구논저 목록을 망라하여 실은 데서 보이듯이, 그의 다산 연구는 1930 년대 다산 연구 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한편 한우근, 김용덕에 의해 성호 이익, 초정 박제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한우근은 조선 후기사회를 이해하는 길잡이로 성호의 저술들을 검토했고, 이를 토대로 실학의 개념에 대한 기존인식에 이의를 제기하여 논쟁을 유발했다. 한우근은 실학이라는 요어는 유교나 성리학이 불교나 사장학 등에 대하여 스스로의 학문영역을 실학이라 지칭한 것이므로, 반드시 조선 후기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이른바 ‘실학’이라고 하는 학문경향은 오히려 ‘경세학’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 이조후기의 실학의 개념에 대하여 »). 전해종도 실학이라는 용어가 조선 후기에 나타난 새로운 학풍에만 적용될 수 없음을 중국의 사용례를 검색하여 주장하면서 한우근의 제안을 뒷받침했다 (« 석실학 »). 그러나 이 논쟁은 실학의 개념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계기는 되었으나,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문경향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60 년대에 들어와 실학 연구는 커다란 진전을 이루어냈다. 조선 후기사회를 정체론적 시각에서 보아왔던 이제까지의 시점에 대한 반성과 함께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에서 여러 사회경제적 연구들이 이루어진 데 임입은 것이었다. 김용섭, 강만길, 유원동, 송찬식, 김영호 등 여러 연구자들은 농업, 상업, 수공업 등 다양한 측면에서 조선 후기 사회의 사회경제적 변화양상들을 연구했다. 이런 연구에 힘입어 조선 후기사회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으며, 그런 인식의 변화를 토대로 실학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즉 사회경제사의 연구성과를 적극 수용하여 사상사에서도 실학의 위치가 재규정되었으며, 반대로 실학자 개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그 시기의 사회경제적인 모습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런 시각에서 김용섭은 1950 년대의 실학 연구 분위기에 일단 동의를 표하면서도 실학사상을 단순히 서학이나 고증학 같은 외래사조의 영향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내재적 변화 발전에 따라 나타난 사상으로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최근의 실학 연구에 대하여 »). 이런 분위기에 호응하여 천관우는 실학의 개념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시도했다. 그는 실학이란 « 전근대의식에 대립하는 근대정신을, 몰민족의식에 대립하는 민족정신 »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0 년대 들어와서는 실학의 철학적 성격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유물론적 입장에서 철학사를 정리하는 사람들은 실학을 주기론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파악했다. 그들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으로 철학사를 파악하면서, 주기론은 유물론, 주리론은 관념론이라는 식으로 조선시대의 철학사를 정리했으며, 실학자들을 주기론적 성향을 가진 학자들, 즉 유물론적 성향을 가진 학자로 파악했다.
1970-80 년대의 실학 연구는 우선 양적으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시기 실학 연구로는 « 실학연구입문 » (1973)과 « 실학논총 » (1975)이 대표적이다. « 실학연구입문 »은 1960 년대 사회경제사의 연구성과를 수용한 기반 위에서 중요한 실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 실학연구서설 » (이우성)을 비롯하여 유형원, 이익, 이중환, 유수원, 박지원, 우하영, 박제가, 정약용, 최한기 등 주요 실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 실학논총 »은 « 실학의 현대적 이해 », ‘실학의 경학관의 특색’, ‘실학파의 사회경제사상’, ‘한국 실학의 발전사적 연구’, ‘실학의 근대적 전회’, ‘위민의식과 정책반영’ 등 실학사상의 성격을 규명한 몇 편의 논문을 싣고 이수광 등 실학자 30 여명의 생애와 사상을 간단히 고찰했다.
« 조선철학사 »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정성철은 그 후 조선 후기의 선진적 사상으로서 실학사상에 천착하여 « 실학파의 철학사상과 사회정치적 견해 »라는 저서를 간행했다. 이 책에서 그는 실학자들이 진보적 양반계층의 이해를 대변했지만, 자신들의 계급적 제한성과 당시의 생산력 및 과학발전 수준의 제한성을 면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그들이 의거했던 세계관은 봉건 유교사상인 주자학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고, 그것 자체가 유물론적일 수 없는 관념론이었으면,, 그들이 제가한 사회, 정치적 견해도 봉건제도와 양반신분제도를 영구히 보존하려는 기본 입장에서 나온 개혁사상이라고 하여 1960 년대의 실학에 대한 이해를 대폭 수정했다.
정치사상적 관점에서 실학을 검토한 박충석은 한국 정치사상의 주자 – 실학 – 개화사상으로의 변용을 추적했다. 그는 주자학의 보편주의적 성격이 실학단계에 와서 공리주의적 성격으로 변화했다고 하여, 주자학과 실학의 성격차이를 이해했다.
또한 실학을 실학에만 한정하여 이해하지 않고 조선 후기 사상사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는 연구도 시도되었다. 김용섭은 조선 후기 사상의 흐름을 보수적 사상과 진보적 사상으로 구분하여 실학을 진보적 사상으로 이해했다. 즉 농민층 분해기였던 17-18 세기에 지주 전호제를 옹호하는 주자학의 새 형태인 송시열 중심의 보수적 사상과, 지주전호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토지개혁론을 제시한 진보적 실학파의 사상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농민항쟁기에는 이런 흐름이 더욱 명확해져서 삼정(전정, 군정, 환곡) 문제에 대해 삼정은 그대로 두고 그 운영방법만 개선하자는 보수파의 삼정의 제도까지 부분적 또는 전면적으로 개선 개혁하자는 보수좌파, 그리고 삼정뿐만 아니라 지주전호제 자체를 전면적으로 개혁하자는 진보파로 나뉘었는데, 실학은 바로 진보적인 개혁론을 대변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런 실학사상은 농민전쟁기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예컨대 초정 김성규, 해학 이기는 소작지균분, 소작권영정 永定 또는 지대감소를 법제화함으로써 지주제를 소멸시키려는 사상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또한 농민군 지도부에도 다산 정약용의 비결이 전수되어 실학사상이 근대 농민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고 보았다.
실학사상이 근대 변혁사상으로 변용 발전하는 과정은 북학사상과 개화사상과의 관련에서 추구되었다. 강재언은 « 한국의 개화사상 »에서 우리나라의 근대변혁사상과 그 운동을 고찰했다. 여기서 그는 전통 유교 = 주자학의 형이상학으로의 편중과 교조성에 대항해 18 세기에 실사구시에 의한 내재적 비판으로서 형성 전개된 실학사상, 1870 년대 실학에서 개화로의 사상적 전환, 그 후 개화사상 및 개화운동의 형성과 전개 좌절의 모든 과정을 고찰했다. 특히 북학파와 개화파의 인적 학문적 연결을 깊이 있게 추적했다.
실학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된 것은 해방 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그 이전에는 실사구시학 (문일평), 의독구실지학 依獨求實之學, 치용학 致用學 (정인보), 현실학파 (백남운), 경제학파 (현상윤), 실증학파 (홍이섭), 또는 학파로서 성호학파, 북학파 등 다양하게 그 특징을 지적하여 불렀다.
처음으로 조선 후기 실학체계를 세운 사람은 위당 정인보였다. 그는 « 성호사설 »에서 조선 학술사를 개관하면서 성호 이익을 비롯한 안정복 윤동규 신후담 이병휴 이중환 등의 성호학파, 정재두에서 시작하여 최명길 이이명 등으로 이어지는 소론 학풍의 흐름 등을 추출했고, 특히 경세학에서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큰 줄거리를 확인하여 체계를 세웠다. 또한 ‘동아일보’에 연재한 « 조선고서해제 »를 통해 이익의 « 곽우록 », 홍대용의 « 담헌서 », 이중환의 « 택리지 » 등 실학자의 저술들을 소개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것은 1934 년부터 안재홍과 함께 총 500 여 권에 달하는 « 여유당전서 »를 신조선사에서 교열 간행하고, 그 서문에서 다산의 학문적 근원이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에 있음을 밝힌 점이다.
다산학에 대한 현대적 평가는 민세 안재홍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다산사상에 나타난 중국에 대한 독립적 자존의식을 ‘근대 국민주의의 선구’라 평가하고, ‘향리론 鄕吏論’, ‘통색의 通塞議’ 등에 나타나는 계급타파사상과 평등론을 ‘근대 자유주의의 개조’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원목 原牧 사상은 루소의 « 민약론 »이나 « 인간불평등기원론 »에 비교될 만하다고 했다.
최익한의 « 여유당전서 » 독후감도 매우 중요한 글이다. 여기에서 그는 다산의 사상적 목표가 « 낡은 나라를 혁신하자는 것 (新我舊邦) 이었다고 강조하고, 이를 위해 사공적 事功的 덕치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요약했다. 최익한은 다산사상을 루소 류의 자유주의사상, 벤담 류의 공리주의 사상, 또는 케네 류의 자연법에 입각한 정체 개념과 중농사상에 비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산사상이 ‘종래 계급의 반성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지 ‘신흥계급의 대표’로서의 사상체계는 아니었다고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최익한의 이 독후감은 1930 년대 다산 연구를 최종적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천관우는 ‘반계 유형원 연구’의 결론에서 실학파의 계보와 반계 유형원의 위치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는데, 조선 후기에 실학과 같은 신사조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조건으로서 양명학, 한학, 훈고 고증학 같은 반주자학의 대두, 위정자 재야를 막론한 사회정책론의 대두, 서학 및 서양문물의 도입, 중국 문화의 영향을 들고, 16 세기 중엽에서 19 세기 중엽에 걸치는 실학의 시기를 세 시기로 구분하여 정리했다. 그리하여 실학이라고 하는 신사조의 성격은 자유성, 과학성, 현실성을 구비한 것으로 자유성을 의미하는 ‘실정’의 ‘실’, 과학성을 의미하는 ‘실증’의 ‘실’, 현실성을 의미하는 ‘실용’의 ‘실’의 성격을 가진 것이 실학이라고 하여 « 실증, 실정, 실용의 어느 한 면을 가진 것이면 실학의 범위 내에 들어오는 것 »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 실학은 결코 근대의 의식도 아니고 근대의 정신도 아니다. 실학은 그 비판적 입장에서 봉건사회의 본질을 해부하고 노동하지 않는 계급을 비방하고 신분적 세습을 비판하고 대토지사유를 비판했지만, 그 비판의 기조는 당우삼대iv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그 비판의 입장도 불구적으로 전개한 역사적 특성에서 초탈하여 이를 부감할 만큼 질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이라고 하여 실학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러한 다른 한편으로 « 이런 정체된 봉건사회를 극복하고 근대를 가져오는 거대한 별개의 역사적 세계와의 접촉을 준비하는 한 시련을 겪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실학은 근대정신의 내재적인 태반 역할을 담당했던 것 »이라고 하여 근대사상의 맹아로서의 성격은 인정했다.
한우근은 종래 사용되었던 실학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우리나라에서 역대로 써온 ‘실학’이라는 용어와 ‘실’자의 용례를 검출하여 그것이 조선 후기 일부 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논증했으며, 아울러 조선시대 학자들이 실제로 어떤 내용으로 실학이라는 말을 사용해왔는지 검토했다. 그는 실학이라는 말이 실제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주자학이 새로이 수입되던 고려 말이었다고 하면서, 이제현과 권근의 말을 빌어 실학이 당시에는 궁경행수 窮經行修 의 학이요, 이른바 ‘실’이란 인의예지 仁義禮智의 4 덕을 무득체인 務得體認한다는 의미에서의 실이요, 그것은 바로 고려시대 사장 詞章 의 학을 배격하는 정주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했다. 따라서 실학이라는 용어는 멀리 중국 삼대의 학문을 가리키는 한편, 가까이는 송 원대의 정주학을 가리켰다고 했다. 그는 종래 실학이라는 개념이 이처럼 잘못 사용되어왔으므로 실학을 제창하고 고증학의 선구적 학풍을 이룬 그 과도적 학풍을 ‘경세치용의 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처럼 실학이라는 용어 자체의 역사적 용례를 찾아 정확하게 써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으나, 앞에서 밝힌 것처럼 실학이라는 용어는 1930 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문조류를 가리키는 역사용어로 정착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접근방법이 필요했다. 조선 후기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반영한 사상으로서 실학의 역사적 성격을 강조한 사람은 이우성이었다. 그는 실학의 역사적 성격을 강조하여 18 세기 이후의 학자들만으로 실학자의 범주를 한정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1960 년대 이후 사회경제사적 연구성과와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실학의 성격을 발전적인 것으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나왔다. 천관우는 실학을 « 전근대의식에 대립하는 근대정신을, 몰민족의식에 대항하는 민족정신 »을 가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전통적인 학문영역 (의리학, 고증학, 사장학, 경세학)과 실학의 관계를 검토하면서 실학이 고증학 경세학과 더 깊은 관련을 가진다고 했다. 그는 실학이 근대지향적 민족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유학사상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개신유학 改新儒學이었다고 결론지었다.
한 세대 뒤에 지두환도 실학이라는 용어가 조선시대에 어떻게 사용되고 있었는지 검토했다. 그는 조선시대의 학자들은 « 좁게는 강경 講經 시험 준비의 경학을, 포괄적으로는 경세치용의 경학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륜을 밝히는 의리의 실체로서의 경학, 즉 윤리학적 경학을 실학 »으로 생각했다고 하면서, 이런 실학 개념을 조선시대 학자들이 사용한 ‘실학’이라는 용어나 ‘실’자의 용례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기본적으로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나라 유학사를 15 16 세기의 주자 성리학 시기, 17 18 세기의 조선 성리학 시기, 18 세기 말 19 세기의 북학사상 시기로 구분하고, 17 세기 초 이수광 이후 19 세기 후반 최한기까지 250 여년간을 실학사상 시기로 보아, 조선 성리학과 이를 비판하고 나오는 북학사상가들을 같은 성격의 사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면서, 대신 18 세기 말 19 세기 전반의 북학사상을 근대사상으로서의 실학으로 규정하여 유형원, 이익, 안정복 등을 조선성리학자와 구분하는 것이 실학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과연 북학사상이 근대사상인지, 주자 성리학과 조선 성리학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디까지가 실학이고 실학의 유파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 그것은 실학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천관우는 실학을 준비기, 맹아기, 전성기로 구분했다. 준비기는 16 세기에서 17 세기 중엽에 이르는 기간으로 이 시기에 해당하는 인물에는 권문해 (1534-1591), 한백겸 (1552-1615), 이수광 (1563-1628), 김육 (1580-1658)을 들 수 있다. 17 세기 중엽에서 18 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를 맹아기로 보았는데, 이 시기에는 유형원 (1622- 1673)을 선구로 이익 (1681-1763)이 이수광의 서구적 문화에 대한 이해와 유형원의 실사구시적 학문체계를 통합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유형원, 박세당 (1629-1703), 이익, 안정복 (1712-1791), 이중환 (1690-1752), 신경준(1712-1781), 서명응 (1716-1787)이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18 세기 중엽에서 19 세기 중엽까지를 전성기로 보고, 이 시기의 인물로 홍대용 (1731-1783), 박지원 (1737-1805), 박제가 (1750-1805), 성해응 (1760- ?), 정약용(1762-1836), 김정희 (1786-1856), 이규경 (1788- ?)을 꼽았다. 유형원 이전의 준비기를 거쳐 반계의 출현에 의해 학문으로 자리잡았고, 성호 이익 일문의 집단에 의해 학파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연암 박지원, 담헌 홍대용, 다산 정약용의 출현에 의해 실학은 시대사조의 지배적 경향이 되었다고 정리했다.
한편 이우성은 실학을 18 세기 이후의 사상으로 한정하면서, 경세치용학파가 제 1 기 (18 세기 전반), 이용후생학파가 제 2 기 (18 세기 후반)이며, 다산 정약용은 제 1 기와 제 2 기를 걸쳐 경세치용학과 이용후생학의 합류점을 이루었고, 김정희를 대표로 한 고증학적 실사구시학이 실학의 제 3 기 (19 세기 전반)라고 보았다.
김용덕은 성호 이익을 기준으로 성호 이전, 즉 16 세기 중엽부터 17 세기 말엽까지의 실학파들을 전기 실학파로, 성호 이후 실학자들을 다시 경세치용학파와 이용후생학파 두 계열로 정리했다. 이와 반대로 최근에는 성호학파까지는 중세적 사유체제를 대변하는 조선 성리학자로 보고 담헌 홍대용 이후의 북학사상가들만 근대적 사유체계의 실학자로 이해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실학의 범위와 유파 문제는 이상과 같이 실학 연구의 진전에 따라 시기구분이 서로 상이했고, 각 연구자의 관심과 지향에 따라 서로 다르게 파악되었다. 즉 실학사상의 철학적 학문적 경향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에는 박세당 (1629- 1703)이나 윤증 (1629-1714), 윤휴 (1617-1680)나 양명학자들까지 실학에 포함시키는가 하면, 북학파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이지함(1517-1578)이나 조헌(1544-1592)까지도 전기 실학파로 보아 실학자에 포함시켰으며, 경세학과 관련해서는 이이(1536-1584)도 실학자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실학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실학의 성격을 애매모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역사학적 인식방법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실학의 범위는 정인보가 1930 년대에 체계화한 바대로, 즉 반계 – 성호 – 다산의 경세치용학적 흐름과 그에 연관된 여러 학자들을 실학자로 이해되었고, 해방 이후 천관우나 최익한도 그와 같았다. 대개 17 세기를 실학의 발생기로 보아 이수광, 한백겸, 유형원을, 그리고 18 세기는 학파 성립기로 보아 성호와 성호학파 및 북학파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의 여러 사람들을, 그리고 19 세기는 실학의 전성기로 보아 정약용, 김정희, 최한기 등의 사상을 주목해왔다.
정인보는 실학의 유파나 계보를 노론학파 (북학파의 여러 사람들), 소론학파 (양명학 ), 남인학파 등 정치적 경향과 관련지어 전체적인 학술사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우성은 경세치용학파, 이용후생학파, 실사구시학파 세 그룹으로 분류했다. 또한 서양사상사의 개념을 빌려 중농주의학파니 중상주의학파로 분류하기도 하고, 출생 및 성장환경에 따라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를 체험한 북학파의 사상과 근기 지방의 농촌 분위기를 대변하는 성호학파의 학문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한편 학문분야와 저술에 따라 백과전서파 (이수광, 이익, 서유구, 이규경 등), 역사지리학파 (한백겸, 신경준, 이익, 안정복, 정약용 등), 어학파 또는 명물상수학파 (신경준, 유희)로 분류할 수도 있다.
어떤 사상가가 특정 유파에만 들어가지 않고 여러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직 학문 분화가 진전되지 않았던 시기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전근대사회의 사상적 경향을 검토하면서 어떤 사상가가 주로 어떤 관심을 추구하고 있었는지 밝힘으로써 그 시대의 일반적 사상동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실학과 근대사상의 연관관계에 대해 지금까지는 주로 실학사상 (특히 북학사상)이 근대적 변혁사상으로서 개화사상과 연관되었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박지원등 북학파와 박규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의 학적, 인적 연관관계가 깊이 있게 추적된 바 있다. 강재언은 실학파 중에서 박지원, 박제가, 김정희 등과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옥균 등이 박규수, 오경석, 유흥기 등을 통해 사상적으로 연관을 지녔다고 할 수 있고, 김윤식, 유길준 등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온건 개화파들도 박규수와 연관이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이기와 강위 등이 실학사상과 근대변혁사상의 연결고리로 주목받기도 했다. 특히 박규수는 북학파와 개화파를 맺어준 중심인물로 중점적으로 검토되었다.
이렇게 실학과 근대사상을 연결하는 시도에 대해 후지마는 «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관련을 ‘종적인 선’보다는 ‘횡적인 면’에서 생각하여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결보다는 어느 시점에서 단절되었는가 »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상인층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역관 오경석의 전통사상과의 단절적 측면을 중시하여 « 실학과 개화사상을 직결시키는 것은 개화사상의 근대적 성격을 매장하고 경제발전의 계기를 오히려 매몰시키는 것이 아닌가 »라고 했다. 이런 견해는 개화사상을 개화사상으로 계승하는 사상적 계보에서 보지 않고 그 부르주아적 성격을 상업자본과 결부된 중인층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보는 시점이라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편 조선 후기 사회사상사의 흐름을 진보사상과 보수사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실학파의 농업론을 민란 – 항조 杭租 투쟁기의 진보적 개혁사상으로 이해하여, 그런 진보사상은 농민 전쟁기에도 허전, 강위, 이기, 김성규 등에게 계승되어 우리나라의 전통사상이 스스로 개척한 사회개혁사상이자 근대화론으로 발전했다고 했다. 즉 실학은 초기에는 주자학의 농업론을 일부 계승, 발전시켜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기여했고 주자에 대한 반대는 소극적이었으나, 마침내 지주제를 정면으로 부정하게 되었다. 그 반주자학적 성격은 시대에 따라 강화되었으며, 봉건적 농업체제가 내포한 모순을 농업 상업의 구조적 관련 속에서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 국가와 농민 경제의 안정을 기하려 했다는 점에서 사회개혁, 근대화의 이론으로 성장하는 사상이었다고 이해했다.
또한 농민전쟁기에 농민군 지휘부가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검토되기도 했다. 훈장 출신인 전봉준이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혁명을 기도했으므로 혁명 이후 새로운 정책구상은 당연히 전통적 유교사상 속에서 마련되었을 것이고 그럴 경우 그가 채택하려 했던 사회개혁사상은 실학사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호남 지방은 다산 정약용이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한 곳으로 그 사상적 영향이 적지 않았으며, 전봉준이 살았던 고부 지방의 이웃인 부안에는 반계 유형원을 모신 동림 서원이 있었으므로 그러한 지적 환겅이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추측되었다.
한편, 연암 박지원의 저작이 갑신정변을 계획했던 개화독립당에게 계몽적 역할을 했고, 다산 정약용의 이론이 동학농민전쟁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최익한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광무 개혁기의 양무감리였던 김성규의 개혁론을 검토한 김용섭은, 김성규가 전주화약에서 정부군의 당로자였음을 지적하면서 1894 년의 농민전쟁이 실학을 계승한 개혁파의 손으로 수습되었다는 데 주목했다. 김성규는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의 저술을 연구하여 독자적인 개혁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다산 정약용의 개혁론은 위정척사파의 거장인 기정진도 높이 평가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점을 보면 실학사상은 어느 특정한 근대사상으로 발전했다기 보다는 당시의 대표적인 개혁사상으로서 검토되었으며, 후대의 사상으로 연결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학이라는 용어는 보통명사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1930 년대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 조선학운동이고, 그 가운데 하나가 실학이었다. 실학이라는 용어는 이런 민족운동 과정에서 조선 후기 새로운 사상조류를 지칭하는 역사적 개념으로 탄생한 것이다.
1950-60 년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실학 개념에 대한 논쟁은 일견 실학의 개념을 당시 사료 속에서 찾아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우리가 대표적인 실학자로 지칭하고 있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은 정작 스스로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칭한 적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학술사, 사상사의 전체구도 속에서 이른바 실학의 핵심인물들의 사상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검토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하겠다. 그런 맥락에서라고 생각되지만, 최근에는 통사적 서술이나 저술에서 일부러 ‘실학’이라는 용어를 피하여 ‘탈주자학적 학문 경향’이라고 칭하면서 조선 후기 사상사의 전체 맥락에서 살피는 흐름도 나타났다.
실학이라는 용어도 궁극적으로 조선 후기 전체 사상사 속으로 해소시켜 조선 후기의 정치사상, 경제사상, 사회사상 등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며, 각 사상가들의 사상적 편차와 한 사상가의 사상적 변화추이를 고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조선 후기의 전체적인 사상체계는 실학파와 같은 개혁론자들만이 아니라 기존의 보수적 성리학의 사상체계, 나아가서는 근대사상과의 차이를 비교하는 가운데 비로소 그 시대적 성격이 규명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21 세기 국제화시대를 맞이하여 전통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지 회의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제화시대일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세계 속의 자신을 인식해야 비로소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 자기정체성 확립을 위해 한국학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국학은 1930 년대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조선학운동에서 무언가 암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실학 연구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