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e original : 1-8. 상상 속의 고조선 역사 속의 고조선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한국사 연구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많은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는 역사분야 중 하나가 단군과 고조선사이다 고조선사는 우리 역사에 맨처음 등장하는 국가라는 점에서 민족사의 뿌리 출발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외침 등 국가적 위기 속에서 한민족 전체를 하나로 묶어준 구심체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단군의 자손이라는 한핏줄의식 이었다 그러나 단군과 고조선사는 그 구체적 역사상을 확인하는 작업에 각 시대마다 새로운 역사인식이 투영되면서 많은 혼동을 빚어온 연구주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고조선사 관련해서는 단군신화, 건국, 시기 기자조선, 강역, 그리고 지배체제와 사회성격 문제 등이 주로 쟁점이 되었다 그중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이 고조선의 위치와 사회성격 문제이다. 


다른 시기와 달리 고조선사에서 위치 문제가 유달리 주목을 받았던 것은 북한 학계와 남한사회의 "재야사학자"로 불리는 일단의 그룹이 문제를 제기하면 원시 고대서부터였다. 위치 문제가 주목을 받게 된 데는 학문적 이유보다 다른 배경이 더 크게 작용했다. 한마디로 고조선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라는 점 때문에 그 사회상에 지나친 환상과 강한 민족의식이 투영되었던 것이다. 북한과 남한 학계의 많은 논문들이 한국사의 유구함과 영토의 광대함을 밝히고자 하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고조선 국가형성 시기와 활동무대를 뚜렷한 근거도 없이 유구하고 광활하다고 단정하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이런 결론을 내리는 데는 고조선사를 포함한 고대사 연구방법론의 기본적인 한계가 또 하나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남아 있는 것 또한 모호하기 때문에, 추론과 고고학 자료에 크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고학 자료 자체는 연구자의 해석이 없다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또한 고고학 자료를 통해 고조선사의 여러 문제를 해명하려 할 경우, 기본적으로 고조선의 위치 문제가 확정되어야 그 범위 내의 고고학 자료들이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고조선의 중심지 관련 논의가 활발해졌던 것이다. 


고조선사를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문헌자료 및 남만주 일대의 고고학 자료들을 광범하게 수집해 그것들을 체계적-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그러나 종래의 고조선 연구는 단군신화를 포함하여 후대의 고조선 사료에 대한 종합적이고 비판적인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고조선에 대한 논의는 중국 정사正史에 인용된 고조선 사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조선 중-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실학자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고조선의 강역 문제였다. 제일 먼저 고조선의 위치에 주목한 이는 한백겸韓百謙이었다 그는 주자성리학의 도덕적 편사규범에 구애되지 않고 우리나라 고대의 강역을 문헌고증의 방법으로 해명하고자했다. 그는 삼국시대 이전에는 한반도가 한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각각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했다고 보았으며,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인 패수浿水는 청천강이고, 왕검성이 위치한 열수冽水는 한강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정약용丁若鏞의 '패수=압록강설'로 이어졌고 고조선의 중심지를 한반도에 비정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깊어졌다. 이들은 중화사상이 풍미하던 시기에 우리 강토에 주목하면서 '상고 이래 한반도는 원래 우리 영토'였음을 주장했다. 

 

이런 입장과 달리 이익李瀷과 안정복安鼎福은 평양 일대를 도읍으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있었고, 이들의 강역은 요동 지역까지 포함했다고 보았다. 이익과 안정복의 고대사에 대한 관심에는 문화적 자부심과 잃어버린 만주 땅에 대한 애착이 담겨 있었다. 이처럼 18세기 말 이후 학자들이 한국 고대사의 중심무대를 한반도에 비정하려 했던 것은, 한국사를 축소하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청나라 에 대한 주체성을 견지하기 위한 민족주의의 발로였다.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대개 고조선의 강역을 평양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이남 지역에 비정한 것과 달리, 이종휘李種徽는 고조선의 서변이 요동 지역까지 미쳤다고 보았다. 그는 잃어버린 만주 땅을 수복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만주와 한반도를 하나의 국토로 인식하고 그 풍토적 특성과 생활권-문화권을 강조했다 이는 왜란 이후 18세기 중엽까지 만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상고사도 만주 지방과 관련하여 해석하는 경향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학자들은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 속에서 한반도를 재인식하고, 만주 지역의 고대사에 대한 관심을 고조선 위치 문제와 관련하여 피력했다 만약 이런 실학자들의 실증적 학풍이 계승-발전되었더라면 고조선사를 포함한 한국 고대사 논의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역사는 일제 식민지로 귀결되었고, 실학자들의 문헌고증적 연구 흐름 또한 단절되고 말았다.

전통 역사학자들의 논의는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역사연구를 주도했던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 평양중심설'에 입각한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이들은 한사군 및 위만조선연구에만 관심을 두었고 고조선은 한국식 세형 동검 사용단계에 평양 지역에서 등장했다고 보았다. 


한편 식민주의적 한국사인식에 대항하면서 민족해방운동 차원에서 역사학을 연구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에게는 20세기 초반의 식민지상황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중요한 정신적 지주로서 이른바 '단군민족주의'가 주요 연구주제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신채호申采浩이다 그는 수두시대의 단군조선과 진眞-번番-막莫 삼조선 분립시대의 주요무대를 요동과 만주에 비정했다. 


초기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그린 고조선의 모습은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른 광대한 영역의 고조선제국이었다 고조선의 수도는 만주 지역에 있었고, 낙랑군 등 한군현의 위치도 남만주 지역이었음을 강조했다 나아가 웅대한 고조선 상을 통해 민족정신을 진작하고 조국광복을 되찾자는 민족운동 차원에서 고조선사가 연구되었다.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자의 역사지리 고증은 조선시대의 경역론境域論을 상상 속의 고조선, 역사 속의 고조선 넘지 못한 일본 관학자들의 한국사인식체계를 한 단계 넘어선 것이었다. 다만 식민지 치하 우리 민족에게 주체의식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앞서다보니 사실확인이 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해방 직후 남-북한 학계에서는 한국 고대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고조선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민족사의 체계적인 정리와 고고학 자료를 새로이 개발-재평가하는 연구사업 속에서 민족형성과 고조선의 위치 및 사회성격에 대한 연구를 먼저 시작한 것은 북한 학계였다. 

 

북한 역사학계는 삼국시대 사회성격에 대한 토론을 통해 삼국을 '봉건사회'로 규정했고, 자연히 그 이전 단계인 고조선-부여-진국을 '고대사회'로 바라보면서, 이를 증명하기 위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수행했다. 학자들 간에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리지린李址麟의 "고조선 연구"가 출간된 뒤 고조선은 만주 요령성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고 노예제사회였다는 주장이 정설로 채택되어 1990년대 초까지 유지되었다. 

 

북한 학계의 고조선사 이해의 바탕에는 일차적으로 단편적인 문헌자료가 있었다. 리지린은 고조선을 세운 민족은 예맥이었고 이들은 동호東胡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요령성 일대에 고조선을 건설했다고 보았다. 리지린의 연구 이후 북한 학계는 고고학 자료, 즉 비파형 동검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그 문화의 출발지와 중심지를 요동으로 보고, 요령성과 길림성 일부, 한반도 서북 지방 비파형 동검문화 지역을 모두 고조선의 영역으로 설명하면서, 강상묘-루상묘의 예로 볼 때 그 사회는 노예를 순장하던 노예제사 원시 고대회라고 했다. 


이는 1960년대에 유행한 문화전파론과 외인론을 배격하고 독자적 발생설과 내재적 발전론에 경도된 결과였다. 주체사관이 확립되면서 이런 주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북한 학계의 주장은 문헌과 고고학 자료에 치밀하게 접근한 결과이므로 논리적으로 큰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후대의 명확한 고조선의 위치 및 고고학 자료를 배제하고 고조선 재요령성설과 관련된 자료만을 논리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실상과는 달리 확대된 고조선상이 그려졌다. 대동강 유역 낙랑군 왕검성 유적을 부정하고 요서遼西지역의 산융山戎-동호東胡의 활동기록을 예맥 조선 의 활동으로 해석한 것 등이 그 예이다.

 

최근 북한 학계는 1993년에 발굴된 단군릉을 근거로 단군과 단군조선을 인정하고, 지금으로부터 5,000여 년 전에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만주 일대까지 고조선이라는 고대국가가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기원전 8-7세기 이후의 유물인 고인돌-미송리형 토기-팽이형 토기 등을 단군조선 시기의 유물로 인용하면서, 그 사용연대를 단군조선 시기에 맞추어 2,500여 년 정도 상향조정했다. 그리고 평양을 고조선의 중심지로 보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유역은 한민족의 발상지이자 인류 기원지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대동강 유역에서 세계 4대문명에 뒤떨어지지 않는, 오히려 더 우수한 문명이 발생했음을 강조하며, '또 하나의 세계문명'이 시작된 곳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크게 보면 이런 입장변화는 통일운동의 일환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구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변화 이후 닥쳐올 개방 후유증을 극복하고 남북 간 체제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할 필요가 긴급해졌다 이를 위해 주민들에게 현정권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확고한 정통성을 갖고 있다는 인식을 상상 속의 고조선, 역사 속의 고조선 심어줘야 했던 것이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북한은 평양이 민족사의 시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민족의 심장부로 기능했음을 밝힘으로써 남북대립의 분단구도에서 정권 의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는 그동안 주장해오던 고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계보를 확인함으로써 통일의 주체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거나 세계 인류의 기원지조차 북한이라고 주장한 것은 지나친 애국주의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남한 학계에서는 해방 직후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1970년대에 전통적인 고조선 평양중심설이 주장되어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이병도李丙燾를 중심으로 제기된 이 주장은 기본적으로 믿을 수 있는 문헌자료에 기초한 것으로, 초기 고조선사와 관련된 단군신화나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고조선사의 진정한 출발을 기원전 4세기 이후인 전국시대부터로 보았다. 결과적으로 만주 일대에 분포하는 청동기문화와 초기 고조선사에 대한 실증적 고찰은 수행할 수 없었지만, 고조선사회가 연맹적 상태의 부족국가임을 주장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북한 학계의 요동중심설이 소개되면서 남한 학계에서도 고조선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논쟁이 일어났고 고조선 중심지가 평양에 있었다는 설 외에 '요령성중심설' 및 '중심지 이동설'이 제기되었다. 


남한 학계에서 고조선 위치 논쟁을 주도했던 '고조선 요령성중심설'은 윤내현尹乃鉉을 중심으로 재야사학자들이 가세하여 펼친 주장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고조선은 단군조선만을 말하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중국의 망명세력으로 고조선 역사와 무관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요서 지역의 초기 청동기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를 고조선의 문화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고조선이 일찍부터 남만주 일대에 광대한 영역을 가진 제국帝國을 형성했고, 그 사회는 노예제사회 였다고 보았다. 또 시간과 지역을 초월한 무차별적인 유물 비교를 통해 중국과 고조선의 유물 사실 고조선 유물인 것은 거의 없음 이 유사하고 고조선의 것이 천 년 이상 앞서므로 중국 문화의 원류는 고조선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단군신화를 신화가 아닌 사실로 가정하고, 기원전 2,000년경 남만주 지역과 서북한 지역의 고고학 자료를 모두 고조선의 유물로 해석했다. 그러나 요서 지역 초기 청동기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는 중국 동북방의 소수 유목종족 산융 등 의 문화이고, 하가점 상층문화는 청동기시대 동호나 산융으로 표기되는 유목종족의 문화라는 것은 고대 문헌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청동기시대 초기에 흑룡강성, 하북성, 요령성, 길림성을 모두 관할하는 제국이 존재했을 리 만무하며, 그것이 고조선의 영역이 될 수도 없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고조선 단군조선 이 제국이었다는 주장은 동아시아 고대 역사에 고조선만 존재했다는 의미로, 역사발전 과정에 대한 상식을 뛰어넘은 맹목적인 주장이다. 여기엔 근대 국민국가 성립 이후 형성된 감상적 민족주의자들의 소박한 생각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상상일 뿐 실상이 아니다.

 

반면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은 고조선이 초기단계에는 요동 지역에서 비파형 동검문화를 주도하다가 연燕세력과의 충돌로 말미암아 그 중심부를 대동강 유역 평양 지역으로 옮겼다고 보는 입장이다. 고조선의 사회성격도 연맹적 성격이 강한 초기국가로 파악되었다. 이 주장은 종래의 평양설과 요동설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현재 가장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특히 이 주장은 문헌사료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바탕으로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초기 고조선사를 규명하기 위해 고고학 자료를 적극 활용했다. 다만 초기 고조선사는 쉽게 정리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중심지 이동 후의 문화복합 과정 및 그 구체적 실상을 그려내는 것 등이 과제로 제기된다. 

 

 

 

최근에는 위치-강역 문제 외에 고조선의 지배체제와 사회성격에 대한 연구성과가 잇달아 나왔다. 그동안 고고학 자료를 통한 고조선사 연구는 대부분 묘제와 청동유물-토기 등의 분포 및 특성 비교를 통해 '종족-주민의 보수성과 전통이 강한 정치집단 혹은 국가'를 상정해왔다. 그러나 아직 고조선의 국가형성 지역과 중심지에 대한 이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특히 기존 연구의 많은 관심이 위치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한 국가성격 및 사회성격 문제는 더욱 해명되지 않고 있다. 

 

처음에 고조선 사회성격 연구는 위치 문제와 함께 북한 학계에 의해 주도되었다. 1993년 단군릉 발굴 전까지 북한 학계는 고조선의 국가형성 문제와 관련하여 기원전 7세기경 강상무덤 (돌무지무덤)의 주인공은 고조선 왕이며, 피장자가 여러 명의 노예를 순장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졌음을 감안할 때, 이 무덤은 고조선이 강력한 노예소유제국가였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많은 남한 학자들도 이 주장에 동조했다. 그러나 강상무덤은 무덤구덩이에 시기차이가 보이는 점으로 볼 때 한 공동체사회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설령 순장무덤이라 해도 고조선사회는 노예가 주된 생산동력이었던 사회는  아니고 기본적으로 노예제적 요소를 가진 고대사회였다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한 접근이다. 


단군릉 발굴 이후 북한 학계는 기원전 30세기경에 이미 순장이 실시되었고, 황대성 등 대동강 유역의 토성을 왕성으로 하는 단군조선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단군릉 및 여러 유적들에서 나온 인골의 연대측정 결과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상자성공명법'이라는 측정방법이 과연 기원전 천년대의 유물을 측정하는 데 적합한 방법인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그 결과 또한 대단히 소략하고 부정확한 서술로 일관되어 신빙성을 지니기 어렵다. 

 

남한 학계는 일찍이 고대국가에 선행한 '소국' 또는 초기국가를 부족국가로 설명했는데, 이 개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성읍국가설과 군장사회 Chiefdom설이 제기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서비스E. R. Service의 신진화주의이론의 입장에서 국가의 기원을 연구하던 방법론이 위만조선과 고조선의 국가형성 문제에도 적용되었다. 논의 과정에서 청동기시대 초기 고조선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고, 철기시대에 들어와야 국가형성의 맹아가 보인다는 인식도 제기되었다. 혹자는 삼국시대와의 계기성을 고려하여 고조선을 원시사회 최말기에서 고대로의 이행기로 보기도 한다. 이런 입장차이의 근본원인은 국가형성이론에 대한 인식차이와 사료부족이다. 

 

고조선이 언제 국가를 형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 많은 학자들은 기원전 4-3세기 "위략魏略"에 조선후朝鮮侯가 왕을 칭하는 기록이 있음을 주목한다. 최고 지배자가 '왕王'을 칭한다는 것은 이전 단계에 비해 국력이 커졌음을 말해주며, 이는 대개 국가단계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만일 기원전 4-3세기 당시 고조선이 국가를 형성했다면 그 고고학적 증거는 당시 보급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전의 돌무덤에서 움무덤으로 가는 문화유형의 변화는 지역 단위의 정치체가 성장하고 지배자의 지위가 이전보다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여러 지역 단위의 정치체에 대한 일정한 관할은 결국 고조선 이라는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의 출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가형성 및 사회성격 문제와 관련하여 범금팔조犯禁八條의 해석 또한 관건이다. 그러나 범금팔조는 지배자의 특권을 보장하고 노비의 산출을 규정했다는 점에서 고조선사회가 노예제적 요소를 가진 사회였음을 입증하는 점 이상으로 확대해석하기 어렵다.

고조선 멸망 이후 그 문화와 주민은 낙랑군으로 이어졌고, 삼국사회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고조선 유민들이 고구려나 신라의 국가형성에 미친 영향과 그 차이점 등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고조선사회의 특성을 밝히는데 꼭 필요한 작업이다. 

 

고조선의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삼국 초기의 정치체제와 유사하다. 즉 여러 지역집단의 독자성이 강해 이들 간의 연맹을 통해 국가체제가 유지되었고,  왕권은 아직 공동체적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사회상태를 일반적으로 '부部체제'라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삼국 초기 부체제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고조선의 정치체제를 살펴보고 양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아는 것이 고조선의 지배체제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할 것이다. 

 

고조선의 지배체제는 몇몇 측면에서 삼국사회와 차이가 있었다. 먼저 기원전 세기 전후의 사실을 반영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고조선 부분에서는 부의 존재나 부라는 용어가 확인되지 않는다. 부라는 용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고조선사회의 운영체계가 삼국 초기의 부체제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운영의 측면에서 보면, 삼국의 부체제는 고조선의 정치체제보다 더 진전된 단계였다. 부체제를 중앙만이 아니라 지방사회에 대해서도 일정한 역할을 하는 운영체계라고 할 때, 중앙이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지방을 통제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즉 부의 출현은 부족을 통제하여 그 운동력의 일부를 상실케 할 집권력의 존재를 요청한다. 이때 부체제 아래 고구려 국가는 5부 대가大加들의 연합체였다. 부의 전신인 나那는 독자적인 소국이나 부족이었고, 그에 비해 5부는 고구려국의 주요 구성 단위로서 왕권 아래 귀속되었다. 이런 시각에서 연구자들은 부체제적 운영방식이 고조선사회에도 적용되었을 것이라 고 보고 있다. 

 

그러나 고조선의 경우 상相직을 가진 역계경歷谿卿의 이탈사례를 볼 때 독자성이 매우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고조선사회에서는 중앙왕실의 힘이 독자적으로 지방사회를 통제할 정도의 집중력을 보이지 않았다. 왕위의 부자상속도 어느 정도 확인되지만, 건국집단-핵심집단을 설정하는 것은 현재의 자료만으로는 어렵다. 따라서 고조선의 지배체제는 부체제 직전의 모습, 즉 삼국 초기보다 집권력이 약한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나 고조선의 국가적 경험은 멸망 이후 한강 이남의 마한사회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는 배경이 되었고, 고구려가 그 외곽에서 새롭게 성장하는 문화적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마한의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백제가 성장했고, 신라의 초기국가 형성에도 고조선 유민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고조선 멸망 이후 그 문화와 주민은 낙랑군으로 이어졌고, 삼국사회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고조선 유민들이 고구려나 신라의 국가형성에 미친 영향과 그 차이점 등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고조선사회의 특성을 밝히는데 꼭 필요한 작업이다. 

 

고조선의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삼국 초기의 정치체제와 유사하다. 즉 여러 지역집단의 독자성이 강해 이들 간의 연맹을 통해 국가체제가 유지되었고,  왕권은 아직 공동체적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사회상태를 일반적으로 '부部체제'라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삼국 초기 부체제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고조선의 정치체제를 살펴보고 양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아는 것이 고조선의 지배체제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할 것이다. 

 

고조선의 지배체제는 몇몇 측면에서 삼국사회와 차이가 있었다. 먼저 기원전 세기 전후의 사실을 반영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고조선 부분에서는 부의 존재나 부라는 용어가 확인되지 않는다. 부라는 용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고조선사회의 운영체계가 삼국 초기의 부체제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운영의 측면에서 보면, 삼국의 부체제는 고조선의 정치체제보다 더 진전된 단계였다. 부체제를 중앙만이 아니라 지방사회에 대해서도 일정한 역할을 하는 운영체계라고 할 때, 중앙이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지방을 통제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즉 부의 출현은 부족을 통제하여 그 운동력의 일부를 상실케 할 집권력의 존재를 요청한다. 이때 부체제 아래 고구려 국가는 5부 대가大加들의 연합체였다. 부의 전신인 나那는 독자적인 소국이나 부족이었고, 그에 비해 5부는 고구려국의 주요 구성 단위로서 왕권 아래 귀속되었다. 이런 시각에서 연구자들은 부체제적 운영방식이 고조선사회에도 적용되었을 것이라 고 보고 있다. 

 

그러나 고조선의 경우 상相직을 가진 역계경歷谿卿의 이탈사례를 볼 때 독자성이 매우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고조선사회에서는 중앙왕실의 힘이 독자적으로 지방사회를 통제할 정도의 집중력을 보이지 않았다. 왕위의 부자상속도 어느 정도 확인되지만, 건국집단-핵심집단을 설정하는 것은 현재의 자료만으로는 어렵다. 따라서 고조선의 지배체제는 부체제 직전의 모습, 즉 삼국 초기보다 집권력이 약한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나 고조선의 국가적 경험은 멸망 이후 한강 이남의 마한사회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는 배경이 되었고, 고구려가 그 외곽에서 새롭게 성장하는 문화적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마한의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백제가 성장했고, 신라의 초기국가 형성에도 고조선 유민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단군과 고조선사 이해는 한국사의 체계를 확립하고 민족공동체의식 등 각 시대의 역사인식을 살펴보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본문에서 필자는 고조선사의 주요쟁점과 각 주장의 논점을 거칠게 정리해보았다. 정리 과정에서 필자는 고조선사가 하나의 일관된 입장으로 정리되지 못하는 것이 한국 고대사 발전단계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차이에 기인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대개 삼국 초기부터 고대국가의 성립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고조선 또한 일찍부터 발전된 국가였다고 보고 있다. 반면 삼국 초기에는 아직 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수립하지 못했다고 보는 논자들은 고조선을 삼국 초기단계와 비슷한 초기국가단계로 이해한다. 이런 인식의 차이가 고조선사 해석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사 해명은 한국 고대사에 대한 기본인식을 포함하여 그 발전논리가 명확하게 정리되면서 더욱 체계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고조선은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논자들에 의해 지나치게 확대해석되거나 이른 시기부터 과장된 역사상을 가진 나라로 언급되어왔다. 우리 민족사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이런 관심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과연 그것이 사실로서의 고조선사를 반영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단군과 고조선사는 다른 어떤 연구주제보다도 각 시대의 역사인식과 연구과 제에 따라 그 관심과 연구방법론이 변화되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다. 그러나 고조선이 한국 고대사의 한 시기이고 첫 국가인 만큼, 이제는 고조선의 실상이 무엇이고 한국 고대사 전체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지 고증하기 위해 고고학 자료와 문헌자료를 종합한 진지하고 치밀한 연구가 요구된다. 특히 고조선사 연구의 최종적인 판단은 문헌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이때 제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후대의 믿을 만한 사료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이다.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