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de traduction : 14. 해방 직후 좌우익의 민족문학 논쟁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Onglets principaux
Texte original:
해방 직후 민족문학 논쟁은 첫째, 식민지 치하에서의 민족주의문학과 프롤레타리아문학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새로운 인물들에 의해 새로운 양상으로 표출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1920년대 중반부터 민족주의 문학과 프롤레타리아문학은 상호 활발한 논쟁을 벌이다가 일제의 프로문학 탄압이 본격화되면서 1930년대 중반 이후 발전적 논쟁을 벌일 기회를 원천적으 로 봉쇄당했다.
둘째, 해방 직후 민족문학 논쟁은 좌우익 문학 사이의 본격 논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국지전적 논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당시 좌익에서 결성한 '문학가동맹'이 범문단적 단체를 건설하기 위해 '민족문학'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일제강점기의 모든 문학적 유산을 비판적으로 포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한효韓曉의 "민족문학 건설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적은 점에서 감정적으로 나가지 말고"라는 발언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직접 논쟁을 벌인 사람들이 당시 문단을 대표하는 중량급 인물들이 아닌 좌우익의 소장파들이었다는 사실도 이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셋째, 해방 직후 민족문학 논쟁은 논쟁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조직체의 동향까지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은 이 논쟁의 성격이 논쟁에 참가한 당사자들의 문학적 성향 못지않게 조직체의 정치적 지향점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문학 건설의 기치
민족문학 건설이라는 명제는 좌우를 막론하고 해방 직후 거의 모든 문학단체 가 내세운 슬로건이었다. 좌익 쪽의 '문학가동맹'은 물론이고 우익 쪽의 '문필가 협회', '청년문학가협회'도 그러했다('문필가협회'는 "조선 문학의 발전"을 강령으로 내걸었지만 이 용어도 '민족문학의 건설'이라는 말과 별 차이가 없다). 이렇게 좌우익 문학이 일치했는 데 무엇이 문제인가 ? 문제는 대부분의 정치적 언어들이 그렇듯이, '민족문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용어를 애용하는 사람들이 뒤에 숨기고 있는 의도와 이데올로기적 성격이며, 민족문학 역시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해방 직후의 민족문학은 용어의 동일성과는 상관없이, 좌익 쪽의 경우 '일제 잔재의 소탕과 봉건 잔재의 청산'이라는 정치적 방향을 향해, 우익 쪽의 경우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건설과 완전한자주독립'이라는정치적방향을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방향은 직접적으로는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나타났고, 간접적으로는 소련과 미국이 대표하는 두 이데올 로기에 대한 선택으로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직후의 민족문학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문학단체들의 성격과 노선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해방 직후 가장 먼저 등장한 문학단체는 임화, 김남천金南天에 의해 발족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였다. 카프의 핵심인물이었던 이들은 해방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 재빠르게 '문인보국회' 간판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 간판을 내걸었다. 그리고 남로당의 지지를 등에 업고 1945년 12월 13일에는 이기영李箕永, 한설야韓雪野, 한효 등이 주축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흡수통합 하면서 명칭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바꾼 다음, 1946년 2월 8일과 9일 양일간에 걸쳐 민족문학 건설을 목표로 '제 1회 전국문학자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문학단체로 부상했다. ① 제국주의 잔재 소탕, ② 봉건주의 잔재 청산, ③ 국수주의 배격, ④ 진보적 민족문화 건설, ⑤ 조선 문학의 국제문학과의 제휴라는 5개항을 강령으로 내세운 이 대회에는 이태준李泰俊, 권환權煥, 신석정辛夕汀, 윤기정尹基鼎, 김남천, 김광균金光均, 김태준金台俊, 임화, 홍구, 박영준朴榮濬, 김기림金起林, 노천명盧天命, 오장환吳章煥, 피천득皮千得 등이 참석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당시 이 단체가 토론 과정에서 격론을 벌인 문제가 '문학가동맹'이냐 '문학동맹'이냐는 명칭 문제였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일단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충실성보다는 역량 있는 전문작가를 더 중시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는 사실과, 참석자의 면면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문학의 건설이라는 슬로건 아래 개별 문인들이 지닌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다수의 문인들을 포용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한편 우익 쪽의 두 문학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와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좌익 쪽의 움직임에 자극받아 뒤늦게 결속을 다지기 시작했다. 먼저 '전조선 문필가협회'는 일제강점기에 카프와 대립한 인물들, 특히 해외문학파가 주동이 되어 조직한 단체이다. 변영로卞榮魯, 오상순吳相淳, 박종화朴鐘和, 김영랑金永郞, 이하윤異河潤, 김광섭金珖燮, 김진섭金晋燮, 이헌구李軒求, 오종식吳宗植, 양주동, 서항석徐恒錫, 유치진柳致眞, 이선근李瑄根 등은 1945년 9월 18일에 '중앙문화협회'를 결성했다가, 이듬해 3월 13일에 이 단체를 '전조선문필가협회'로 발전시켰다. 이때 채택한 강령이 ①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건설에의 공헌, ② 완전 자주독립의 촉성, ③ 조선 문화의 발전, ④ 국제평화를 빙자한 세계제패 분쇄라는 4개항이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제 2항으로, 이 말은 1945년 말부터 1946년 초까지 한국을 뒤흔든 신탁통치 문제에서 반탁의 정치적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다음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전자와 별개의 단체라기보다 그중 소장파들이 모여 창립한 것으로 전위대적 성격을 지녔다. 참가자인 곽종원郭鍾元의 표현을 빌면 "공산주의이론을 분쇄하고 공산주의 문학이론을 타도하는" 일종의 전투 단체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민족문학 논쟁의 전면에 나선 우익 인사들이 바로 이 단체에 소속된 김동리金東里, 조연현趙演鉉, 조지훈趙芝薰이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조선문학가동맹' 창립대회에는 소련 총영사가, '전조선문필가협회' 창립대회에는 미군정관이 참석한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도 두 단체가 지향하는 이념적·정치적 목표가 은연중에 드러난다. 해방 직후의 민족문학 논쟁은 좌익 측의 문학이 지나치게 정치에 예속되어 있지 않느냐는 우익 측의 문제제기로 시작되긴 했지만, 실상 양 진영 모두 '민족문학'이라는 말과 상관없이 이면적으로는 제각각 자신들이 나아갈 정치적 방향을 이미 결정해두고 있었다.
'민족문학의 건설' 문제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심도 있게 제기한 사람은 임화였다. 그는 카프 서기장을 지낸 전력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즉각적인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아니라 시민계급이 주도하는 근대적 부르주아혁명을 주장했다. 그는 "민족문학은 한 민족을 통일된 민족으로 형성하는 민주주의적 개혁과 그것을 토대로 한 근대국가의 건설 없이는 수립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이런 "개혁은 역사적으로 조선 시민계급의 손으로 실천될" 성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경우 이런 역할을 담당할 시민계급이 제대로 성장하기 전에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에 당면과제인 봉건적 문화유산과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시민계급의 일정한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면 임화의 이런 주장은 일제강점기에 그가 참가했던 프로문학운동을 논리적으 로 부정하는 것일까 ? 여기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므로 1924-1925년대로부터 10년간 프롤레타리아문학이 이론적, 창조적으로 문학계의 주류를 이룬 것은 단순히 외래사조나 문학적 유행의 결과도 아니며 조선 문학이 이미 역사상에서 민족문학 수립의 과제가 해결되었거나 과거의 일로 화했기 때문도 아니다. 조선의 시민이 힘으로 약하고 그 진보성이 역사적으로 단명하였다. 하더라도 근대적인 민족문학 수립과제는 의연히 전민족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임화는 한국 문학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주도성이 발휘된 시대가 이미 있었다고 말하면서도 다시금 시민계급의 역할이 기대되는 민족문학 수립의 과제를 내세웠다. 이처럼 맑시즘의 역사발전 법칙에서 볼 때 앞뒤가 어긋나는 주장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 그것은 아마 첫째, 일제 치하에서의 프로문학운 동은 성숙한 자본주의사회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한 운동이라기보다는 민족해방이라는 커다란 목표가 프로문학에 도덕적 우월성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라는 자기반성의 소산이며, 둘째 일제 치하에서 대립적 상태에 있었던 민족주의문학 계열과 프로문학 계열의 인물을 두루 포용하여 민족문학 건설에 동참하게 만들어야겠다는 해방 직후의 현실적 필요성의 소산일 것이다. 어쨌건 임화는 이렇게 1920년대 한국 프로문학의 융성을 정상적인 역사발전 법칙의 예외적 상태로 규정함으로써 맑시즘의 발전법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시민 계급이 주도하는 민족문학의 건설이라는 단계를 설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이처럼 비교적 유연성을 지니고 있던 '문학가동맹'의 민족문 학 개념이 좌우익의 정치적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또 문학단체들 사이의 노선정 립이 본격화하면서부터 점차 협소해지고 과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7 년에 이르면 임화 자신부터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그때 (근대 서구문학 형성기를 가리킴 - 인용자)에 있어서는 시민계급의 이념을 기초로 한 민족문학이었던 데 반하여 현대에 있어서는 노동계급의 이념을 기초로 한 문학이 민족문학이 될 따름이다. (...) 상이한 두 가지의 민족문학을 혼동하여서 전 시대의 민족문학이 건설되던 방법으로 현대의 민족문학을 건설하여보려는 무모한 기도에 우리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이념 대신에 토착자본계급의 이념을 기초로 하여 식민지의 민족문학을 건설하려 들기 때문이다.
임화는 1947년경에는 노동계급의 이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다시 자신을 변화시켰다. 이런 변화는 아마 당시의 정세, 이를테면 친일파와 토착지주세력이 서서히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 추세에 맞춰 우익 문인들의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공격의 칼날을 세울 필요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임화의 민족문학 개념의 변화는 우익에 대한 공격의 첨예함을 획득하는 대신 초기의 유연성을 잃어버림으로써 대중적 기반을 불가피하게 스스로 축소시킬 수밖에 없었다.
김동리와 조지훈의 민족문학론
해방 직후의 민족문학 관련 주목할 논쟁으로 좌우익 사이의 직접적 논쟁이 있다. 논쟁의 전면에 나선 것은 김동리, 조지훈, 김동석金東錫, 정진석, 김병규金秉 逵 등 좌우익 소장파 문인들이었다. 1946년부터 1948년 8월 사이에 전개된 이 논쟁에서 우익 쪽의 민족문학 개념은 일제 치하에서 민족정신의 보존을 내세우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비정치적이고자 했던 민족주의문학의 전통과 1930년대 순수문학의 이념을 비교적 충실히 답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논쟁에서 우익 측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로 활동한 김동리는 1946년에 발표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만약 토지개혁과 국유를 주장하는 것이 좌익이라면 조선 사람의 전부가 좌익이요, 민족해방과 완전독립을 갈망하는 것이 우익이라면 조선 사람은 전부 우익일 것이다. 조선의 소연방화 거부가 우익이라면 우리는 모두 우익이어야 할 것이고, 조선의 미국 식민지 배격이 좌익이라면 우리는 모두 좌익일 것이다"("좌우간의 좌우", ‘백민’ 제 5 호). 언뜻 보기에 좌우익을 동시에 비판하는 것 같은 이런 태도는 어떤 논리적 근거에서 나온 것일까 ? 이 점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민족적으로 과거 반세기 동안 이민족의 억압과 모멸 속에 허덕이다가 오랜 역사에서 배양된 호매한 민족정신이 그 해방을 초래하여 오늘날의 민족정신 신장의 역사적 실현을 보게 되었거니와, 이것은 곧 데모크라시로 표방되는 세계사적 휴머니즘의 연쇄적 필연성에서 오는 민족 단위의 휴머니즘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민족정신을 민족 단위의 휴머니즘으로 볼 때, 휴머니즘을 그 기본내용으로 하는 순수문학의 관계란 벌써 본질적으로 별개의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목적하는 민족문학이 세계문학의 일환으로서의 민족문학인 것처럼, 우리의 민족정신이란 것도 세계사적 휴머니즘의 일환인 민족 단위의 휴머니즘으로서 규정될 것이며, 이런 민족 단위의 휴머니즘을 세계사적 각도에서 내포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순수문학인 것이다.
김동리는 문학의 본질적 속성은 인간성 옹호라고 주장하면서 휴머니즘에 바탕한 순수문학이 민족문학의 실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기구의 결함과 유물사관적 세계관의 획일주의적 공식성을 함께 지양하여 새로운 보다 더 고차원적 제 3세계관을 지향하는 것이 현대문학정신의 세계사적 본령이며 이것을 가장 정계적正系的으로 실천하려는 것이 오늘날 필자가 말하는 소위 순수문학 혹은 본격문학이라 일컫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그의 민족문학론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는 그의 말처럼 순수문학만이 인간성을 옹호한다고 믿을 근거가 없기 때문이며, 또 세계사적 발전법칙 속에서 순수문학이 휴머니즘의 어떤 발전법칙을 따라왔다면 그 문학을 반드시 순수문학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조지훈의 민족문학론은 1947년에 씌어진 "민족시를 위하여"에서 엿볼 수 있다. 글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특수성보다 세계적 보편성에 입각해 전개되고 있는 이 글에서, 그는 "시류의 격동 속에 흔들리지 않는,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영원히 새로운 것이 시 본래의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그에게는 절대적 시정신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상정되었고, 그 정신은 어떤 정치이데올로기와 "함께 일어나고 그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닌 영원불멸의 실체였다. 그는 이런 시 정신에 바탕해 좌익 측의 시들을 시류에 야합하는 '정치편당의식의 시'라고 공격했다. 그의 "순수시의 지향 - 민족시를 위하여"에 나오는 다음 대목 역시 그런 자세를 잘 보여준다.
시인은 민족시를 말하기 전에 그냥 시 자체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시가 된 다음 그것이 민족시도 되고 세계시도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시의 전통이 확립되지 못한 이 땅의 시가 민족시로서 세계시에 가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어날 것은 순수시운동이 아닐 수 없다. 순수시운동은 곧 시의 본질적 계몽운동인 동시에 그의 발전이 그대로 민족시의 수립이기 때문이다. 시가 시로서 가진 바 그 본래의 가치와 사명을 몰각하고 시의 일부 인자요 오히려 그 부수성인 공리성을 추출 확대함으로써 시의 전체로 삼고 자신의 문학적 창조와 개성의 무력함을 엄폐하고 정치에의 예속, 정당과의 야합의 당위성을 부르짖는 수다한 시인은 기실 시인이 아님으로써 민족문학의 지류는커녕 정치부동세력 밑으로 추방될 성질의 것이다.
이 글에서 '시'를 '문학'으로 바꾸어 읽으면 조지훈이 생각하는 민족문학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민족문학은 먼저 문학다운 문학이며, 문학 본래의 가치와 사명을 다하는 문학이다. 그런 관점에서 정치나 정당에 야합하거나 예속된 좌익문학은 올바른 문학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지훈의 주장에 대해 문학 본래의 가치와 사명이 과연 무엇인가, 문학이 문학다워진다는 것 속에 인간의 삶에 대한 관심은 배제되는 것인가 등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조지훈의 주장과 태도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는 문학의 본질적 속성인 공리성과 쾌락성을 인위적으로 구분하여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김동리와 조지훈의 민족문학론(순수문학론)에 대해 좌익 쪽의 김동석은 "민족이 해방되려면 승무를 잘 춘다든지 무녀도를 잘 그린다든지 하는 것이 선결 문제가 아니라 (...) 조선의 인민이 먼저 자유로운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며 다소간 야유를 섞어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문학가의 생명인 문학까 지도 버리고 민족해방의 전사가 된다면 그런 사람은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문학가의 영예를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다소 과격한 논리를 전개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그런데 김동석의 논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위와 같은 말들이 아니라, 우익 문인들의 정치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유물사 관을 무의식적으로 배격하면서 '순수문학'을 가지고 '독립촉성'을 하려는 것은 불순한 결과를 낳을 따름"과 같은 말들이다. 좌익문학의 정치성을 비난하는 우익 측의 민족문학론(순수문학론) 역시 정치성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진석은 1948년에 발표한 "순수의 본질"을 통해 우익 쪽의 민족문학 (순수문학)을 매국문학으로 규정했다. 순수문학이 "문학에 있어서의 정치성 내지 사상성을 부정함으로써 무내용한 형식의 치중을 주장하여 몰락하는 자기 계급의 장래를 예언하는 현실을 은폐·회피"하려 할 뿐만 아니라, "조선을 노예화와 멸망으로 이끌어가는 정치적 매국노선에 봉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진석의 비판은 대체로 김동석과 궤를 같이했지만, 그중 순수문학의 복고적 성격이 해방정국에서 노정해 보인 자가당착적 측면을 지적하는 부분이 주목된다. 그는 우익 측의 민족문학론(순수문학론)이 "항시 민족적 전통과 감정에 호소하여 연면한 민족의 역사를 자랑하다가도, 금일과 같은 결정적 단계에 가서는 (...)외국군대의 주둔을 호소하고 일국 신탁을 감수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 그는 미국의 지원 아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된 사실과 이 결정을 우익 쪽의 순수문학자들이 환영했던 사실을 비판했던 것이다.
어설프게 결말을 본 논쟁
좌우익 소장파들 사이에서 전개되었던 민족문학 논쟁은 1947년을 전후해서 '문학가동맹'의 간부들이 대거 월북하고, 48년 8월과 9월에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더 이상 논쟁의 긴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1949년 1월 1일자 "국제신문"에 실린 김동리와 김동석의 "민족문학의 새구상"이라는 대담은, 이 논쟁의 어설픈 결말을 선언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도 김동리는 전과 같은 맥락에서 "이 민족의 영원한 생명이 되고 정신적 원천이 될 하나의 고전으로서의 민족문학" 수립을 주장했으며, 김동석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쇠사슬을 끊고 역사적 행진을 시작한 후에도 (...) 구태의연한 순수를 주장하는 것은 시대적 착오도 착오려니와 문학을 망치는 것"이라며 김동리를 비난했다. 그러면서 김동석은 임화의 민족문학론을 이은 맥락에서 '민주주의적 내용'을 가진 "조선의 현실에 가장 적합하고 가장 진실한" 민족문 학 수립을 요구하고 그 방법론으로 리얼리즘론을 들고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김동리는 리얼리즘이란 용어를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인지 보편적인 문예사조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인지 그 개념부터 분명히 하라고 날카롭게 반격했다.
이렇게 좌우 소장파의 두 대표가 최종적으로 벌인 민족문학 논쟁은 각자의 이전 주장이 팽팽하게 되풀이되는 가운데 종말을 고했다. 김동리의 영원한 가치를 지닌 '고전으로서의 민족문학'과 김동석의 '인민의 생활묘사'에 충실한 리얼리즘문학이 평행선을 달리는 것으로 논쟁은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때 제기된 주요 문제들이 80대의 민족문학론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부활하여 논쟁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민족문학이란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명제를 윤리적 당위성으로 느껴야 하는 우리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말이다. 그러나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에는 분단극복을 지향한다는 미래적 의미만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비중으로 과거적인 의미 역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민족문학이란 개념은 우리나라 특유의 복잡한 굴곡을 겪어왔다. 따라서 우리가 민족문학이란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21세기적 현실의 의미 못지않게 이 개념이 겪어온 역사적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개념에는 지난 시절 우리 문학사가 부여한 의미, 당대인들의 인식수준과 상황이 부과한 여러 의미가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으며,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오늘의 민족문학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방 직후의 민족문학 논쟁이 지닌 의미와 논리체계를 더듬어보는 데는 그런 저간의 사정들을 이해함으로써 지금의 민족문학론을 좀 더 겸허하게 펼친다는 이유도 포함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