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e original : 13. 프로문학 논쟁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민족문학론의 단초가 되는 프로문학계와 비프로문학계의 논쟁은 프로문학이 발생한 1925 년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지만,  그것이 우리 문학계에 미친 파장은 8.15 직후의 민족문학론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어느 한 시기에 국한하지 않고 근대 문학사 전체의 흐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흔히 프로문학계와 비프로문학계의 논쟁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대단히 불완전한 것이다. 물론 당시 논쟁의 일부에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이념적 대립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당시 논쟁구도를 이것으로 환원시킬 경우 이 논쟁이 우리 문학사에서 갖는 의미를 편협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이 논쟁을 조명할 때는 그 핵심을 제대로 끄집어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조선적 특수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프로문학의 대두 논쟁 3파전

 

논쟁이 처음 시작된 것은 카프조직이 아직 결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프로문학을 주장하는 논의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하던 1925년 초이다. "개벽" 잡지사는 여러 문인들에게 계급문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설문을 보냈는데, 여기에 대해 프로문학을 주장하던 김기진金基鎭, 박영희朴英熙 외에 이광수, 염상섭廉想涉 등이 답변했고, 그 과정에서 프로문학과 비프로문학은 대립적 견해를 보였다. 그리하여 이 설문은 본격적인 논쟁을 예고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때부터 논쟁이 단순히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프로문학을 강력하게 지지하던 김기진과 박영희는 비록 관념적인 것으로 채색되기는 했지만 사회주의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프로문학을 반대하던 이광수는 비록 타협적 성격이기는 하지만 민족주 의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또 프로문학을 반대하지도, 당시의 프로문학 논의에 동조하지도 않았던 염상섭의 경우, 당시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에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염상섭은 현실의 역사적 필연성에 기초하여 나온 프로문학이라면 정당하고 옹호되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당시 프로문학을 조선적 현실에 기초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는 의미였다. 그는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프로문학 과비프로문학사이의논쟁은민족주의와사회주의의대립이라는단순한 구도가 아닌 훨씬 복합적인 이념적 지평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그 핵심은 조선적 특수성의 이해였다. 

 

설문을 계기로 프로문학과 비프로문학의 논쟁은 한층 격화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논자들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다. 첫째는 프로문학계로서, 김기진·박영희 등처럼 식민지 지배국가의 억압민족과 피식민지국가의 피억압민족 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미명하에 모든 민족적인 것을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규정해버린 이들이었다. 둘째는 비프로문학계로서, 이광수·최남선崔南善·김억金億 등처럼 '조선혼'을 이야기하면서 민족을 현실 면에서 관찰하고 이해하기보다 초역사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의 차원에서 보려고 했던 이들이다. 당시에는 이를 국민문학론이라고 불렀다. 셋째는 비프로문학계로서, 염상섭·양주동梁柱東 등처럼 조선적 특수성을 인식하려 하면서 앞선 두 경향에 비판적으로 접근한 이들이었다. 이 세 경향은 서로 비판의 칼날을 예리하게 들이대면서 논쟁을 한층 확대시켰다. 

 

그런데 논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이 세 경향이 서로 치열하게 주장을 펼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비프로문학계 중 두 번째의 경향, 즉 이광수·최남선·김억 등 국민문학계는 사라지고 나머지 두 경향만 논쟁을 계속 해나갔다. 이광수는 "중용과 철저" ("동아일보" 1926.1. 1-3)에서,  최남선은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 ("조선문단" 1926년 5월호)에서, 김억은 "예술의 독립적 가치" ("동아일보" 1926.1. 1-3)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웠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지는 못했다. 이렇게 된 것은 우선 이들의 논의가 당시 삶의 구체적 현실과 무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이론적 기반이 허약하여 다른 논자들과 실질적인 논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에 대해 다른 논자들이 부분적으로만 반응을 보였을 뿐 그 이상이 아니었던 것 역시 이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둘째로는 1927년에 신간회가 결성되면서 이들 타협적 민족주의자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떨어지고 적극성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서 논쟁구도는 프로문학계와 비프로문학계 중에서 국민문학계를 제외한 논자들의 대립으로 발전했다. 3파전에서 양자의 논전으로 바뀐 것이다. 양자의 논쟁은 1926년 초 염상섭의 프로문학계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염상섭은 "계급문학을 논하여 소위 신경향파에 여함"("조선일보" 1926.1. 22 -2.2)에서 박영희의 "신경향파의 문학과 그 문단적 지위"("개벽" 1925년 12 월호)를 비판했다. 

 

이 글은 얼핏 프로문학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박영희 식의 프로문학을 비판한 것이지 프로문학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프로문학 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던 염상섭으로서는 박영희 식의 프로문학관, 즉 현실의 구체성에 입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을 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미성숙하다고 판단되어 비판했던 것이다. 특히 계급의식을 고취한다며 살인·방화·파괴 등을 작품에 그려내는 신경향파 문학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더하여, 이런 것은 결코 신경향의 문학이 아닐뿐더러 진정한 프로문학도 아니라고 비판했다. 

 

염상섭의 비판에 대해 박영희는 "신흥예술의 이론적 근거를 논하여 염상섭군의 무지를 박함"("조선일보" 1926.2.3 -19)을 통해 반박했고, 염상섭이 다시 이를 반박했다.

염상섭과 양주동, 유사성과 차별성

 

염상섭이 박영희와 논쟁을 주고받을 무렵 사회운동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신간회가 창립되면서 민족 문제에 일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자와 비타협적민족주의자사이에협동전선이구축된 것이다. 이는 그동안 민족 문제만 나오면 무조건 부르주아적이라고 일소에 붙이던 사람들과 계급 문제의 심각성을 도외시하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극도로 대립되던 민족운동전선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리하여 프로문학과 비프로문학의 대립도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프로문학계는 여전히 민족 문제에 둔감했기 때문에 이 새로운 변화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오히려 임화林和와 김두용金斗鎔 등 카프 도쿄지부로부터 신간회 해소논의가 나올 정도였으니, 당시 카프 내부 프로문학론자들의 지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민족운동의 새로운 국면은 염상섭·양주동 같은 논자들에게 새 지평을 열어주었고, 이들은 이전과 다른 자신감으로 논지를 펼쳐나갔다. 그중 가장 지속적으로 자기주장을 펼친 사람으로 염상섭을 들 수 있다. 

 

염상섭은 « 민족사회운동의 유심적 고찰 » ("조선일보" 1927.1.1– 15)과  « 조선 문단의 현재와 장래 »("신민" 1927년 1월호)에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나뉘어 있는 것이 결코 타당치 않다고 주장하면서, 문학계도 이제 프로문학과 비프로문 학의 분열을 넘어 새로운 차원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로문학은 민족 문제에 대한 무지를 스스로 비판해야 하고 계급 문제에 소홀했던 국민문학론은 편협함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부터 그가 민족을 초역사화시키는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동시에 민족 문제를 단순히 정신상의 문제로만 보고 물질적 현실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무시하면서 무조건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간주하던 당시의 관념적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염상섭은 민족문학론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염상섭의 논지는 사회주의자인 홍기문洪起文 과 프로문학가인 김기진으로부터 비판받았지만, 8·15직후 민족문학론으로 수렴되는 것을 고려할 때 대단히 중요한 이론적 논의였던 셈이다. 

 

여기서 염상섭과 더불어 논의해야 할 이가 양주동이다. 양주동은 1926년에 이광수 비판을 통해 국민문학론의 관념성을 이야기한 바 있었다. 이후 그는 프로문학에 대해서도 간헐적으로 비판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절충론을 내놓는다.  « 정묘평론단총관 »("동아일보" 1928.1.1-18)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현금 그 정당한 의미에서 일치협력할 수 있음과 같이 우리의 전적 목표를 위하여는 이 양파의 문학이 병행와조倂行瓦助할 수 있으리라 믿는 점에서 염씨의 설을 지지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건대, 양주동 역시 프로문학과 국민문학의 협동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문제는 염상섭의 논지와 양주동의 그것이 얼핏 비슷한 것 같지만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양주동은 프로문학과 국민문학의 병행을 주장하는 것이지 결코 이 둘 모두를 지양한 새로운 문학 이념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나름대로 자기 타당성을 갖는다고 믿었고 국민문학론과 프로문학론을 이 두 이념의 문학적 표현으로 보았던 까닭에 둘 사이의 병행과 협조를 생각할 수는 있지만 이 둘을 함께 넘어서는 문학 이념을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 양주동은 철저하게 절충론자였다. 

 

염상섭은 전혀 달랐다. 그는 국민문학론이 민족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는 만큼 민족주의의 문제점이 그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고 보았다. 민족주의는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보려 할 뿐 아니라 자민족 중심주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고, 프로문학은 민족 문제를 몰각하는 관념적 사회주의자들의 지향에 기초해 있는 만큼 그 역시 현실의 필연성에 입각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이 둘의 단순 절충이나 병행이 아니라 둘을 지양한 새로운 문학 이념의 도출이 중요했다. 

 

또한 양주동에게서는 민족주의와 민족의식의 구분이 불명확하지만, 염상섭에게서는 민족주의와 민족의식이 아주 다르다. 양주동은 가끔 자기 이론의 추상성을 벗어나면서 염상섭의 글이 갖는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여 그를 지지하는 경우가 있지만, 염상섭이 양주동의 의견을 받아들인 경우가 없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 때문이다. 

 

이 시기에 염상섭의 논지와 비슷한 견해를 표명한 이는 정노풍鄭蘆風이었다. 그는 대표적인 글 « 조선 문학 건설의 이론적 기초 »("조선일보" 1929.10.23-11.10)에서 '민족의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게 되는지 다면적으로 탐구하여 프로문학과 국민문학의 대립을 넘어설 수 있는 지반을 마련하려 했다. 그가 내세운 것은 결국 '계급적 민족의식'이었는데, 이는 민족의식이 식민지 조선에 서는 계급의식의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의미했다. 그는 "외래 사회사상 에 황홀된 문인 중에 민족의식을 거부하여 왈 환상이라"고 하는 이들, "민족의식에 기울어진 문인 중에 혹은 계급의식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오해하여 청고한 문인의 가히 회고할 배 아니라"고 폄하하는 이들,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대립한 양개로 이해하여 합력 악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모두를 비판했다. 첫 번째 비판은 프로문학을 향한 것이었고, 두 번째 비판은 국민문학에 대한 것이었으며, 세 번째 비판은 양주동 식 절충론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처럼 정노풍은 나름대로 민족과 민족의식을 역사적으로 탐구하고, 이를 토대로 기존의 대립과 이를 절충적으로 해결하려 하는 경향 모두에 대해 대단히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어 이채를 띤다. 정노풍의 견해는 앞서 본 염상섭의 그것과 대단히 유사한데, 실제로 염상섭은 « 문단  10 년 »("별건곤"  1930년  1월호)에서 정노풍의 논지가 자신과 같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미처 다루지 못했던 것까지 해명하고 있다면서 공감을 보낸 바 있었다. 

 

신간회 결성을 전후한 염상섭의 이런 문학론에 대해 프로문학계도 비판을 제기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김기진이 염상섭의 « 조선 문단의 현재와 장래 »("신민" 1927년 2월호)를 두고 쓴 « 문예시평 - 문단상 조선주의 »("조선지광" 1927년 2월호) 이다. 김기진은 염상섭뿐만 아니라 양주동·김억 등을 '조선주의'라고 비판했지만, 이는 염상섭과 그 외 논자들의 미세한 차이를 무시하고 뭉뚱그려 비판한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과녁을 향했다고 볼 수 없다. 염상섭과 조선주의자 라고 비판받은 다른 논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정한 차이를 보지 못한 것은 당시 프로문학가로서 김기진의 안목이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에 대해 염상섭은 « 작금의 무산문학 »("동아일보" 1927.5.6-8)에서 반박했고, 이후 다시 김기진과 리얼리즘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을 주고받았지만, 근본적으로 틀이 바뀐 것은 아니고 단지 그 다루는 대상의 소재가 바뀐 것뿐이었다. 

프로문학의 자기반성과 민족문학론

 

신간회 결성 이후 염상섭의 문학론이 그 강도를 더하고 현실성을 강화했던 반면, 프로문학 쪽의 비판은 오히려 강도가 약해졌다. 당시 프로문학 내부에서는 그나마 일각에 존재했던 민족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조선적 특수성에 대한 인식이 1928년 12월테제의 영향으로 인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더 나아가 신간회 해소를 주도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어, 이런 문제의식이 싹틀 수 있는 최소한의 지반도 상실되었다. 때문에 생산적 대화가 힘들었고, 이후 논쟁의 형태로나마 아예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신간회 해소 이후 염상섭은 큰 실망감에 젖어들었다. 일제 파시즘이 강화되고 그토록 기대를 품었던 협동전선의 전망마저 사라지자, 더 이상 자신의 지향을 지탱하기 어려워졌다. 카프와의 대화도 끊어진 상황에서, 그는 이와 관련한 글을 발표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염상섭이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해서 다시 글쓰기를 재개한 것은 8·15직후였다. 그 무렵 염상섭은 이전 논의의 연장선에서 민족문학론을 내세웠는데, 이는 과거 프로문학론자들의 자기반성과 맞물려 힘을 얻게 되었다. 

 

일제하 프로문학가들은 1930년대에 이르러 다양한 자기반성을 시작했다. 가장 의미 있는 것은 바로 민족 문제와 조선적 특수성에 대한 그동안의 무지를 반성한 것이었다. 그중 안함광安含光은 매우 특이한 존재로, 당시 카프 내에서 한창 분분하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 시기에 조선적 특수성 문제를 내걸면서 이를 반대할 정도로 카프 내에서 상대적으로 민족 문제나 조선적 특수성의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이로 인해 같은 카프 비평가였던 임화로부터 조선주의를 옹호하는 멘셰비키라고 비판받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조선적 특수성을 고찰했다.  8·15이후 그가 프로문학론 대신 민족문학론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것 역시 일제하의 이런 지향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임화는 중일전쟁 이전까지 도 관념적 국제주의에 매몰되어 있었기에 '민족'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1938년 이후 이식문학론을 내세우면서 그로부터 조선적 특수성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의 이식문학론은 과거의 관념적 프롤레타리 아 국제주의에서 벗어나 조선적 특수성을 읽게 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것이었지만, 그 이론적 기반은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관념성을 노정하는 아쉬움을 남겼다(그러나 과거에 비해서는 일층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임화도 8·15직후 민족문학론을 내세웠는데, 그 역시 조선적 특수성을 인식하려 했던 일제하의 이론적 도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과거 프로문학 논자들은 조선적 특수성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반성하면서 민족문학론에 다다랐고, 염상섭은 과거 프로문학과 국민문학을 지양하고 새로운 문학론을 추구하려던 노력의 연장선에서 민족문학론을 내걸 었기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행복한 결합을 할 수 있었다. 8·15이후 남북에서 이루어졌던 이런 민족문학론의 햇살이 냉전적 분단구조로 말미암아 상당기간 한반도에서 사라졌던 것은 우리 근대 문학사에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프로문학과 비프로문학으로 나뉘어 대립했던 일제하 우리 문학이   8·15이후 민족문학론으로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치열한 논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이 논쟁이 우리 근대 문학사에서 갖는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