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de traduction : 11. 대한제국의 역사적 평가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Onglets principaux
Texte original:
이제까지 대한제국의 역사적 위치에 대해서는 세 가지 접근태도가 있었다. 첫째는 식민지화의 책임이 대한제국 또는 광무 정권으로 표현되는 당대 권력에 게 있었다는 태도이다. 둘째는 1894-95년의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의 실패로 식민지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대한제국은 그 이후 10년 정도 지속된 외세의 세력균형 위에 위태롭게 서 있던 정권이자 체제일 뿐이라는 태도이다. 셋째는 대한제국 수립은 식민지화의 위기에 처하여 지배계 급이 시도한 최후의 근대화개혁의 일환이었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 일제의 침략 강압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보는 태도이다.
대한제국 당시의 평가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당대에도 있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 (황현黃玹)의 당대에 대한 평가는 자못 냉소적이며,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정교 )의 평가 역시 극도로 비판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평가는 대한제국 내 반체제적 집단의 정서를 보여주는 정도였다. 역사적 실체로서 대한제국을 본격적으로 평가한 것은 일본인들이었고, 그들의 평가는 대개 아래와 같았다.
조선 초기까지 비교적 정비된 사회체제와 문화를 구축하고 있던 조선왕조는 중기 이후 사화士禍, 당쟁 등의 내분을 거듭하면서 정체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서세동점 西勢東漸의 위기를 맞이해서도 청국淸國에 기대어 잔명殘命을 보존하려는 면모를 보였을 뿐이다. 일본이 청국세력을 몰아내고 조선을 독립시켜주는 한편으로 선의의 충고와 조력을 제공했음에도, 조선은 그를 거부하고 다시 러시아세력을 끌어들이는 등 사대주의적 구태를 답습했다. 비정秕政은 계속되었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으며, 러시아의 야욕은 갈수록 노골화되어 결국 일본은 전쟁을 통해 동양평화의 항구적 기틀을 다지는 수단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일본은 선의善意로써 조선이 독립의 내실을 다질 수 있도록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이미 쇠미한 나라를 되살릴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양국의 합병은 불가피했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조선은 원래 독립할 가능성이 없는 나라였고, 대한제국 역시 그 연장에 불과했다. 대한제국의 의의는 오히려 일본에게 선의의 원조를 받아 진행되었던 갑오개혁을 붕괴시킨 데서 찾아야 하며, 그것은 한국의 자주독 립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었다. 이 평가는 지금까지도 대한제국에 대한 대중적 인식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광무개혁 대한제국 논쟁
역설적이지만, 이런 대한제국관은 반일민족주의 역사학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신용하愼鏞廈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신용하는 대한제국을 친러 수구파 정권이 만든 반동적 체제로 규정하고, 대한제국기에 설사 개혁적 조치가 취해졌다. 해도 그것은 독립협회와 정부가 비교적 협조관계에 있던 1897년 말에서 1898년 초까지의 극히 짧은 시기에 이루어진 일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즉 상공업부문에서는 '재야 개혁파의 신산업운동'으로, 교육부문에서는 민중과 개혁가들의 '신교육운동'으로 일정한 진전이 있었지만, 정부는 이들 운동을 방해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은 1898년 3월을 전환점으로 국제 세력균형이 잘 형성된 절호의 기회를 획득했으니 이제는 언젠가 국제 세력균형이 깨어져도 독립을 지킬 수 있도록 대개혁을 단행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 개혁은 갑오경장의 부정적 측면인 타율성을 교정하고 갑오경장의 긍정적 측면은 한 걸음 더 전진시키는 개혁이어야" 했음에도, 오히려 개혁운동을 탄압해버린 데 대한제국 멸망의 근본적 이유가 있었고, 이 반동성이 대한제국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신용하, 1978).
김용섭金容燮은 이와 반대로 대한제국기의 개혁론이 소농경제의 안정을 목표 로 제기되었던 조선 후기 이래의 개혁론을 계승하긴 했지만 시기적 조건에 의해 이미 근대적 변혁사상으로 전환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이런 사상이 권력주 체들에게 수용됨으로써 광무개혁이 진행되었다고 보았다 (김용섭, 1975). 그런데 김용섭의 광무개혁론은 대단히 제한적이며 조심스럽다. 중세사회 해체의 근간 은 토지개혁에 있되, 그 개혁은 어디까지나 이를 필요로 하는 세력에 의해 쟁취되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 근대사의 주체는 광무 정권 담당자들이 아니라 농민이었다. 그렇지만 농민적 입장에서 또는 농민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기는 입장에서 제기된 토지개혁론이 권력주체들에게 수용되고 실현되었다면, 그것 또한 개혁에 다름 아니다. 그는 조선 후기 이래 '지배층을 중심으로 하는 위로부터의 개혁' 노선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은 개항 후 조선왕조의 근대화정책으로 계승되었으며, 갑오개혁 이후에는 지주층 중심의 근대화방안이 개혁의 마스터플랜으로 자리잡았다고 보았다 (김용섭, 1988). 그와 같은 마스터 플랜은 봉건지주층과의 타협 아래 그들의 자본을 근대사회의 형성에 원용하려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었고, 그 마스터플랜을 입안한 자들은 바로 실학파, 개화파의 후예들이었으며, 그들의 이념이 광무개혁의 이념기반이 된 것이었다 (김용섭, 1984).
그런데 김용섭의 광무개혁론의 맹점은 주체의 불분명성에 있었다. 도대체 누가 개혁을 입안하고 추진했던가? 이와 관련된 실증 연구들은 오히려 광무년간 고위관료들의 성향이 대개 보수적 - 반동적이었음을 입증했을 뿐이다 (나애자, 1994; 진덕규, 1983-1984; 송병기, 1976). 이 지점에서 송병기宋炳基는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광무 정권의 주요 담당자들은 보수적 반개혁적이었지만 광무년간에 개혁은 추진되었다. 그 주체는 다름 아닌 고종이었다" (송병기, 1976). 그러나 당시 고종에 대한 이런 평가는 너무 파격적이었다.
강만길姜萬吉은 김용섭과 신용하 모두에게서 문제를 발견했다. 그는 대한제국에 접근하는 기본입장을 '식민지화의 원인규명'에 두고, 정체성론과 외인론 모두를 배격한다는 전제 아래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는 바로 '대한제국 자체'에 있었다고 보았다 (강만길, 1978). 그것은 다름 아닌 군주권 배격의 불철저함, 즉 민권사상의 결여였다. 그는 독립협회가 진정으로 민권적 정치사상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중세적 정치세력에게 모든 권력을 빼앗아 황제에게 집중시키고 독립협회 중심의 근대적 정치세력과 황제권이 결합하여 새로운 권력구조를 형성하려는" 제한된 민권사상을 가졌던 점이 문제였다고 했다. 김용섭의 광무 정권주도 개혁론이나 신용하의 독립협회주도 개혁론이 모두 문제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진덕규陳德奎는 대한제국의 권력구조를 분석하여 그것이 전통적인 '절대 군주시대'로의 환원을 지향한 일종의 '시대반동적 권력구조' 였다고 단언했다. 이 견해는 한국 근대화를 향한 최후의 시도가 좌절된 뒤 등장한 반동권력이 곧 대한제국이며, 그런 점에서 식민지화의 책임은 바로 대한제국 자체에 있다는 강만길의 입론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진덕규, 1983).
그러나 1970년대 말 - 80년대 초의 광무개혁 - 대한제국 논쟁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대한제국 문제가 다시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90년대 중반 이후였다. 이 시기의 몇몇 연구성과들은 그동안 '통설화'되어 있던 대한제국관에 의문을 던졌다.
통설화된 대한제국관에 대한 의문들
개혁주체 문제에 대해서는 대한제국이 위로부터의 근대화에 관심을 지닌 계급 - 계층이라 할 수 있는 재지지주 양반=유생층과 주요 도시의 특권 상인층을 기반으로 한 국가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나애자, 1994)외, 개혁 추진세력에 대해서는 아직 불명확한 점이 많다. 다만 광무개혁을 긍정하는 논자들은 암묵적 으로 그 정점에 고종이 있었음에 동의하고 있다. 고종과 관료제의 상대적으로 비공개된 부문(궁내부 또는 군부)에 속한 관료들을 중심으로 개혁 추진세력이 형성되었고, 그들은 비공개적인 만큼 취약했지만, 개혁을 위한 고종의 인적 기반으로서는 손색이 없었다는 것이다 (서영희, 1998). 이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절차와 방법을 통한 개혁, 즉 제도적 개혁을 불가능하게 하는 치명적 결함이 있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궁내부 관료들이 신분적으로는 구래의 특권 양반계급과 일정한 또는 현격한 거리를 지닌 인물들이었음도 주목되고 있으며, 고종 개인의 성향에 대한 관심도 새롭게 고조되고 있다.
개혁 목표가 식민지화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는 데는 별로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국권의 실체에 대해서는 심각한 의견대립이 있다. 그것이 중세적 왕권 또는 전제황권과 동일시되었는지, 아니면 근대적 국민국가의 주권과 동일한 것이었는지는 쟁점이 될 수 있다.
현재 부각되는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광무개혁의 이념과 방법이다. '구본신참 舊本新參'이 진보적 혹은 근대적 개혁을 위한 이념적 기반이 될 수 있었는가? '동도서기東道西器'의 '도'와 '기'는 각각 어떤 범주로 설정되어야 하는가? 혹자는 '도'와 '기'를 철저히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여 이를 봉건적 사회질서의 틀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둔 사고로 평가하기도 하고, 혹자는 '도'와 '기'가 상호 관련을 맺으면서 동도서기론 자체가 근대화를 위한 이념적 바탕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진오, 1996).
개혁 내용에 대해서는 광무년간 정치체제 개편의 의미와 관련하여 약간의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광무년간 조금이나마 개혁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교육과 경제부문뿐이었다는 것은 1970년대 말의 논쟁에서 이미 합의된 바였다. 최근에는 광무 정권의 정치적 '반동'조차 개혁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이는 '근대'관이 본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현상과도 관련된다. 즉 '자주적' 근대와 '식민지적' 근대 사이에 만리장성 을 쌓을 필요는 없다는 태도이다(양상현, 1996; 전우용, 1997).
마지막으로 개혁의 결과 또는 영향과 관련된 논쟁이 있다. 구체적으로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한 뒤 추진한 제반 정책 또는 '개혁'이 광무개혁과 맺는 관계에 관한 것이다. 토지조사사업을 둘러싼 논의는 이 문제의 핵심을 이룬다. 토지조사 사업이 광무 양전지계사업의 성과를 일부 '흡수'하면서도 그 계급적 지지의 방향을 뒤바꾼 것인가 ? 아니면 토지조사사업과 양전지계사업의 계급적 성격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가 ? 그것도 아니면 토지조사사업과 양전지계사업은 애당초 무관한 것이었는가 ? 같은 맥락에서 일제의 '조선회사령朝鮮會社令'은 대한제국 시기의 회사정책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그 형식과 내용에서 보이는 유사성과 그 계급적 - 민족적 지지방향의 왜곡은 어떤 관계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는가 ? (한국역사연구회 토지대장연구반 , 1994; 전우용, 1997)
또 하나 광무개혁의 추진주체 또는 세력기반의 추후 행태 문제가 있다. 통감부 시기부터 일제 초기에 걸쳐 대한제국의 주요 지지기반이었던 계급 - 계층은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 민중이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 신음하면서 궐기하던 시기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일본 제국주의에 경도되어갔는가, 아니면 적극적으 로 저항했는가? 혹자는 고종의 '독립운동'을 이야기하고 (이태진 등, 1995), 혹자는 고종과 왕족 일당의 매국적 - 자포자기적 행태를 비난한다 (강만길 1999).
논의의 진전을 위해
근래의 대한제국 논의는 '대한제국론'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무절제하 게 진행되고 있는 감이 있다. '무절제'라고 하는 것은 입장과 이론, 그리고 방법이 뒤섞여 있다는 의미이다. 논의의 진전을 위해서는 가닥을 잡을 필요가 있다. 우선 시대인식 과제인식에서 출발하자.
조선 후기 이래 한국사의 과제는 기본적으로 '반봉건 - 반제'로 설정되었다. 그 과제인식을 고수한다면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의 평가기준도 일차적으로 그에 연동될 수밖에 없다. 대한제국이 '자주적 근대'를 지향했는가 아닌가? 지향했더라도 그 방법과 절차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없는가 ? 설사 정당했다 해도 더 나은 대안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더 근본적으로 '자주적 근대'라는 과제인식은 본래 정당한 것이었는가 ?
다음은 주체인식의 문제이다. 농민전쟁이 실패하고 갑오개혁이 좌절된 1890년대 말의 시점에 현실적으로 개혁을 원하고, 또 개혁을 담당할 만한 세력이 남아 있었는가 ? 개항 이래 개혁운동의 두 축을 형성해온 농민층과 개화파를 빼놓고 개혁을 운위할 수 있는가 ? 농민과 민중의 요구를 반영하지 않는 개혁도 있는가 ? 농민전쟁의 패배와 동시에 실낱같이 남아 있던 가능성은 사실상 완전히 소멸된 것 아닌가? 아니면 이때까지도 일본의 메이지유신 같은 개혁이 추진될 수 있는 주객관적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 단서가 마련되고 있었는 가? (梶村秀樹 , 1983) 직접적으로 고종과 그 측근들에게서 '개혁성'을 찾을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방법의 문제이다. 제도와 법률적 장치가 결여된 개혁이 가능한가 ?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기제가 결여된 개혁이 지속성을 얻을 수 있는가 ? 무엇보다 도 불철저한 외세인식 불충분한 현실인식을 토대로 한 개혁이 현실성이 있는 것인가 ?
최근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의 역사적 의의를 인정하려는 견해가 적지 않게 나오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냉소적이다. 그것이 '근왕勤王사학'이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는 곳곳에 널려 있다. 또 1970년대 이래 30여 년간 어렵게 부각시켜온 '민중적 근대'와 동떨어진 근대상을 제시하고 있는 점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하지만 '근대'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전제된다면, 그리하여 '식민지 근대'와 '자주적 근대'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을 이유가 없음이 확인된다면, 자본주의 근대화는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수탈과 착취와 반동, 그리고 처벌과 학대를 동반했음을 고려한다면,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을 더도 덜도 아닌 '외세의 침략 앞에서 국권(=君權)을 지키기 위해 지배계급의 주도로 마지막으로 시도되었던 근대화개혁, 또 그 과정과 결과 성립한 국가체제 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Traduction(s)
Autour du texte:
전우용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사연구실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 근대사를 전공했다. "사진과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
의료문화사" (공저), "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