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e original : 1-7. 훈구와 사림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Onglets principaux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에 대해서는 이미 16세기 후반 간행된 '해동야언海東野言'에서 언급하고 있을 만큼 빠른 시기에 그 대립상과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 정리되었다. 그러나 이런 대립이 선조 대에 들어서 사림의 승리로 귀결되고, 이후의 정치적 관심이 붕당의 전개양상에 집중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은 멀어졌다. 조선 후기 당대 정치에 대한 이해는 당론서黨論書라는 양식의 정치사를 통해 정리되었는데, 여기에서도 붕당정치의 변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한 것이 대부분으로 훈구와 사림의 대립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사화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20세기에 들어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는 일본인들에 의해, 그것도 부정적인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을 병탄한 일본인들은 조선을 식민지로 영속화하기 위해 한민족이 가진 능력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한국사를 서술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이 없이 정체되어 있는 역사로, 정치적으로 분열과 정쟁만을 일삼아온 혼란한 역사로 규정했다. 그들은 한민족 의 정치적 무능을 증명하기 위해 사화와 당쟁을 그 사례로 제시했다. 즉 일본인들 은 조선 중기 훈구와 사림 대립의 소산인 사화와 조선 중후기 사림집권 이후 나타나는 새로운 정치운영형태인 붕당정치를 분열과 정쟁이라는 부정적 측면에서만 주목한 것이다.
이런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은 근대적 학문을 표방하면서도 역사학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사실실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었고, 더욱이 역사학을 정치적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었으므로 일고의 가치도 없었지만, 그 파장은 매우 컸다. 즉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상황에서, 그리고 해방 이후 분단과 군사독재 하의 왜곡된 정치현실에서 이들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민족의 정치능력에 대한 회의를 심어주는 심각한 해악을 끼친 것이다.
붕당정치론의 제기와 사화에 대한 관심
이런 상황에서 한국 민족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역사적 검토는 선결되어야 할 연구의 주요과제였다. 이는 쉽게 진행되지 않다가, 뒤늦게 1970년대 들어 '붕당정치론'이 제기되면서 그 방향을 잡아갔다. 이태진은 조선 중기의 정치를 붕당정치로 명명하고, 그 내용을 학문적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 상호비판을 원리로 하는 정치, 공도실현을 위한 정치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조선 중후기의 정치변화와 발전 과정을 붕당정치, 탕평정치, 세도정치로 나누어 그 역사상을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이전에도 붕당정치론과 유사한 견해의 표명이 없지 않았으나, 이태진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붕당정치론은 조선시대 정치사에 본격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좋은 발판이 되었다. 이후 조선 중후기 정치사 연구는 붕당정치론의 검증과 비판을 통해 그 양과 질을 살찌우면서 당쟁론의 해악을 해소해나갔다.
당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사림과 훈구의 갈등으 로 나타났던 사화에 대해서도 새로운 설명이 모색되었다. 기왕에는 사화를 붕당의 일부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붕당정치에 대한 이해가 축적되고 붕당의 내용과 구조 등이 밝혀지면서 사화는 붕당정치와 전혀 다른 정치구조 에서 나온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훈구와 사림의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고, 연구자들은 붕당 연구의 연장선에서 붕당정 치 형성 과정에 관심을 두면서 별도의 정치구조 변동 과정으로서 사화를 바라보게 되었다.
사화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하나는 사화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밝히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당쟁을 "극한적인 빈곤상황에 서 나타난 사욕을 동인으로 하는 분열된 정쟁"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 경제적 배경을 해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다른 하나의 과제는 사화에 대한 정치적 이해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는 사림이 어떻게 정치주도세력으로 자리잡아갔는가, 그들이 어떻게 사림이 주도하는 정치구조를 만들어갔는가의 문제였다.
사림과 훈구 대립의 경제적 배경
먼저 사화 발생의 경제적 배경을 살펴보자. 주지하다시피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는 일본인들이 주장한 정체성론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고, 내재적 발전론 이 제기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일본인들이 한국 경제의 정체성을 주장하면서 농업과 상업의 미발달과 수공업의 영세성 등을 제시했던 만큼, 그 극복을 위한 연구 역시 이런 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농업 영역에서는 토지사유의 실제에 대한 실증적 연구와 농업생산력 발전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일본인들의 연구가 극복되었다. 먼저 상품유통경제의 발전이 연구되면서 다양한 상인들의 존재형태, 상품유통시장과 유통권, 나아가 국제적 교역체제 등이 밝혀졌다. 또한 도고행위가 보편적 상행위로 정착되면서 상업자본의 축적, 상인자본의 수공업 지배, 생산부문에 대한 상인자본의 투자 등이 확인되었다.
이런 조선 후기 농업-상업 연구의 성과 위에서 사화의 배경에 관심을 기울였던 연구자들은 16세기의 경제적 변화에 주목했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 완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제적 변화가 이 시기에 시작되었거나 발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토지사유화의 결정적 지표로 인식되는 수조권적 지배가 이 시기에 해소되었고, 생산력 발전의 주요지표로서 조선 후기에 성숙된다고 이해되어왔던 이앙법 도 이때 이미 보급되고 있었다. 방천防川이나 보洑 등 적극적인 수리방법이 확대되었고, 적극적인 경지확대책으로 해안이나 저습지의 개간이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상업에서도 활발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장시場市가 16세기에 걸쳐 확대되고 있었고, 장시를 묶는 유통망도 형성되 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중국-대일무역도 활성화되었다.
이런 연구성과들은 16세기가 경제적으로 적극적인 변동기였고, 일본인들이 주장하던것처럼사화가극빈상황에서일어난정쟁이아니었음을분명히 보여주었다.
훈구의 비리
연구자들은 이런 경제적 변화가 사림과 훈구의 정치적 갈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밝혔다. 주지하다시피 사림이 훈구를 비판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정경유착에 의한 경제적 비리였다. 훈구의 권력형 비리는 다양하게 노정되었는데, 가장 쉽게는 수취체제의 운영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부세체제에서 빠져나가고 그 부담을 양인들에게 지웠다. 이로 인해 양인들의 부세부담이 늘어나면서, 이들 중 일부는 도산했고 일부는 훈구에 투탁함으로써 부세체제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훈구들은 불법적으로 많은 투탁인을 거느리게 되었고, 그들을 자신의 농장경영에 이용했다.
당시의 권력형 비리는 토지확보 과정에서도 잘 드러났다. 가장 손쉬운 것은 민이 토지와 함께 투탁해온 경우였다. 이런 현상은 공민의 사민화가 일반화되듯 이 빈번했다. 토지점탈도 많았다. 훈구들은 지방 수령과 결탁하여 둔전이나 주인이 있는 민전을 진황지로 보고하고 이를 입안하는 방식으로 양인들의 토지를 점탈했다. 불법으로 공민을 동원하여 해안가를 막아 간석지를 조성하는 방법으로 토지를 확대하기도 했다.
훈구는 축적된 부를 확대하는 과정에서도 비리를 저질렀다. 가장 쉬운 것이 고리대의 이식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령들이 권세가의 개인적 사채 관리자를 자임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비리는 매우 빈번했다고 여겨진다. 훈구들은 부의 재생산을 위해 새롭게 형성되고 있었던 유통체제를 적극 이용했다. 이들은 권력을 바탕으로 부상대고들과 결탁하여 미곡운송이나 방납 등에 관여하거나 중국무역 등 대외무역에도 참여했다.
훈구의 탄핵과 언론기능의 강화
사화의 경제적 배경과 함께 경제적 변화에 연루되어 비리를 행했던 훈구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를 제어하고자 했던 사림의 동향에 대한 연구도 추진되었. 다 사림은 향촌의 주도층으로서 훈구의 비리가 결국 향촌사회에 부담으로 전가되는 상황을 목도했다 또한 사림 자신들의 노비가 권문에 투탁함으로써 실제적인 피해도 입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림은 자신들의 재생산 기반인 향촌의 건강한 운영을 위해, 또 직접적으로는 자신들에게 미치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훈구의 비리를 견제해야 했다.
이를 위해 사림은 중앙정치에 적극 진출했고, 중앙정치에서 서민의 어려움과 몰락상황을 제시하면서 훈구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사림은 매년 수백 건에 달하는 언론활동을 통해 문제되는 훈구를 탄핵하여 이들을 정치에서 배제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훈구의 비리를 탄핵하면서 사림은 당시 비리를 행했음이 드러난 소수 훈구들 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훈구라는 정치세력 자체가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한계는 당시의 권력구조와 긴밀하게 연결되 어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정치는 권력에 참여하는 고위관료들에 의해 장악될 수 있는 중앙집권 적 구조였다. 이 구조는 조선 건국기에는 지난 시대의 문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제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서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건국 이후 1세기가 지나면서 개혁이 마무리되고 사회가 안정되자,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이 오히려 문제의 근원이 되었다. 특히 자질이 검증되지 못한 집단이 정변을 계기로 공신이 되어 권력을 좌우할 경우 쉽게 문제가 야기될 수 있었다.
사림은 집중된 권력구조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이를 더 분화된 구조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즉 더 많은 사람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구조를 추진했다. 이는 구체적으로 여론을 바탕으로 하는 언론정치의 실현으로 방향을 잡아갔다.
사림은 공론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질 때 국가가 바르게 다스려진다고 보았다. 그들은 여론정치를 이상시하여 이를 추진하면서 스스로도 여론을 형성하려고 노력했으나, 곧 여론을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를 수용할 권력구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 여론을 수렴할 수 있는 기구로는 우선 언론기구인 사헌부와 사간원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대간의 지위보장이 취약하여 언론기능이 상당히 제한받고 있었다. 그러나 사림은 권력구조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론활동체제를 보강해나갔다. 특히 성종 중엽부터 홍문관이 언론기능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홍문관은 경연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으나, 사림이 장악하면서부터 언론기능을 하기 시작하여 언론 삼사체제가 갖추어졌다. 이를 통해 사림은 공론을 수용하여 정치에 반영하는 언론정치를 할 수 있었고, 훈구를 적극 견제할 수 있었다.
무오사화의 발생
이와 같이 사림들에 의해 정치구조가 변화하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 이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사화를 이해할 수 있다. 사림에 의해 추구된 언론기구의 강화는 기득권자인 훈구에게 상당한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훈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림을 견제했고, 정국운영은 파행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사화였다. 사화는 훈구세력이 폭력으로 개혁을 막으려 하는 과정에 발생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수차례의 사화가 일어났는데, 이는 사림의 개혁추진 고비마다 발생하여 사림이 추구했던 권력구조의 변화를 늦추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일어난 연산군 대의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사림이 언론권을 강화하여 훈구를 적극 견제하는 와중에 발생했다. 양자의 갈등상황에서 왕의 입장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성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훈구의 위세에 위축되어 있었으므로, 훈구에 대한 견제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현실적 목적으 로 사림을 지원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달랐다. 연산군은 사림의 견제로 훈구가 약해진 상황에서 즉위했기에 훈구 견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또한 사림이 요청하는 유교적 이념에 따른 규제들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사림들과 갈등을 빚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림은 왕과의 갈등 속에서 훈구를 견제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지게 되었고, 결국 왕과 재상이 결속하여 사화를 일으키자 막대한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화 직후 훈구는 자신들을 견제하는 삼사의 언론활동을 비난하고, 언론기구 를 장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훈구도 언론정치의 이념적 정당성을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언론 삼사체제는 유지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공론정치 역시 유지되었다
낭관의 정치적 지위 강화
중종반정 이후 전개되는 중종대의 정치 과정에 대한 연구도 심화되었다. 사림은 중종반정을 계기로 정치에 재등장하면서 언론기관을 바탕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무오사화를 겪으면서 언관기구만으로는 훈구를 견제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반성하게 되었다. 언론은 정책이 결정된 뒤에 이를 견제하는 것이 일반적인 역할이다. 훈구를 더 적절하게 견제하기 위해서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공론을 반영할 수 있는 정치구조가 필요했다.
이런 모색의 결과 낭관郎官의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는 일이 추진되었다. 낭관은 각 행정부서장관인 당상관堂上官을 보좌하는 중급관료였는데, 사림들은 낭관의 지위를 강화함으로써 당상관을 견제하고자 했다. 사림들은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언론기관을 통해 낭관을 지원함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높여갔다. 특히 낭관들이 직접 후임을 천거하는 자천제自薦制가 시행되면서 그 지위는 한층 높아졌다 이런 변화를 기반으로 낭관들은 각 부서 장관인 훈구를 견제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낭관들은 여론을 수렴하고 이에 입각해서 각 부서의 일을 처리하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공론을 수용하면서 기존의 언론기관인 삼사와 협조하여 함께 공론정 치를 활성화해나갔다.
기묘사화의 극복과 붕당정치의 정립
중종 대에는 낭관권의 형성으로 언론기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고 권력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사림의 정치진출 및 활동이 확대되었다. 주지하 듯이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기묘사림의 진출은 이런 변화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들은 언론 삼사와 낭관직을 장악하고 훈구를 적극 견제하면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훈구와 사림의 갈등과 긴장이 크게 고조되었고, 사림의 개혁을 지원하던 중종이 자신의 주도권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훈신들과 결탁하자, 기묘년에 사림은 다시 사화를 당하게 되었다.
사화 이후에도 왕과 훈구세력은 계속 결속을 유지하면서 사림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왕의 외척이 중재자로 등장했다. 이들은 왕의 신임을 등에 업고 훈구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면서 권력을 집중하는 권신權臣으로 부각되었다. 중종 말기의 김안로金安老, 명종 전반의 윤원형尹元衡, 명종 후반의 이양李樑 등이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권신들이다. 권신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의 권한은 실로 막강했고, 이들의 부정과 비리 역시 심각했다.
그러나 중앙정치에서는 언관과 낭관층이 중심이 되어 이들을 견제하고, 재야의 사림들 역시 공론을 형성하여 권신의 등장으로 왜곡된 정치를 비판하는 등 계속적으로 저항했다. 권신들의 권력형 부정이 민에게까지 많은 피해를 미치게 되면서 민의 무력적 저항이 나타나자, 권신을 중심으로 하는 운영체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명종 말기에 다시 정치가 정상화되고 사림이 정치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공론정치가 본격화되었다. 공론정치가 정립되면서 이를 수용하여 정치에 반영 하는 새로운 정치운영방식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는 붕당정치라는 새로운 정치운영체제로 귀결되었다.
이런 일련의 변화에서 볼 때,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새롭게 변화하는 경제사회 적 환경 위에서 더 발전적인 정치형태를 추구해가는 정치발전 과정의 소산이었다. 그 과정에서 참혹한 정치적 박해인 사화가 발생했지만, 이는 당시 사림이 추진했던 개혁의 강도를 짐작하게 해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또한 이를 극복하고 공론정치와 붕당정치라는 새로운 정치를 열어간 것은 우리 민족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