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e original : 12. 개신교와 전통사상의 충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토착화'라는 개념에는 식물의 메타포가 들어 있다. 어떤 식물의 종자가 땅에 뿌리내리고 자라는 과정과 연관시켜 뭔가 설명하려는 태도를 이 개념에서 볼 수 있다. 씨앗은 본래 불변의 성질이고, 땅을 빌려 자리잡는 것일 뿐이라는 의미가 '토착화'라는 용어 속에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개신교의 토착화'를 말할 때, 이는 어디나 존재하는 개신교의 종자가 다른 곳에 옮겨와 뿌리내리고 정착하는 과정을 말한다.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는 개신교가 한국이라는 땅에 옮겨오는 과정을 흔히 '개신교의 토착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토착화'라는 개념을 쓸 때 암암리에 상정하듯이, 씨앗은 정말 언제나 변함없는 것일까. 한국 개신교는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개신교와 아무런 중요한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할까. 지금 우리가 여러 가지 이유로 '토착화'라는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반드시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 

1920년대 기독교 토착화 논쟁의 의미

 

이 글에서는 개신교가 전래된 이후 한국사회에 정착하면서 제기된 논쟁적 문제를 1920년대까지 살피려고 한다. 1920년대까지 시기를 한정지은 이유는 1920년대에 이르면 한편으로 개신교가 한국사회에서 일정한 권위를 행사하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신교 안팎으로 점차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토착화'의 모델을 준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통상적 의미의 개신교 토착화 논쟁은 1960년대 효율적 선교를 위해 개신교 신학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논쟁을 가리킨다. 1963년 유동식柳東植, 윤성범尹聖範 은 개신교 선교에서 한국의 전통사상과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는 토착화론을 주장했다. 이에 맞서 박봉랑, 전경연은 개신교 신앙의 '절대성과 순수성'을 내세우며 반론을 전개하여 논쟁이 붙었다. 논쟁을 통해 개신교 신학자 사이의 신앙적 입장차이가 분명히 드러났다. 이로 인해 개신교 내의 갈등도 생겨났는데, 그 신앙갈등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1960년대의 논쟁과 비교해볼 때, 1920년대까지 개신교 토착화와 연관된 논의는 여러 측면에서 성격이 다르다. 우선, 단기간 동안 찬반 입장이 명확하게 드러난 1960년대 논쟁과 달리 1920년대 초까지 토착화를 둘러싼 논의는 논의주체가 그리 명확치 못하고 기간도 길었다. 또 주로 개신교가 전통문화 및 사상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면서 빚어진 갈등을 소재로 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상식적 의미의 논쟁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다만 개신교가 정착하 는 과정에서 생겨난 논쟁적 문제들을 살피면서 개신교와 한국사회가 어떤 상호관계를 맺어나갔는지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한글판 바이블과 개신교식 신조어

 

1885년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의 입국으로 개신교의 공식 선교활동은 시작되었다(알렌이 이미 국내에 들어와 있었지만 선교사로서 활동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공식활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조선 사람들은 만주와 일본을 통해 "바이블Bible"을  접했고,  개신교로 개종한 이들도 생겨났다. 이 초기 신자들을 중심으로 "바이블" 중에서 신약의 번역이 만주에서는 1877년부터 1886년 사이에, 그리고 일본에서는 1883-1887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나중에 선교사 중심으로 행해진 "바이블" 번역은 이 초기 번역본을 개정하면서 만들어졌다. 1900년에 신약이 번역되고, 1910년에는 구약이 우리말로 간행되었다. 한글판 "바이블"의 등장은 개신교가 한국사회에 정착하는데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신자들은 유교 경전에 권위를 부여하던 태도를 "바이블"에 적용하기 시작했고, 신앙생활은 "바이블"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한국 초기 개신교의 특징 중 하나인 적극적 사경회査經會활 동은 신자들의 "바이블" 공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여준다.  또한 "바이블"의 유일신은 한국 신자들에게 '하나님'으로 불리게 되어 숫자 표시인 '하나'에 존칭어 '님'을 붙이는 한국어 문법에는 없는 말이 등장했다. '하느님'이 '하늘'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고 할 때,  신자들은 자연숭배의 위험성을 감지하여 이를 피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바이블"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관점과 전통적 죽음관의 갈등도 볼 수 있다. '돌아가시다'라는 표현은 '죽다'의 존칭어로 사용되어왔는데, "바이블" 한글판에서는  '죽으시다'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썼다. '돌아가다'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는 '회귀성'에 거북함을 느낀 신자들 이 여태까지 없던 '죽다'의 존칭 표현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표현법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은, 개신교가 한국사회에 적응해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독특한 개신교 신앙관을 끈질기게 관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신의 신앙관을 관철해나가는 과정에서 개신교는 고정불변인 채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사회 - 문화적 맥락과 복합적으로 상호작용관계를 맺으면서 스스로 변화하게 된다. 

기독교 토착화의 양상

 

개신교는 한국사회에서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선교전략을 구사했다. 의료와 교육사업을 통해 한국 '근대화'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 로써 사람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려 개신교 선교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간접선 교방식이 그 하나이다. 다른 한편 개신교는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웠다. 따라서 개신교는 한국의 전통사상과 관습에 대해 가차 없이 비난을 퍼부었으며 '근대문명'으로서의 자신과 대조적인 '야만'을 성토했다. 가톨릭이 '우상숭배'와 '정교일치'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한 것도 개신교의 이런 차별화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통사상과 관습에 대한 개신교의 비난은 여러 '야만'의 수준을 상정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불교와 유교 등 상당히 세련된 사상과 제도를 구비하고 있는 경우와 무속과 민간신앙처럼 정교한 제도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 개신교의 공격목표는 다르게 설정되었다. 무속과 민간신앙에 대한 개신교의 공격은 '악마숭배'나 '우상숭배' 또는 미신척결의 이름 아래 단호하고 꾸준하게 시행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발이나 저항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악마' 척결을 정당화하는 데는 논리가 필요 없었다. 반면 불교와 유교를 비난할 때, 개신교는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마련해야 했다. 비난받는 쪽의 반박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최병헌崔炳憲(1858-1927)은 다른 종교와 개신교를 비교하고 개신교가 우월하다는 점을 제시하여 개신교 정당화 논리를 마련한 대표적 인물이다. 1907년 "신학월보新學月報"에 발표한 "성산聖山 유람기"에서 유교 - 불교 - 선교를 개신교와 비교했고 (이 글은 1912년에 "성산명경"으로 간행), 1910년의 "사교고략四敎考略"에서는 유교 - 이슬람교 - 힌두교 불교를, 1922년 "만종일련萬宗一臠"에서는 한국의 여러 신종교를 망라한 동서양의 무수한 종교를 거론하면서 개신교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최병헌은 다른 종교가 지니고 있는 긍정적 측면을 무시하고 개신교만의 배타적 절대성을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종교에 부분적으 로 들어 있는 긍정적 측면이 개신교 안에 모두 들어 있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논지를 펴나갔다. 이런 입장을 취할 경우, 개신교와 타종교가 극단적인 적대관계 를 맺을 필요는 없어진다. 1960년대 유동식과 윤성범의 토착화 신학은 이런 최병헌의 신학노선을 이어받아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개신교의 절대적 우월성을 의심하지 않는 집단도 있었다. 이들은 "바이블"의 한 자 한 자가 모두 성령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에 기반해 타종교를 전면 배제했다. 이른바 '정통신학'의 입장이라고 자칭했던 이들은 타종교에 대해 정복자적 자세를 견지하고, 정치적 - 사회적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오직 신앙만’의 관점을 취했다. 대부분의 선교사 들은 이런 입장을 지니고 있었고, 점차 보수신앙 일변도의 이 노선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한국 개신교 신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상당수 초기 신자들의 개신교 입교는 선교사들이 기대하듯 '순수한' 신앙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일반민중들은 한말 혼란기에 피신처를 구하기 위해 교회를 찾았으며, 양반 엘리트들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혹은 근대문명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신교에 의지했다. 선교사들이 보기에 이런 입장은 '순수' 신앙을 훼손하는 것이었기에 용납될 수 없었다. 또한 상당수의 선교사들은 서양인으로서 아시아인에 대한 우월감과 경멸감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한국인 신자들은 자신을 하인처럼 부리는 선교사 들의 고압적 태도에 강한 반발심을 느꼈다. 더구나 구국운동을 교회를 해치는 행위로 규정하고 금지하는 선교사들의 태도는 신도들로 하여금 선교사들을 친일분자로 여기게 했다. 선교사와 일반신자들 사이의 갈등은 점차 증폭되었다. 1903년부터 시작되어 1907년에 절정에 이른 대부흥운동에서 서로의 증오심을 참회하면서 갈등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그러나 1910년 선교사의 전횡에 반발하여  생겨난  '대한예수교 자유교회', 축자영감설의 선교사 지배체제에 대항하여 1918년에 만들어진 ‘조선기독교회’, 1923년  반反선교사적 자치선언을 하며 결성된 '조선자치교회'의 예들은 선교사와 신자의 갈등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선교사 위주의 지배체제가 계속 강고하게 유지되고 정교분 리의 명분을 내세워 교회 내의 민족운동을 탄압하자, 많은 신자들이 교회로부터 이탈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선교사 중심의 보수신앙체제와 다른 신앙노선이 보다 명료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1927년 김교신金敎臣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하고, 선교사풍과 다른 조선식 개신교를 만들어내려 노력했다. 그는 창간사에서 «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신자보다도 조선 혼을 소지한 조선 사람에게 가라 » 라고 말했다. 다음은 그 8년 뒤 창간 당시를  회고하며 한 말이다. 

 

조선의 기독교가 전래한 지 약 반세기에 이르렀으나 아직까지는 선진 구미 선교사의 유풍遺風을 모방하는 지경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알아, 순수한 조선산 기독교를 해설하고자 하여 "성서조선"을 발간한 것이다. (이덕주 - 조이제 엮음,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한들, 1997, 93쪽) 

 

개신교 내에서 독특한 신앙세계를 구축한 인물로는 이용도李龍道를 빼놓을 수 없다. 1928년 새벽기도 중 신비체험을 한 뒤 불같이 부흥운동을 전개한 이용도는, 기존 교회를 가차 없이 비판하고 독자적 신비주의신앙을 주장하여 기존 교단으로부터 축출당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조선 민족의 고난을 일치시켜, 고통을 겪으면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을 주장했다. 또한 서양의 기독교와 다른 동양적 기독교를 추구했다. 

 

서양의 기독교는 동적, 동양의 기독교는 정적. 서양은 물-현세적-형식-외적, 동양은 영-말세적-신비-내적. 서양인은 외적의 것을 더 찾았다. 이제 신비적인 것을 동양인이 찾아야겠다. (유동식, 한국감리교회  사상사, 전망사, 1993, 229쪽에서  재인용) 

 

그는 신비주의 신앙으로 선교사 위주의 서양 개신교를 극복하려 했으며, 동양적인 무無와 공空사상을 빌려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무無가 되어졌사오니 내가 주를 위하여 무가 됨은 마땅한 일이니이다.  (유동식, 한국감리교회  사상사, 전망사, 1993, 229쪽에서  재인용) 

 

기성 교단은 그리스도와 신도의 관계를 부부의 합일적 사랑으로 표현했던 그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단'으로 몰려 쫓겨난 이용도와 동료들은 나중에 '예수교회'를 조직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1930년대에는 이들 외에도 형식화된 기성 교단에서 벗어나 나름의 신앙을 활성화하고자 했던 많은 개신교 집단이 생겨났다. 

 

개신교 내부의 종교운동과 토착화사업

 

1919년의 3.1운동은 당시 개신교를 지배하던 탈정치의 '순수' 신앙노선 아래 서도 개신교도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민족독립의 열망이 크게 내재되어 있었는 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물론 많은 개신교 지도자가 천도교와의 협력 및 정치운동 이라는 이유로 참여를 거부했지만, 적지 않은 신도들이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특히 보수신앙의 요람인 서북 지방은 운동의 핵심 중 하나였다. 아무리 선교사들이 개신교의 절대성과 '순수성'을 외쳐댄다 해도, 이 땅의 개신교는 선교사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순수'할 수 없었다. 

 

1920년대에 개신교는 여러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나는 여태까지 동일시되었던 개신교와 서구문명의 관계를 점차 분리해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문명을 위해 개신교가 반드시 요청되는 건 아니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이 시기에는 근대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논하는 글이 부쩍 많이 나타난다 개신교는 근대과학과의 관계에 대해 보다 명확한 입장을 표명해야 했다.

 

다른 하나는 점점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사회주의의 종교비판에 대응해야 했다는 것이다. 또한 앞서 살펴본 대로 개신교 내부에서 일어난 새로운 종교운동에도 융통성 있게 대처해야 했다. 1930년대 말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해올 때까지, 한국 개신교는 안팎의 도전에 다양한 반응을 보이면서 한국사회에 단단히 뿌리박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