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de traduction : 1-3. 삼별초는 어떤 조직인가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Onglets principaux
Texte original:
12.3세기 고려사회는 대내외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대내적으로 의종 24년 (1170)무인정변 이후 정치적 혼란과 향촌사회의 대대적 저항에 직면했고, 대외적으로는 거란유종契丹遺種-몽골 등 북방세력의 지속적인 침략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세력들은 사병을 양성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했지만 사병은 사적인 관계 외에는 역할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최씨 정권은 사병과 별도로 삼별초三別抄를 조직했다. 삼별초는 공병-사병적 요소를 동시에 지닌 군사조직 이었고, 대몽항쟁기 고려 군사력의 중심이었다. 삼별초는 원종 11년(1270)국왕에 의해 전격적으로 해체되면서 대대적인 대정부-대몽골항쟁을 펼쳤다.
삼별초에 대한 평가로는, 우선 1970년대 -1980년대 초반까지 주로 국난극복 이라는 명제 아래 "무신들의 호국전통" 혹은 "반정부-반몽골투쟁을 처절하게 전개한 용맹스런 활동" 등 삼별초의 대외항쟁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이 주된 흐름이었다. 이후의 연구에서 삼별초 조직은 무인정권의 권력유지를 위한 무력수단으로 파악되었지만, 이들의 대정부 대몽골항쟁을 12-13세기 민의 항쟁과 연결하여 의의를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삼별초의 항쟁은 어디까지 나 개경환도와 삼별초 혁파에 따른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코 몽골의 박해가 염려되어 항쟁을 일으킨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피력되었다. 이런 연구들은 삼별초의 활약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주지만, 서로 혼재되어 자칫 그 본질을 혼동하게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삼별초 조직의 배경과 역할을 중심으로 그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의종 24년 정중부鄭仲夫-이고李高-이의방李義方 등 무신들은 정변을 통해 문신들 을 대거 살육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무인정변은 기존 지배질서를 붕괴시켰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고려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결과 외연상으로는 문신 중심의 문벌귀족사회가 와해되고 무신이 주된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집권세력 내부의 알력 때문에 정치권력은 안정되지 못했다.
무인정권은 이고 이의방 정권 -> 정중부 정권 -> 경대승慶大升 정권 -> 이의민李 義旼 정권 -> 최씨 정권 (최충헌崔忠獻 - 최우崔瑀 - 최항 崔沆 - 최의崔竩) -> 김준金俊 정권 -> 임연 林衍 임유무林惟茂 정권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들 역시 중앙의 권력쟁탈과 향촌사 회 동요에 따른 위기국면을 벗어나기 위한 정책적 대응을 보여주기도 했다. 명종 18년(1188)의 "개혁교서"와 최충헌의 "봉사 10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잦은 정변으로 인한 정국불안을 해소하고 정치현안의 모순구조를 척결함으로써 정치안정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보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적 지배수단을 확대하던 무인정권의 속성상 그 실현에 한계가 있었다.
무인집권기에는 12세기 전반부터 소극적으로 진행되었던 향촌사회의 저항이 전국적 - 대대적인 저항으로 확대되었다. 향촌사회의 저항은 서북면 지역에서시작되어 중 - 남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들 저항은 주로 12세기 전반의 사회경제적 모순에서 비롯되었으며, 신분제사회의 모순이 배가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중앙정부는 지방관을 확대하여 향촌사회를 강력하게 지배하 려 했고, 향촌사회를 주도하던 재지세력들은 이런 통치질서에 결합 또는 대립이 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대응했다. 더구나 무인정변 이후 집권세력은 사적 지배기 반을 확대함으로써 사회경제적 폐단을 가중시키거나, 향촌사회의 반발을 주로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이는 결국 국가권력재지세력민의 지속적인 대립으 로 이어졌다.
향촌사회의 대대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은 그 분산성과 저급성으로 인해 중세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저항 중에는 최씨 집권기의 신라 - 고구려 - 백제 부흥운동처럼 고려사회 혹은 무인정권을 전면부정하는 경우 도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지역 중심의 저항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다는 명분에서 는 커다란 효과가 있었지만, 집권세력의 강력한 진압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고종 3년(1216) 거란유종의 침입으로 최씨 정권에 대한 불신감이 노골화 되고 전쟁을 치르는 동안 가혹한 착취현상이 드러나면서, 신종 대(1197-1204) 이후 소극적으로 펼쳐지던 향촌사회의 저항이 재차 촉발되었다. 급기야 고종 18년(1231) 의 몽골침입은 최씨 정권의 유지뿐만 아니라 고려의 운명을 좌우했다. 최씨 정권의 임전태세는 이 시기 향촌사회의 동향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최씨 정권은 몽골과 1차 전쟁을 치른 바로 이듬해에 곧바로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국왕이 피난하는 것은 어느 시기에나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대외침략을 당하면서 수도를 옮긴 것은 최우 정권의 강화천도가 유일했다. 그들로서는 강화천도가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전술상으로 단기전을 획책하는 몽골의 파상적 공격을 피하기에 유리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다음과같은 점들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1차 대몽전쟁 (고종 18-19, 1231-1232) 패배의 중심에 최우 정권이 있었음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 몽골의 승전 이후 요구 중에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가 있었는데, 이는 국왕을 볼모로 했던 최우 정권으로서는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셋째, 1차 대몽전쟁에서는 초적草賊 같은 저항세력이 중앙정부에 협력하 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후 사회전반적으로 무인정권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이 모두가 최우 정권의 권력유지에 커다란 걸림돌이었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강화천도 같은 응급처방이었다.
최씨 정권의 대몽항쟁은 강화천도 같은 소극적 저항의 형태였지만, 이와 달리 육지에 남겨진 일반민들은 대정부 - 대몽골 이중의 저항을 벌였다. 특히 강화천도 이전 몽골의 1차 침입에 직면했던 저항세력은 일시적으로 중앙정부와 협력하면서 적극적인 대몽항전을 펼쳤다. 그러나 최씨 정권의 강화천도를 계기로 반정부적 양상은 더욱 고조되었다. 중앙정부와 저항세력의 협력관계가 지속되지 못했던 것은, 이 시기 저항이 12세기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연장선에 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촌사회의 대몽항쟁은 새로운 수탈자 몽골의 무차별적 침략행위에 대항하는 그들 스스로의 자위적 행위라는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고종 40 (1253)년 이후부터 저항세력들이 몽골에 직접 투항하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반민의 투항은 일차적으로 굶주림이라는 현실적인 처지의 해결, 강도정부江都政府의 가혹한 수탈에 대한 대응, 그리고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욕구 등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현상은 최씨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고, 종국에는 몽골과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까지 몰고 갔다.
고종 46년(1259)의 대몽강화는 형식상으로는 전쟁이 끝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종과 김준 임연 정권이 대몽관계에서 계속 대립하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볼 때, 전국에 걸쳐 대몽항쟁의 기운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몽골세력에 의지한 원종은 무인정권 마지막 집정자였던 임유무를 제거하 여 무인정권을 붕괴시킴과 동시에 삼별초를 전격적으로 해체했다. 이에 삼별초 는 중앙정부를 부정하고 몽골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그에 따라 전국 각 지역에서 삼별초 항쟁에 영향을 받은 저항이 일어났고, 이는 고려 정부와 몽골 조정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무인정권의 권력은 기존 정치질서를 그대로 수용하여 유지된 측면도 있었지만, 공적 질서를 초월한 사적 권력체계에 의지한 면이 더 컸다. 이들 집권세력의 권력기반은 주로 문객門客 - 사병私兵 등 사적 군사조직이었다. 이들에게는 정권에 대한 도전세력을 제압하고 향촌사회의 저항을 불식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공적 지배체제 외에 사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이 필요했다. 이런 사적관계는 자신이 의탁한 우두머리에게 충성을 바치고 우두머리가 그들의 출세를 보장해주는 상호보완적 결속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컨대 무인정 변의 행동대였던 이고가 그들 무리와 은밀히 교제하면서 "대사大事가 이루어지 면 너희들은 모두 높은 관직에 오를 것이다"라고 약속하면서 가짜 임명장을 만들어주었다거나, 경대승이 도방都房을 조직하여 그들과 숙식宿食을 같이하는 등의 성의를 보이며 그들의 불법행위까지 용인해주었던 사실, 그리고 최충헌의 생질 박진재朴晋材가 사병을 양성하면서 "내 문객들은 용감하고 날랬지만 관직을 얻은 자가 적었다"라고 최충헌에게 불평한 사실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물론 이들은 우두머리가 제거되면 곧바로 해체당하거나 상대방에게 흡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4대에 걸쳐 60여 년간 정권을 유지했던 최씨 정권 역시 국가의 공적 지배체제 를 초월하는 사적 권력체제를 확립했다. 최충헌은 교정도감 도방 - 정방 - 서방 등 사적 지배기구를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아울러 이들은 막강한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최충헌이 가병家兵을 사열하는데 좌경리로부터 우경리까지 군사들이 두서너 겹으로 열을 지어 2 - 3리에 뻗쳤으며, 창자루에 은병을 매달아 나라 사람들에게 자랑해 보이며 오는 사람들을 모집했다. 아들 최우의 가병은 선지교로부터 이령을 지나 숭인문까지 이르렀는데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면서 전투를 연습했다. 문객 중에서 북방정벌에 종군하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먼 섬으로 귀양보냈다"라거나, "날쌔고 용맹스러운 자는 모두 최충헌과 그 아들 최우가 차지했고, 관군은 모두 늙고 약하고 파리한 군졸뿐이었다"라는 등의 사례를 통해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사병 외에 삼별초라는 공병적 성격의 군대도 조직했다.
처음에 최우는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음을 근심하여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 순찰하여 횡포를 막게 하고, 이를 야별초夜別抄라 불렀다. 도적이 여러 도에서 일어나자 별초를 나누어 보내 체포하게 했다. 그 군대가 매우 많아 좌 - 우로 나누고, 또 나라 사람들 가운데 몽골에서 도망쳐 돌아온 자들로 일부를 만들어 신의神義라고 불렀다. 이것이 삼별초가 되었다.
이에 의하면, 삼별초의 전신인 야별초는 처음에는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위해 조직되었으며, 향촌사회의 치안을 함께 수행했다. 이는 중앙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친 치안유지의 공백상태를 야별초가 대신 감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도적이란 비단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만이 아니라 최씨 정권의 정적 혹은 향촌사회의 저항세력을 가리키기도 한다. 야별초는 최씨 정권이 권력강화를 목적으로 조직한 공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그 숫자가 증가한 것은 역시 최씨 정권의 군비강화와 새로운 군사체계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신의군은 대몽항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조직된 것으로, 삼별초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다.
최씨 정권이 방대한 사병조직을 보유하고서도 삼별초를 따로 조직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사병은 최씨 정권을 지탱하는 데는 유익했지만 그 외 공적인 활동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정규군이 유명무실해져 최씨 정권에게는 국가 차원에서 비상시에 대처할 전투편제가 필요했다 그 조직이 삼별초였다. 그러나 삼별초는 외적의 침략을 격퇴하는 전투보다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세력을 진압하고 향촌사회를 지배하는 데 주로 동원되었다.
결국 삼별초는 대몽항쟁기에 무인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고 강도정부의 본토장 악력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인 무력기반의 중심이었다. 더구나 삼별초는 "권신이 집권하면서 이로써 조아爪牙를 삼아 녹봉을 후하게 하고 혹은 개인적 은혜를 베풀고, 또 죄인의 재산을 빼앗아주기도 했다. 그러므로 권신들이 마음대로 부렸고, 그들은 앞 다투어 힘을 다했다. 김준이 최의를, 임연이 김준을, 송송례가 임유무를 죽이는 데도 모두 그 힘을 빌렸다"라고 했듯이 최씨 정권의 붕괴와 이후의 정권교체에서 가장 중요한 무력수단이 되었다. 이런 점들은 삼별초를 평가할 때 그 군사적 성격과 역할을 분리해서 이해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삼별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몽항쟁을 빼놓을 수 없다. 몽골의 고려침략은 국가의 운명뿐만 아니라 무인정권의 권력향방에 중요한 변수였고, 삼별초는 대몽항쟁에서 고려 군사력의 바탕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그 첫 접촉이 이루어지는 고종 5년(1218)부터 삼별초 항쟁이 진압되는 원종 14년(1273)까지 4단계로 나누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단계는 고종 5년에 거란유종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몽골군이 고려의 영역인 강동성江東城에 들어왔던 때로부터 고종 18년(1231)의 1차 침입 이전까지, 2단계는 고종 18년의 1차 침입부터 고종 46년(1259)에 대몽강화를 위해 태자가 입조入朝한 시점까지, 3단계는 고종46 년의 대몽강화 이후부터 원종 11년(1270)의 개경환도까지, 4단계는 원종 11년의 삼별초 항쟁 발발시점부터 동왕 14년 진압까지로 구별할 수 있다. 여기서 실제적인 대몽전쟁 기간은 전쟁이 발발한 고종 18년부터 고종 45년 최씨 정권이 몰락하고 몽골의 요구사항을 수용하여 동왕 46년에 태자가 입조하는 시기까지였다.
대몽항쟁기에 일반민들은 중앙정부의 수탈과 새로운 침략자 몽골에 맞서 이중의 항쟁을 벌여야 했다. 그래서 이 시기 민들의 항쟁은 민족사적 혹은 계급사적 시각에서 조명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한다. 그에 비해 최씨 정권의 대몽항쟁은 강화천도에서 알 수 있듯이 장기전을 펼치면서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강화천도는 몽골이 수전水戰에 약하다는 전략적 측면, 강화도의 지리적 이점, 그리고 향촌사회 저항으로부터의 도피 등, 일찍부터 그배경이주목되어왔다. 그러나강화천도가아무리불가피한선택이었다 해도 본토에 대한 아무런 대책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정권유지 차원으로평가절하되기도 한다.
최씨 정권의 사병은 외적침략이라는 국가의 위기상황에서도 정권유지 외의 목적으로는 거의 동원되지 않았고, 대몽항쟁과 본토장악을 위해 동원된 군사력 은 삼별초였다. 즉 삼별초는 고종 18년 대몽전쟁 발발시점부터 고종 45년 최씨 정권 붕괴까지, 몽골군에 타격을 가하거나 본토의 저항세력을 분쇄하는 선봉대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최씨 정권 몰락 이후 등장한 김준 - 임연 정권은 몽골에 의지하던 원종 및 강화세력과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고, 삼별초 역시 무인정권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원종 11년에 무인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단행된 삼별초의 해체는 이들에게 최대위기였다.
원종이 전격적으로 삼별초를 혁파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강화도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인정권의 군사력이었던 삼별초를 해체한다는 것은 실로 모험이었다. 이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삼별초를 전격 해체했던 것은 무인정 권의 기반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고려를 완전히 복속할 수 없다는 몽골 및 원종과 강화세력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삼별초 집단은 몰락이냐 새로운 항쟁이냐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고, 그들은 마침내 중앙정부를 부정하 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다시금 대몽항쟁의 기치를 올렸다 (원종 11년 6월 - 14년 4월 1270-1274).
삼별초 집단은 배중손裵仲孫의 지휘 아래 왕족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국왕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정부를 결성했다. 이들은 대몽항쟁의 중심부였던 강화도를 버리고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부근 여러 섬과 해안일대를 세력권 내에 두었다. 삼별초 항쟁이 발발하자 향촌사회에서는 이들을 지지하거나 여기 직접 참여하 는 사례들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를 근거로 막연히 삼별초 항쟁과 일반민의 항쟁을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인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자 대민지배의 선봉이었던 삼별초 집단을 향촌사회의 자위적 측면에서 대몽항쟁을 전개했던 세력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향촌사회가 삼별초 항쟁에 가담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고종 46년 대몽강화 이후 향촌사회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던 사회경제적 폐단 때문이었다. 대몽강화 이후 관리들은 피폐해진 국가재정을 보완 유지하기 위한 물자의 부담, 삼별초 항쟁의 진압과 일본정벌을 위한 경비부담, 그리고 대몽강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왕과 태자의 친조비용 등을 부담해야 했다. 이런 관리들의 부담은 곧 민에 대한 침탈로 이어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에 가장 위협적인 것은 몽골의 침탈과 요구사항이었다.
결국 삼별초 항쟁은 무인정권의 몰락으로 인한 위기의식과 몽골이라는 대제 국의 비호 아래서 자행된 극심한 수탈로 인한 고려사회의 총체적 모순이 표출된 것이었다 고려 정부와 몽골은 삼별초 항쟁이 일어나자 강력한 진압책으 로 단시일 내에 이를 진압하려 했다 이는 대몽전쟁이 30여 년의 세월을 끌면서 완만하게 진행되었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이는 당시 고려 정국상황이 고려 지배층과 몽골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향촌사회에서는 삼별초 항쟁에 고무 받아 저항이 확대되고 있었다 고려 정부나 몽골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삼별초 집단은 고려의 중앙정부 와 몽골의 적극적인 진압책으로 인해 진도가 함락되자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아래 제주도에서 마지막 항쟁을 펼치다가 끝내 몰락하고 말았다.
삼별초는 군사적으로 "공병적 사병"이라는 이중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최씨 정권에서는 대몽항쟁과 대민지배의 전위부대로서 역할했고, 최씨 정권 몰락 이후에는 정치권력의 향방에 중요한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무인정권 몰락에 이은 삼별초의 해체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대몽항쟁이 새롭게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때문에 삼별초의 의의를 평가하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고,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었다.
하지만 삼별초의 역할은 거대한 몽골제국에 맞선 고려사회의 역량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는 12 - 13세기 중세적 질서의 변화라는 고려사회 내부 문제, 그리고 몽골이라는 새로운 이민족의 흥기로 인한 대륙질서의 변화와 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무인정권의 변동과 대몽골관계의 추이에 따라 삼별초의 역할은 달리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삼별초 연구는 정치권력의 유지라는 군사적 측면, 이민족에 대한 저항의 측면, 그리고 고려와 원의 관계설정 등 폭넓은 범위로 확대되는 추세에 있다. 그런 점에서 무인정권의 속성, 즉 고려사회의 내부적 측면 혹은 민족과 국가를 앞세운 배타적 측면 등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Traduction(s)
Autour du texte:
L’Histoire de Corée vue à travers ses controverses Vol.I « Période pré-moderne » (p. 201-211)
Quelle organisation étaient les sambyŏlch’o ? par Sin Ansik, chercheur en charge du Centre de recherche de l’unification des cultures plurielles de l’université féminine de Sungmyŏng. Spécialiste de l’histoire de l’époque du Koryŏ, il est notamment l’auteur de « Société locale et régime des militaires du Kory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