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de traduction : 1-2. 고려시대의 신분제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Onglets principaux
Texte original:
인류가 계급사회에 들어선 이래 어느 시대나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했다. 전근대사회에서는 불평등이 세습되고 법적으로 규정되기도 했는데, 그렇게 형성된 것이 바로 신분이었으며, 신분구성은 시대에 따라 변했다.
고려시대의 신분제는 어떻게 구성되었고, 신라나 조선시대와 비교하여 어떤 특징을 보일까? 이런 문제들을 다룰 때 신분의 개념과 관련하여 국가제도적 요인을 중시할 것인가, 사회적 요인을 중시할 것인가, 또는 역사인식과 관련하여 지속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 변화의 관점에 볼 것인가 등등의 차이에 따라 여러 견해들로 갈라져 논쟁이 펼쳐지고 있다.
고려시대 신분제에 대해서는 전체 인민을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는 양천제良 賤制로 파악하는 견해와 귀족, 중간계층, 양인, 천인 각각을 신분으로 파악해 4신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먼저 양천제론을 살펴보자. 982년 (성종 원년)에 작성된 최승로의 상소문에 "본조 양천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입니다"라고 기록되었듯이, 양천제는 고려 초기부터 실시되었다. 양인과 천인의 구분은 세습적, 법제적 차등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양인은 공민이자 자유민으로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권리와 교육 결혼 등의 자유를 누리는 한편 국가에 부세를 낼 의무가 있었지만, 천인은 그렇지 못했다. 천인의 대표격은 노비였다. 노비는 하늘이 낸 다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되긴 했지만, 물건 같은 취급을 받았고 공권력이 신체를 보호해준다 해도 소유주가 임의적, 자의적으로 형벌을 가해 살해하는 것을 제한하는 정도의 소극적 차원에 그쳤다.
신라시대에도 양천제와 관련된 사료들이 몇 개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 제도가 실시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되지 못한다. 또한 골품제라는 세습귀족제가 시행되었기 때문에 양천제가 성립하기 어려웠다. 신라 하대 이래 사회변동을 거쳐 골품제가 해체되면서 고려 초기부터 양천제의 법제적 규범이 시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정형화되었던 그것처럼 천인은 노비뿐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양인신분 내부에서도 신분적 동질성이 확고하지 않았다.
양인신분은 혈통, 직역, 재산소유 등에 따라 다양한 계층으로 나뉘었다. 당시 지배층은 사士, 서庶의 구분을 통해 자신들을 피지배층과 구분했다. 사는 관품을 받은 관료를 중심으로 진사와 유음자제有蔭子孫 등으로 구성되었다. 군역부담, 관료선발과 승진, 형률적용 등에서 사를 우대하고, 그 밖의 생활면에서도 서인과 여러 가지 차별을 두었다. 또한 군반씨족軍班氏族인 군호가 지는 군역과 일반민호가 지는 군역이 이원적으로 구분되어 둘의 계층적 위상이 달랐다. 공장工匠과 상인은 국학에 입학할 수 없었고, 벼슬에 나아가더라도 한품제限品制 의 적용을 받았다. 그리고 본관제가 실시되면서 어느 곳의 호적에 편입되었는지 에 따라 일반 군현민과 향, 소, 부곡민을 구분하고 후자를 차별했기 때문에, 현재 향, 소, 부곡민이 양인이었는지 천인이었는지 논쟁되고 있는 형편이다. 양천제론을 지지한 연구자가 파악한 당시의 신분 계층구조는 다음과 같다.
양인 : 입사직 - 품관(文武實職, 非實職), 진사, 재생齋生, 급제, 사심, 서리(前期)
향리 - 향리, 향직
학생 - 학생 ,유학幼學
서인 - 서인 ,군인, 백정
천인 : 집단천인 - 향, 소, 부곡, 역 관 진의 주민
노비 - 공노비 :궁원노비 관노비
사노비 :솔거노비 외거노비
양천제론에 따른다고 해도 부곡제 지역민을 천인범주에 넣을 것인지 양인 범주에 넣을 것인지, 군반씨족의 군인을 평민범주에 넣을 것인지 지배계층범주에 넣을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양천제가 실시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양천제로는 고려 시대 신분제를 잘 이해할 수 없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그들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에 더 관심을 기울여 향리, 서리, 남반南班, 하급장교 등을 "중간 계층"으로 설정하여 상위귀족과 함께 지배신분으로 파악했다. 이 견해가 현재 대다수 개설서에 반영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의 신분체계는 귀족, 중간계층, 양인, 천인의 넷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중간계층은 귀족과 양인 사이에 존재하는 문자 그대로 중간적인 존재로 파악되기 때문에, 이 견해의 핵심은 귀족신분의 존재를 주장하는 데 있다. 음서제蔭敍制와 공음전시과功蔭田柴科가 실시되고 통혼권通婚圈이 존재했던 것 등을 볼 때, 특권을 세습하던 지배신분이 따로 존재했으며, 그들이 바로 귀족이라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귀족은 비록 법제적, 세습적 요건을 갖춘 신분은 아니었지만, 사회적 신분으로서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4신분제론에 따를 때 신분제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파악된다.
지배계층 : 귀족 - 왕족, 문무고위관료
중간계층- 하급관리, 서리, 향리, 남반, 하급장교
피지배계층 : 양인 - 농민, 상인, 수공업자
천민 - 공사노비, 향-소-부곡민, 화척禾尺, 진척津尺, 재인才人
위와 같은 분류에 동의하더라도 연구자에 따라서 하급품관을 중간계층의 범주에 넣을 것인가, 아니면 고위관리들과 구분하지 않고 양반관료로서 같이 상급 지배신분층으로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 등에서 이견이 있다.
고려시대의 신분-계층구조를 양천제로 파악할 것인가, 또는 지배-피지배의 구분을 중시하여 4신분제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논쟁은 1970년대부터 벌어진 조선 초기 신분제 논쟁의 불씨가 옮겨온 것이었다. 논쟁은 신분의 개념과 분류기준 등에서 차이를 보이면서 전개되었다. 양천제론자는 권리와 의무상 가해지는 법적-세습적 차별의 존재를 신분의 기준으로 삼았고, 4신분제론자는 그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습으로 존재하는 차별도 신분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견해차이는 겉으로는 전자가 개념과 분류기준의 엄격성을 주장하고 후자는 이를 탄력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우리의 중세 또는 근세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역사인식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골품제가 해체된 이후에는 귀속적 요소와 성취적 요소, 즉 사회이동의폐쇄성과 개방성, 신분-계층질서상의 고정성과 유동성이 동시에 존재했다. 문제는 당시의 신분제를 파악하면서 어느 쪽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가이다. 신분제론자들은 전통사회는 근대사회와 달리 지배세력이 신분적으로 존재했다는 인식을 갖고 현실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구조를 그대로 신분제로 파악하는 데 비해, 양천제론자들은 골품귀족제를 해체시키고 성립한 고려 이후의 사회에서 천인이라는 피차별신분을 인정하면서도, 천인을 제외한 나머지 신분에서는 지위획득에서 혈통보다 개인적 성취가 강조되었다는 점을 고려했다.
양천제론과 4신분제론의 어느 편을 따르든, 노비가 천인신분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했다. 양인과 노비 사이에 혼인을 금지하고, 양자 사이에 자식이 생겼을 경우 그 자식을 노비로 만들어 신분을 세습시켰다. 당시 지배층은 노비제를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로 이해했다. 12-13세기 천민들의 항쟁을 거친 뒤 원나라가 고려를 간섭하던 시기에 정동행성 관리로 파견되어 왔던 활리길사闊里吉思라는 사람이 노비의 부모 중 한쪽이 양인이면 양인으로 삼는다는 원칙 아래 노비제도를 개혁하려고 했지만, 당시 지배층은 노비제를 변경하면 나라의 기틀이 무너진다고 하면서 이를 막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양천제론과 4신분제론 사이의 가장 큰 쟁점은 귀족신분의 존재를 인정하는지 여부였다. 골품제의 세습귀족제가 해체되는 과정은 능력은 갖추었지만 골품제에 의해 성장을 제약받았던 육두품 출신과 지방호족 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들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왕조에 편입되어 새로운 지배세력의 주축으로 등장했다. 4신분제론에 따르면, 이들은 성종 대 이후 문벌귀족제가 성립되면서 귀족신분이 되었다. 이런 파악은 사회세력과 신분을 관련시켜 파악한 시도로서 의미가 있다.
귀족사회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관료 임용제도에서 음서의 신분제 적 의의를 강조했다. 음서는 5품 이상 관료의 자손에게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혜택을 주는 제도였는데, 특사特赦처럼 시행한 음서도 있었지만 매년 정규적으로 시행된 음서가 존재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해년에 1명의 관료가 1명의 자손에게만 탁음托蔭한다는 제한은 있었지만, 해를 나누어 탁음한다면 여러 자손이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고 보았다. 더구나 당시 양측적 친속관행과 함께 계급내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문벌들은 다양한 계보로 고위관료, 공신, 왕실에 연결되어 그로부터 음서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파악했다.
음서는 대략 15세 전후에 받았기 때문에 조기에 관직에 진출하는 의미가 있었으며, 이후의 관직진출에서 제약을 받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과거제도의 경우 교육제도가 계층별로 차별적이었던 점이나 음서를 통해 이미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에게 과거에서 특혜를 주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ㅡ 이는 문벌과 무관하게 시행되었던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정치제도상으로 재상들이 정사를 함께 의논-결정하는 의정議政이 이루어지고 광범위한 겸직제兼職制가 시행되면서 정치가 재상 중심으로 운영되었는데ㅡ 주로 문벌 출신이 재상이 되어 귀족사회를 뒷받침했다고 파악했다.
공음전시과는 전시과제도와 별도로 1품에서 5품까지의 관료를 대상으로 차등적으로 토지를 분급한 제도였다. 귀족사회론자들은 이때 5품이란 관료들의 관계官階, 즉 9품으로 구성된 문산계文散階 가운데 5품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음서의 혜택을 부여했던 품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토지는 상속이 허락됨으로써 문벌귀족들의 경제기반이 되었다고 파악했다.
이렇게 고려를 문벌귀족사회로 파악하면서 귀족가문에 대한 분석이 많이 이루어졌다. 해주 최씨, 파평, 윤씨, 인주, 이씨, 경주 김씨, 정안 임씨 등의 가계에서 관직진출방식과 최종 관직, 통혼권 등을 조사하여 소수 문벌가문들이 지배신분이 되어 폐쇄적으로 지위를 이어나갔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귀족사회론에 따른다고 해도 고려의 귀족은 법제적으로 구분되어 존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범주는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우선 무반을 귀족의 범주에 포함시킬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 무과가 실시되지 않았고, 출신성분상 무반은 군졸에서 발탁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문반에 비해 차별을 받았다고 하여 문반만 귀족으로 인정하는 견해가 있는 반면, 그런 차별이 있었다 해도 무반을 귀족에서 제외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또 5품 이상의 관료를 3대 이상 배출한 가문을 귀족가문으로 구분하자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재추宰樞와 같은 고위직 역임자를 배출하는 것이 귀족가문으로 성립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며, 2세대만으로도 문벌이 충분히 성립될 수 있으므로 세대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 사士, 곧 관료층은 대대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하면서 남반까지 포함하 여 관료는 모두 신분적으로 귀족이라는 주장까지 있다.
한편 관료사회론은 위에서 귀족제적 요소라고 파악했던 사실들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골품제를 극복한 고려사회의 발전적 모습을 부각시켰다. 이들은 고려의 관료 임용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제도로서 그것이 능력 본위-실력 본위의 고시제도였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음서는 정례적으로 실시된 것이라 기보다 포상-특사적 성격의 임용제도로서 간헐적으로 실시되었고, 1명의 관료가 평생 1명에게만 탁음이 가능했다고 파악했다. 특히 음서 자체가 세습제 귀족 제를 대변한다기보다는 5품 이상의 관직이라는 일정한 성취적 지위에 도달한 사람에게 탁음의 기회를 주는 혜택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반세습적-반귀족적 요소가 내포되었다고 이해했다. 또한 음서는 초직을 주는 데 불과할 뿐, 그 뒤의 지위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공음전시과에 대해서도 이는 특별상여제 같은 것으로 그 분급기준인 1-5품은 9품 품계 가운데 5품 이상이 아니라 전체 관품을 다섯 등급으로 나눈 것이라고 해석하여, 그것이 귀족제의 경제기반이 되었다는 해석을 부정했다.
관료사회론은 통혼권의 형성도 모든 사회에 나타나는 계급내혼과 다를 바 없다고 파악했다. 고려 중기에 문벌이 형성되긴 했지만, 하부계층에서 과거제도 나 군공軍功 등을 통해 관직을 얻음으로써 새로운 문벌화가 가능했으며, 신흥가 문이 부단히 대두하면서 한편에서는 기존의 문벌가문이 약화되는 등 부침이 컸기 때문에 귀족사회로 간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관료사회론은 더 나아가 귀족사회론의 역사인식상의 문제점을 지적하 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소수 지배층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고, 귀족사회론으로는 골품제를 깨뜨리고 성립한 고려사회를 발전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또한 근대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습귀족제가 유지되 어온 서양과 달리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일찍이 그것을 타파하고 능력 본위의 관료 임용원칙을 세웠는데, 귀족사회론은 이러한 비교사적 안목을 갖기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고려시대를 귀족사회나 관료사회 대신 문벌사회라고 부르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이때 문벌사회란 "귀족사회처럼 특정 혈통이나 가문의 세습특권이 법제화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사회적으로 개인의 능력보다 가문의 배경이 우선시되거나 적어도 그에 못지않게 중시되어 상류층에 대한 우대책이 공공연하게 입안되고 실시될 수 있었던 사회"라고 정의했다.
조선시대에도 문벌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 존속 시기가 짧았고, 고려 때보다 상대적으로 과거의 비중이 커지는 대신 음서의 비중이 낮아졌으며, 양인신분 내부에서 권리와 의무의 보편화가 확립된 양천제가 실시되었다. 또 이른바 산림山林의 존재에서볼수 있는 것처럼 학식이나 덕망이 가문의 배경이나 관위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조선사회의 주도층이었던 학인學人의 호칭에 따라 그 사회를 사대부사회라 부름으로써 고려와 구분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비판에 대해 귀족사회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사회적 신분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귀족 개념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규정한 데서 온 비판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자신들도 나말여초 시기의 사회변화를 담아내기 위해 골품귀족사회와 구별하여 고려를 문벌귀족사회 또는 후기 귀족사회라고 이름 붙였다고 반박한다. 그렇지만 이런 반박에도 불구하고 귀족사회론은 신라와 고려의 관계를 지속의 차원에서 보는 면이 강하고, 관료사회론은 사회변동 차원에서 보는 면이 강하다는 역사인식상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간계층은 상하로 구분된 두 신분 또는 계층 사이에 끼어 이동이 가능하면서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고정성이 두드러지는 계층을 가리킨다. 고려시대의 신분-계층질서를 파악할 때 중간계층을 설정하면 사회이동에서 개방성과 폐쇄성이 공존했음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양-천이나 사-서의 구분만으로는 그 위상을 부여하기 어려운 중간적 존재들을 드러내기 쉽다는 효과가 있다. 다시 말하면 다양한 "중간적" 존재들을 하나의 사회계층으로 범주화하여 파악함으로써 신분-계층질서를 더 쉽게 구조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4신분제론자만이 아니라 양천제론자들도 중간계층의 범주를 양인신분 내부의 계층구조를 드러내는 데 유용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중간계층으로 파악되는 존재로는 대개 향리, 서리, 군반씨족의 군인, 남반 등이 있다. 이들은 고려 초기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면서 지방세력을 흡수하거나 관료제를 정비하는 과정 또는 관료층이 문벌화하는 과정 등과 결부되어 관료 지배층과 평민의 중간에서 상향이동을 지향하면서도 세습성이 강한 존재, 곧 중간계층적 성격을 지니는 존재로 자리잡았다고 했다.
그런데 향리나 남반 등은 임용자격, 지위와 대우, 성립 시기와 변화 과정 등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동일 계층으로 범주화하기 곤란한 점도 많다. 군반씨족 의 군인은 지배층의 일원이었다 해도 때로는 노역에까지 동원되는 처지였기 때문에 서리와 동급일 수 없다 또 대부분의 중간계층은 품관이 아니지만 남반에 속한 전전승지殿前承旨, 좌-우반전직左-右班殿直 등과 무반의 교위校尉는 품관이면서도 중간계층으로 취급된다. 향리의 경우 일반 군현과 부곡제 지역의 향리가 같을 수 없었으며, 같은 지역에서 향리로 근무하더라도 가풍차이에 따라 호장층까지 진급할 수 있는 가문이 있는가 하면 진급이 제한된 가문도 있었다. 이처럼 각각 구체적인 존재양태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하나의 범주로 묶는 것을 거부하는 연구자도 있다.
또한 개념상으로 볼 때 신분과 달리 계층은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연구자에 따라서는 중간계층의 범주를 달리 파악할 가능성이 많다. 이를테면 귀족사회론에서 귀족의 범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중간계층 의 범위도 다르게 파악되었다. 귀족을 5품 이상의 관료로 보는 입장에서는 6품 이하의 관료와 향리, 서리, 남반 등이 정치권력을 잡은 귀족에 대해 실무행정 을 담당한 중간계층이라고 파악했다. 그에 비해 남반을 포함하여 전체 관료가 모두 귀족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그 아래에서 국가지배에 참여하는 향리, 군인, 잡류雜類 등이 일반 군현민보다 지위가 높은 상위 양인층으로서 중간계층이 된다고 했다.
중간계층이라는 용어는 학문적 편의에 따라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연구시각에 따라 담고 있는 내용도 달라진다. "중간" 이라는 용어를 기능론적으 로 사용하여 지배층의 업무를 보조하는 전문지식이나 기능에 숙달한 인물들을 대우하여 중간계층으로 편성했다고 파악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 법제론적으로 사용하여 지배층이 분화하면서 상대적으로 특권에서 배제되고 각종 신분적 규제를 받게 된 계층을 가리킨다고 파악할 수도 있다. 또 중간사회조직론의 입장에서 국가와 민 사이에 존재하는 각종 중간사회조직의 리더들을 중간계층 으로 파악하는 방식도 고려해볼 수 있다.
현재로서는 고려시대의 신분-계층구조를 파악할 때 중간계층을 설정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직역職役과 전정田丁을 보유하면서 백정白丁과 구별되고 어느 정도 세습성도 갖추었던 계층, 곧 향리나 군반씨족의 군인 등을 중간계층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조선시대에 백정白丁이라면 도살업을 주로 하면서 피혁이나 유기제조업을 겸하던 계층을 가리켰지만, 고려시대에는 조세-공부-요역의 부담을 지면서 일반민의 주류를 형성하던 사람들을 백정이라고 불렀다. 보통 그런 일반인들을 백성百姓이라고 부르지만, 고려시대에는 백성이 향리-기인 등과 함께 연칭되면 서 공적 사항에 관련되는 특정 계층으로서 촌락지배자인 촌장-촌정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었다는 연구도 일찍 제기되었다.
이후 그것을 발전시켜 백성은 관리가 될 수 있는 성씨족姓氏族이었으며 계층적 으로 중간계층에 속한다고 파악되었다. 고려 초기 집권적 관료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토호세력에게 정치참여자격을 부여했을 때 지배층의 새로운 범주로 등장한 것이 백성이라는 것이다. 고려의 "백성"을 특정 계층으로 이해하는 견해는 조선 초기의 기록에 나타나는 "고려판정백성高麗判定百姓", "백성성百姓姓"의 존재에 주목하여 백성이 향-소- 부곡 등의 집단과 구별되는 군현민의 신분이며, 군현 내에서도 향리집단과 구별되는 특정 성씨집단이었다고 파악한 연구에서도 볼 수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백성을 촌장-촌정층으로 보는 견해가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중국 고전에 나타나는 백성의 쓰임새를 살펴보면 인민을 전체적으로 가리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인민 가운데 특정 부류, 곧 관료의 가족을 가리키기도 하고, 서인 평민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전근대사회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인 백성을 촌장 촌정층이 라고 역사용어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았으며, 나아가 역사용어로 삼는 근거가 되었던 사료도 재검토되었다.
즉 "향리 백성" 등으로 연칭된 표현을 사용한 사료들이 재검토되어, 고려 전기에는 향리와 백성으로 구분하기보다 본관제에 편입된 백성, 곧 인민 가운데 향리 등의 직역을 갖는 층이 구별되었다고 파악하고, 후기에는 백성이 향리와 구분되어 직역을 갖지 않은 채 부세를 부담하는 공호양인貢戶良人을 의미했다고 파악했다. 공호는 공역貢役을 담당하는 호라는 뜻으로, 고려 후기에 민들의 유망이 심해졌을 때 그것을 추쇄하려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앞에서 고려시대의 중간계층을 설정한다면 국가로부터 직역과 전정을 받아 보유하면서 어느 정도 세습성도 갖추었던 계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게 좋겠다는 점을 말했다. 그 계층이 정호丁戶였다. 정호는 일반 요역을 부담한 백정과 계서적으로 구별되었는데, 본관의 격에 관계없이 어느 본관 단위에나 존재했으며, 국가에서 포상의 수단으로 백정을 정호로 올려주거나 처벌수단으 로 정호를 백정으로 강등시키기도 했다. 백정에서 정호로 충원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직역과 전정을 상속시키는 연립제도連立制度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그 구별은 사실상 고정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정호는 특정 직역을 지니지 않은 일반 백성이고, 백정은 정호 구성원의 하나였다는 견해도 있다. 정호는 국가에서 수취 단위로 파악하는 전정과 호구가 결합된 호이며, 직역을 담당한 계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인을 뽑아 올리는 규정이나 군인전을 지급하는 규정 등을 살펴보면 향리-기인-군반 씨족제의 군인 등 직역을 담당하는 계층이 전정을 보유했음이 확실한 이상, 그들과 계층적으로 구분되는 정호를 따로 설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고려시대에는 특수한 지방행정구역으로 향-소-부곡 등이 있었다. 이곳을 본관으로 하는 이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부세를 내고, 추가로 국가직속지 를 경작하거나 수공업제품을 생산하여 국가에 납부하는 특정한 역을 부담했다. 그들은 잡척雜尺이라 불리면서 일반 군현민보다 차별을 받았다. 국학 입학이 금지되었고,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으며, 승려가 되는 것도 제한을 받았다. 특히 자손의 귀속에서도 노비와 비슷한 취급을 받아, 군현민과 잡척이 결혼하여 낳은 자식은 모두 잡척에 속했고, 잡척 사이의 소생은 반으로 나누어 양쪽에 소속시키되 남는 숫자는 어머니 쪽에 속하게 한다고 정해졌다. 이런 차별 때문에 묘청의 난을 진압한 뒤 관련자 처벌에서 가장 격하게 저항한 자에게는 "서경 역적"이라고 새겨 섬으로 유배하고, 다음은 "서경"이라고 새겨 향-부곡으 로 유배하며, 그 다음은 일반 군현에 흩어두는 식으로 구별하는 것이 가능했다.
향-소-부곡과 비슷한 위상을 갖는 특수행정구역으로 진津-역驛-장莊-처處 등도 있었다. 현재 비판적인 의견도 있지만, 대개 그 지역들이 받는 법제적 차별과 국가에 대해 특수역을 부담한다는 기능적 동질성을 중시하여 부곡제 지역이라 고 묶어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부곡제 지역민의 신분에 대해서도 천인설과 양인설이 나뉘고 있다. 천인설의 주된 근거는 위에서 살핀 것처럼 일반 군현민보다 낮은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점이다. 그 발생과 관련시켜서 볼 때 고대사회에서 소국이 분립하여 서로 투쟁을 벌이면서 발생한 예속민집단이 초기형태의 부곡을 낳았고, 그것이 고대국가의 군현제에서 천인적 특수촌락으로 제도화되었다거나, 나말여초 호족들이 각축을 벌이던 시기에 지배--예속관계에 의해 발생한 예속촌락들이 부곡제로 편입되었다고 파악했다.
이에 비해 양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천인설의 근거가 되었던 사료들을 재검토하면서 이를 달리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테면 부곡인과 노奴가 주인이나 주인의 가까운 친척 어른을 간음했을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이는 고려의 여러 제도가 당나라 법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잘 정리되지 못하고 남은 것일 뿐이라고 했다. 고려 부곡인들은 사적 예속민이었 던 중국과 달리 군현제지배를 받으면서 국가에 부세를 부담하는 공민으로 존재했다. 따라서 주인이 있을 리 없었다. 또한 14세기 후반 부곡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사례를 살펴봐도 천인집단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부곡제의 발생배 경으로는 농지 개간이 진행되면서 월경지越境地 처리 과정에서 나타났을 가능성과, 국가가 필요로 하지만 지역적으로 분리하여 파악하는 것이 유리한 특수한 역을 반왕조적 집단에게 부담시키면서 나타났을 가능성 등이 제기되었다. 아직 다수의 개설서가 부곡제 지역민을 천인이라고 쓰고 있지만, 1980년대 이후 양인이면서 일반 군현민에 비해 차별받는 존재였다고 파악하는 견해가 점차 유력해지고 있다.
이렇듯 고려시대는 양천제를 실시하면서도 양인과 천인 각각의 신분 내부에서 아직 동질성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였다. 부곡제는 12세기부터 차별에 저항하 는 그곳 주민들의 항쟁과 지역개발의 결과 해체되어갔다. 이로써 중간계층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됨과 동시에 양인 내부에서도 신분적 동질화가 뚜렷해졌다. 그런 과정을 거쳐 신분제에서 양천의 신분규범이 명확히 확립되었다는 점을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사회변화의 하나로 파악할 수 있다.
Traduction(s)
Autour du texte:
L’Histoire de Corée vue à travers ses controverses Vol.I « Période pré-moderne » (p. 169-183)
Le système des statuts sociaux de la période du Koryŏ par Ch’ae Ungsŏk, professeur dans le Département des Sciences humaines du Campus du Sacré-cœur de l’Université catholique, spécialiste de la période du Koryŏ. Parmi ses travaux les plus représentatifs, on trouve : « T’aebong, le pays de Kungye, son histoire et sa culture » (collectif, en collaboration) ; « Le pouvoir des hommes de lettres et le soulèvement de la population du So de Myŏnghak (鳴鶴所民) au Koryŏ », « les provinces et le centre dans l’Histoire de Corée », « L’État et la société provinciale de l’époque du Koryŏ ».